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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감동시킨 헌신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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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삶을 살아갈 때 감동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저의 경우에 삶에 많은 감동을 경험하였지만 가장 큰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교육전도사였을 때입니다. 매주일 저의 점심을 싸가지고 오셨던 여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서울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남편의 직장인 세무서을 따라 지방으로 남편과 함께 이사를 오신 집사님이셨습니다. 당시에 교회에서는 점심을 해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전 예배와 그리고 봉사를 바치고 당시에 주일 오후에 2시에는 유초등부주일학교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총각이었던 몸이라 시간도 없고 집에가서 식사를 하고 오리도 애매했습니다. 이런 형편을 아셨던 그 여집사님께서 꼬박 1년동안 맛있는 점심을 싸다 주셨습니다. 그 도시락에는 채소와 고기와 다양한 종류의 반찬을 정성껏 싸고 후식으로 디저트로 먹을 수있도록 과일까지 잊지 않고 챙겨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사랑없이는 어렵습니다. 그당시에 저는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 집사님의 얼굴이 기억나고 유초등부에 다니던 그 아이들이 지금도 얼굴에 그려집니다. 그 집사님의 헌신을 통해서 감동을 받은 저는 주님의 사역에 매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예수님을 감동시킨 한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베다니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마지막 사역을 하시다가 베다니로 오셨습니다.베 다니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쯤 떨어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서는 이스라엘의 최대명절인 유월절을 위한 준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명절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여 드리는 절기이기 때문에 전국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이런 가운데 조그마한 시골의 베 다니에서는 주님을 감동시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다니에서 주님을 위하여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이 장소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 잔치집에서 마리아가 매우 귀한 향유를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나사로의 누이동생 중 한사람인 마리아였습니다.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이 여자의 갑작스런 행동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너무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이 본문의 병행성경인 마태복음 26장 13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며 저를 기념하리라”고 합니다. 주님이 감동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리아가 행한 그 일때문이었습니다. 그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자기를 위해서 쓰지 않았습니다.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쓸 수 있었습니다. 그대신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그 비싼 향유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일도 말하여 이 여자를 기념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중에서 이렇게 크게 칭찬을 하고 높이 평가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12제자가 있지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생존시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런 칭찬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생애 중에 최상의 칭찬을 했던 사람이 마리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예수님 당시에 여자들은 그 이름조차 기억할 필요가 없는 천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여자의 행한 일를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주님을 감동시시킨 마리아의 헌신은 어떤 헌신입니까?

1. 마리아는 비싼 향유 전부를 드리는 헌신을 했습니다.

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 마리아가 주님께 지극히 비싼 향유를 드립니다.
유대인들은 손님이 집에 방문했을때 주인이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바름으로 특별한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회석상에서는 기름으로 만든 향유를 손님의 머리에 붓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경의를 표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유대지방의 건조한 날씨로 인해 피부가 마르고 갈라진 몸에 향기를 내주고 피부를 부드럽게도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향유는 굉장히 값이 비싸서 굉장히 아끼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새 사용한 향유는 지극히 비싼 향유였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에서는 “매우 값진”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시가로 계산하면 어느 정도일까요? 오늘 본문에 머리가 빠르고 셈능력이 좋은 가롯유다의 계산으로는 삼백데나리온정도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 1일 품삯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300일동안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가치의 향유였습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일 5만원으로 계산하면 약 1500만원정도에 해당이됩니다.
마리아가 가지고 온 향유는 비싼 것일뿐 아니라 아주 최상의 질이었습니다.
그가 드린 향유는 “순전한 나드”산이었습니다. 나드라는 것은 티베트와 인도 사이의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에서 자라는 향기로운 풀입니다. 아마도 이 식물이 수출되어 상인들에 의해서 유대까지 온 것이고 극상품 향유였던 것입니다
베다니에 잔치집에 예수님이 오셨을때 마리아는 그 비싸고 귀한 향유를 가지고 가서 예수님을 위해서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그 향유를 옥합에 담아가지고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옥합은 우리의 작은 항아리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위해 사용한 향유가 한근이었기 때문에 그 향기가 집안 가득하게 풍성하게 채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의 마리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
마리아는 언니 마르다 오빠 나사로와 함께 살아가고 있엇습니다. 그렇게 부유한 가정이 아니었고 아직 결혼 전에 있는 상황이어서 앞으로 많은 돈도 필요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계산하지 않고 주님께 쏟아부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향유는 마리아의 재산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아낌없이 모두 헌신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가 자신의 큰 재산을 내려놓은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사는 것은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것은 오직 주님만으로 사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빌립보서 빌3:7-9절에서 “우리의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우리가 생각할 것은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가 해로 여긴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즉 돈이나 지식이나 권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갖고 있는 돈으로 지식으로 권력으로 주님을 위해서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다시말해 나의 물질이나, 나의 사회적 지위 등을 갖고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생각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가장 해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이란? 무엇입니까? 헌금은 이런 멧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라는 고백이 헌금입니다. '난 이것으로 살지 않겠습니다!' 하는 뜻으로 일종의 버리겠다는 행위요, 표현인 것입니다. 엄밀히 생각해 보십시오.  십일조를 내고나면 십분의 구만 남는데 그게 무슨 이익입니까?

