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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절당한 모세의 소원 (신 3: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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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현지 목회자 320명이 이번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원로 목사님과 함께 기독교의 진리를 철저히 현지 목회자들에게 강의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남미 일대 목회자들의 신학적 지식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열정은 대단합니다. 보통 예배드렸다 하면 3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찬송을 많이 하고 예배가 일찍 끝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한국 목회자들이 웬만하면 체력을 못 견디게 되는데 하루 종일 강의를 해도 계속 하라고 합니다. 낮은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열정 때문에 세계 지도력 개발원에서 주최하는 세미나가 아주 큰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제 세계 지도력 개발원 사역은 현재까지 31회째 실시했습니다. 본래는 세계로 흩어져있는 한국인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알리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이것이 외국 목회자들에게 알려졌고 요청이 많아져서 지금은 우리 한국 목회자들 중심이 아닌, 외국인 현지 목회자들 중심의 지도력 개발원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32회는 다음 달에 목포 지역에서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원로 목사님께서도 오실 것입니다. 제가 갈 때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현지 목회자들을 잘 대접하고 원로 목사님도 아주 잘 대접해드리고 왔습니다. 또한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신명기는 모세 5경 중에서 제일 마지막입니다. 신명기 기록 전체는 모세를 설교자로 세워 하나님이 설교하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이 선포되던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의 고난 역사를 거의 다 끝마치고, 아브라함 조상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 입구에 와 있을 때의 기록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이 빤히 쳐다보이는 지점까지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아주 매우 흥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조상에게 약속받은 축복의 대지가 어디인가? 이제 농사짓고 행복하게 정착 생활해야 되겠다.’ 광야 40년 동안 아주 지긋지긋하게 만나만 먹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눈앞에 자기들의 희망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브라질 농업 이민을 많이들 갔습니다. 배를 타고 두 달씩 걸려서 캘리포니아에 가서 사람들을 태우고, 인도네시아에 가서 또 태우고, 그 후에 브라질로 향해했습니다. 그때 이민 가신 분들을 제가 중남미에 집회 다니면서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두 달 동안 배 안에서 날마다 바다만 바라보고 지나가니까 어쩌다가 섬 하나라도 나타날 때는 사람들이 모두 흥분해서 갑판 위로 올라와서 “어서 우리가 살 땅에 도착했으면 좋겠다!”하면서 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두 달 만에 도착한 목적지에서 사람들이 어찌나 흥분을 하는지 전부 눈을 크게 뜨고 ‘아! 내가 살아야 할 땅이 여기인가?’ 흥분해서는 감격으로,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약간의 불안으로 ‘여기서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달도 그렇게 지루하고 힘이 드는데 40년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출애굽할 당시 한살이었던 아이가 이제 40세가 되었고, 그때 80세이었던 모세는 120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자나 깨나 듣던 약속의 땅이 눈앞에 보이는 흥분 속에 있고, 모세도 비스가산에 올라가 들어갈 땅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향해 오랫동안 고난을 이긴 것은 마지막 열매를 얻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땀 흘리는 농부는 수확의 가을을 가슴에 품고 봄에 파종을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사회생활 합니다. 한 달 동안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 저녁까지 열심히 자기 사명의 온갖 지혜와 에너지를 투자하면서 일을 합니다. 한 달이 지나면 수고한 열매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사람은 약속만 분명하면 어떤 고난도 이겨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그렇게 믿고 있는 성경의 진리와 일반적 진리를 역행하는 이변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40년 전에 모세에게 약속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약속이 얼마나 화려한지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너는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이 있는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땅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줄 것이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고 먹고 배부르게 되는 땅이라. 그리로 가라. 너희들은 거기에 가서 성읍에 가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내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게 얼마나 화려한 약속입니까?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히브리 문학으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가장 화려한 표현으로 온갖 좋은 것을 모두 나열한 것이 바로 이 약속입니다. “세계 만민이 너를 보고 두려워할 것이며 네 창고가 넘치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보장이 주어질 것이니라.” “너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꾸어줄지라도 꾸이지 아니할 것이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모세는 이 약속을 믿고 40년 고난을 이겼습니다. 이제 성취는 눈앞에 손에 잡히는 지점까지 와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민수기 성경에 나타난 역사는 한마디로 줄여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모세의 말 중 성경에 제일 많이 기록된 단어가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여 가로되”라는 말입니다. 40년 동안 온갖 원망을 한 몸에 다 받으면서 모세가 일을 해왔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환경을 만나도 불평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환경이 좋아질수록 불만이 더 커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문명국 사람일수록, 배운 사람일수록 더 이기주의로 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박 4일 또는 일주일 정도의 수양회를 교회에서 여러 번 진행합니다. 일 년에 우리 주일학교에서 20회 이상 늘 다녀옵니다. 