우리가 사는 것은 물질이나 이 세상의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양식과 은혜로 살아간다는 신앙의 표현으로서 십일조와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고 하나님께 시간을 바치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내가 가진 그 어떤 시간이나 힘으로도 이익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는 행위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것이 가장 강조된 것이 금식입니다.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먹어서 힘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안 먹는다는 것은 내가 내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식 기도에 잘 응답하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금식기도 후에 일이 되었다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잠을 안 자고 철야 기도를 합니까? 편안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되지 않고,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눈을 뜨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도무지 도리가 없습니다. 해결해 주셔야 됩니다.'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금식이나, 철야는 바로 그런 멧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신앙 생활에서 혼동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시작하신 김용기 장로님에게 한 번은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유명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그 정신과  훈련과 근면에 대하여 감복한 박대통령이 김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뭐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소?' 이 때 김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답니다.  '각하!  각하께서 도와 주시면 우리는 망합니다.' 여러분 이 말의 뜻을 제발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즉, 대통령이 도와 주는 것은 도와주는 것만큼 게으름으로 뛰어넘고 다른 나쁜 버릇을 키우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를 심어서 하나를 거두고, 둘을 심어서 둘을 거두는 것을 착실해 배워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권세가진 자가 나타나 한마디 하니까 십년동안 할 것을 한시간 만에 이루는 것밖에 배우지 않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물질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내가 사는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을 고백하시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마리아는 발을 씻는 겸손한 헌신을 실천했습니다.

12장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는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난 뒤에 발을 씻었습니다. 여기에는 또하나의 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다 부은 셈인데 왜 요한복음은 발에다  부었다고 했을까? 하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그녀의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마리아가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면 그 모습이 어떠 하겠습니까? 주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참으로 처첨한 모습이고 열등감을 느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이렇게 처절한 자존심을 구기는 자리에 자원하여 동참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헌신을 하는데 있어서 발을 닦아주어야 하는 자리에 이르는 경우가 있습니다.어떻게 보면 고난의 자리입니다. 어떻게 보면 멸시와 수치의 자립니다.
가장 귀한 것을 바치면서도 왜 나는 이렇게 취급을 당해야 합니까?
이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의 해당하는 액수를 주님께 바치는데 당당하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바치면서도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바쳤습니다. 삼백 데나리온 이상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1년 봉급입니다. 1500만원정도면 지금 작은 액수가 아닙니다. 굉장히 큰 액수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기 머리를 가지고 주님의 발을 씻어주엇습니다.