요즘 수양관 시설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갈 때도 에어컨 시설이 되어있는 최고로 좋은 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리고 가서도 영양가 높은 식사에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침대에서 잠을 자고 경치 좋은 곳에서 최고의 학문으로 수련된 강사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수양회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항상 불평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오히려 덜 합니다. 어른들 데리고 가면 더 불평이 많습니다. 만약 우리 갈보리교회의 6,000~7,000명이 한꺼번에 여기서 부산까지 한 달만에 간다고 합시다. 못 견딥니다. 불평 때문에 누구도 못 견딥니다. 모세는 불평이 많은 백성들 때문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민수기 11장 15절에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백성들이 고기 달라고 아우성칠 때 모세가 기도한 것입니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죽는 것이 제일 행복해진 모세! 사실 백성들이 봐도 모세가 고기를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니까 죽여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모세는 그의 생에 두 번 행복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애굽의 왕자 책봉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애굽은 세계사에서 그 당시로는 세계 최강국입니다. 세계 3대 문명의 발상지가 나일강 문명이라고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지금도 카이로 박물관에 가보시면 세계 5대 박물관으로서 가장 인류의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볼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나일강에 떠내려가다가 바로의 공주가 건져 궁중에서 성장했습니다. 바로의 뒤를 이어 왕이 되면 평생을 왕궁에서 지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라고 해서 이런 생각을 안했을 리가 없습니다. 모세도 고기를 먹고 싶은 사람입니다. 40년 궁중 음식에 입이 길들여진 사람인데 만나만 먹으면서 지내는게 아마 제일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록 처가살이는 했지만 이드로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장인이 물려주는 축산 농가에서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조용하게 할 수 있는 준비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딸인 십보라와 결혼을 했고, 게르솜이라는 아들이 생겼고, 그대로 살다가 거기서 조용히 죽으면 아마 제일 좋은 생애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주시키는 지도자 역할은 절대로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도 끈질기게 요구하시고 화려한 약속을 주시니까 마지못해 나선 일입니다. 자신은 애굽 혈통이 아니라 학대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사명의 역사를 나서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던 민족 지도자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악조건 속에서 사람들을 가장 훌륭하게 이끈 사람은 모세입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모세 같은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80세의 나이에서 120세까지 4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 노예 신분의 백성을 사막으로 끌고 나가 외적과 싸우면서 기어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했던 세상에 둘도 없던 하나님이 선출하신 위대한 지도자! 그는 이제 자기 사명의 완수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40년 동안 그리던 가나안 땅을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가 모세의 소원입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일의 진행으로 본다면 이러한 기도는 필요 없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마 우리의 문화대로 본다면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서 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셔도 마땅히 그가 왕이 될 사람이요, 넉넉히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의 능력을 평가하면 그보다 인류 역사에 훌륭한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본래 그는 애굽의 왕자 책봉을 받은 사람입니다. 혈통이 다르지만 바로가 자기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사람입니다. 국민들이 투표를 한다 해도 모세를 당할 야당 지도자가 있겠습니까? 90퍼센트 이상의 압도적 승리를 할 수 있는, 당연히 왕이 될 사람입니다. 아마 오히려 그렇게 되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혼란기 역사가 없이 일찌감치 정착할 수 있는 문화가 더 빨리 형성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모세가 마지막 소원으로 기도했던 내용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면 “모세야! 그동안 참 내 일을 위해서 네가 고생 많이 했다. 네가 소원하는 것은 이제 내가 다 들어주겠다. 이제 너는 안식의 시간이다. 그 땅에 들어가서 존경받고 왕이 되고 다스리고 넉넉히 먹고 누리거라!” 이렇게 말씀하셔야 상식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의 소박한 소원에 대해 하나님의 대답은 “안 된다. 그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모세가 지금 설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여러 소리 말라. 너는 안 된다. 건너가지 못한다.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다 들어가지 못해도 모세는 들어가야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공로자입니다. 오늘 말씀 27절에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아니, 기껏 산꼭대기에 올려 보내서 다 보라고 하시고는 “너는 못 들어간다.” 하나님이 모세를 약 올리시는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운명적으로 산에서 시작해서 산에서 끝이 납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서 만났습니다.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계약 백성의 표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비스가산 위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들어가지 못하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느보산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의 종이 간절히 소원하는 그 쉬운 문제를 거절하셨는가? 우리가 이 뜻을 알아야만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을 거절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므리바 반석에서 물 터진 사건에서 모세는 잠시나마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손을 대서 물 터지게 하는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선언한바 있습니다. 그때 물은 터졌으나 하나님은 “너는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정적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리에 오는 것을 금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왜 죄 아래로 떨어져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하와가 “네가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고유의 영역에 파렴치한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했을 때, 이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이 들으시기에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인간이면서 내가 예수라고 말하고 그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나라에만 해도 내가 예수라고 말한 사람이 수십 명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수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온 세계 다녀보면 어느 나라에나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 재산까지 모두 다 바칩니다. 평생을 노동하고 헌신하는 그런 집단들이 지금 한 나라에서 굴지의 기업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만도 예수가 된 자가 수십 명인데 모세는 넉넉히 하나님의 자리에 갈 수 있습니다. “네가 이미 내 자리에 앉았었느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섬기는 야훼 종교가 아닌 모세 종교가 생기게 됩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하나님은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보매 하나님 같더라.” 또, 하나님도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아론을 네 입의 대변자로 삼으라.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하나님도 그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왜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합니까?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얼굴이 광채로 빛이 났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이 아닌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얼마나 인간적 실수가 많은 사람인가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살인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 혈기를 참지 못하고 살인을 해버렸습니다. 자수하지도 아니하고 공소시효가 지날 때까지 도망간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무리 큰 괴로움이 와도 다른 사람이 듣는 공중 기도에서 “하나님이여 즉시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즉시로 나를 죽이시어” 얼마나 혈기가 많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100살이나 된 사람이 첩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에티오피아 구스 여자를 취해서 아론과 미리 암의 원망을 사는 등 실수천지입니다. 이 일로 모세는 고난을 많이 겪었는데 하나님의 용서가 어렵지 않았던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모세의 편에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침해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가혹한 심판을 내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인간의 거룩한 예배의 대상입니다. 실제로 광야 40년의 민족 이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모세는 심부름꾼으로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가나안 입성을 비스가산에서 막으신 것입니다. “너는 안 된다. 네가 내 자리에 올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 다음에 두번째는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많이 했다고 반드시 지상에서의 보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상업주의 문화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심리에서는 누구든지 “투자는 적게 하고 수확은 많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똑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손익을 계산해서 만나고 헤어집니다. 나의 목적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주변에 두려는 작업을 열심히 합니다. 투기사업이라는 문화는 그래서 생긴 말입니다. 적은 투자로 수없이 많은 열매를 수확해야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마저도 현대인들에게는 손익을 따지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무엇을 얼마나 얻으리이까? 보소서. 우리가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런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때 모세가 한층 더 위대한 생각을 했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 거룩한 역사에 쓰임을 받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어찌 나 같은 인간을 선택하셔서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셨나이까? 내 순례의 길에 남긴 자취마다 하나님의 숨결이 있었습니다. 이제 나의 소원은 하나님 곁으로 조용히 가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거두어주소서.” 나중에 모세는 이렇게 깨닫고 가지 않습니까? 그는 가나안을 바라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우성치는 군중들의 행복한 앞날을 마음의 청사진으로 새기면서 조용히 돌아서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영혼의 부름을 받기 위해 120세의 지친 노구를 이끌고 느보산을 오르는 사명의 완수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가 얻은 것은 지상의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영적 가나안 땅, 하늘나라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타산적 계산속에 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 많은 보상을 바라기도 하고, 그렇게 많이 받은 영적 은혜는 다 무시하고 지상주의적 공상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더 나를 쓰시옵소서. 만약 내가 순교의 자리에 나가야 될 그러한 사명이 있다면 나를 그곳에 보내소서. 내게 주어진 것이 필요하시다면 주께 드리겠나이다. 내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쓰임 받는 이 하나로 내 영혼은 만족하나이다. 저 건너편 열매 맺는 저 아름다운 땅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옵소서.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나이다.” 이 진솔한 고백 기도가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모세같이 훌륭하게 일을 끝낸 자도 지상의 보상은 없었습니다. 다만 평생을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은 그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을 저희가 기억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지상에서 그렇게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내게 하나도 오지 아니해도 쓰임 받는 자체 하나로서 하나님 앞에 만족하고 진솔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능력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 필 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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