고전11:5절에 보면 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을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하챦은 데에 갖다 댄 셈입니다.  그리고 가장  값비싼 것을 거기다 부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최소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문제가 분명히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 전부인 재산을 주님께 쏱아붓고 난 헌신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더욱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자기의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겸손한 헌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인간에게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마리아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자로서 자존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존심에 포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칼  바르트는  “자존심이야말로  원죄의  뿌리다”라고  단언했습니다.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  앞에서  자존심이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헌신할때에 고난도 받고 조롱도 받고 힘도 듭니다. 어떻게 보면 자존심이 상할때도 있습니다.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최소한 헌신하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랑을 통해서 자기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심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헌신을 할때 더 크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럴때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를 위해서 물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몸을 바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발을 씻기는 마리아처럼 자기는 온전히 낮추고 자기는 자랑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높이고 주님만을 드러내는 헌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전부를 내어놓은 것 의미있는 헌신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를 낮추고 주님만을 높이는 겸손은 더욱 큰 헌신입니다.
내가 어떤 큰 일을 해도 세상에서 어떤 큰 자리를 맡았어도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갈6: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영적인 거장이 되어 하나님께 더 큰 헌신을 할 수록 자랑거리가 쌓여갈수록 바울은 세상에서 나를 남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의 일은 자기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바울의 일은 예수였습니다.

여러분 큰 헌신을 하십니까?
우리들의 교회 생활에서 내가 헌금을 좀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교회 속에서 핵심 일꾼으로 중요한 위치를 맡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깨달아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내이름이 드러날 수 있고 내 영광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서 더욱 낮아지기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이제 그 자리에서 더욱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낮아질때 내가 겸손할 때 우리 주님이 높여주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크게 하십니다. 마리아가 엄청난 액수의 향유를 바치면서도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헌신할 때 우리 주님이 그녀를 어떻게 높엿습니까? 마태복음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서로의 발을 씻기시기를 바랍니다. 낮아져서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모든 귀한 은혜와 복들이 겸손하게 남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기회로 드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리아는 사람보다 주님을 의식한  헌신을 실천했습니다.

마리아가 헌신했을때 주변 사람들은 어떤 반응입니까?
여기 가롯유다의 반응을 보십시오.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합니다. 한마디로 마리아의 행동은 가롯유다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보기에는 미친짓이라고 본 것입니다. 한 사람이 1년동안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돈을 순간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은 엄청난 낭비요 미련한 일입니다.
여러분 본문의 가롯유다처럼 내가 가롯유다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종종 우리가 실수하는 것이 교회를 세상논리대로 경제논리로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많은 경우가 경제논리입니다. 가롯유다의 머리 속에서는 마리아가 부은 향유가 ‘낭비’되었다 ‘허비’되었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팔면 최소한 300데나리온의 돈이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롯유다가 모른 것이 무엇입니까? 그 향유를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에게 영광이 되고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인 안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주님의 일을 할때에 우리가 어느정도 세상경영방식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경제논리로 모든 것을 계산하면서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헌신할 때 가롯유다같이 꼭 비판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헌신할 때 우리의 헌신이 사람들의 눈에 때로는 미친짓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비판과 판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헌신하면 할 수록 긍정적인 판단과 인정을 받기보다는 부정적인 판단과 소리를 들을 수 잇씁니다.

성경의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헌신을 하고 수고를 했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향해서 거짓사도라고 오해하고 그를 배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흔들리지 않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고 판단하고 비판할 때 그것 때문에 헌신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욱 충성하고 더욱 헌신하면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고전4: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더욱 의식한 것은 오직 주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기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판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헌신하는 자기의 일꾼들에게 상을 주시고 면류관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교회에서 헌신하다보면 사람들과 부딪힐 것입니다.
특히 적은 가까운 데 있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를 가장 앞서서 공격한 사람은 외부인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도 헌신을 하다보면 교회를 잘 아는 사람이 오히려 직분자가 공격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왜 비판을 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시기김으로 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보다 더 열심히 하여서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못보아주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비판하고 공격하는 이유는 자기 텃세를 부리는 경우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래도 이런 분들이 별로 없지만 어떤 역사가 있는 교회들은 그래서 새가족들이 헌신하는 것을 못보아 줍니다. 좀 헌신하려고 하면 비판하고 판단하여서 스스로 그만두게 상처를 주곤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정말 소신을 갖고 확신 속에 주도적으로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만약에 사람들의 눈치살피면 결코 주님이 기쁘시게 여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쁘시게 여길까 먼저 주님을 의식하면서 헌신하시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 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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