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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관심 (요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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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관심은 바로 그 사람이 무엇에 끌리고 무엇을 사랑하느냐고 하는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육체적 본능에만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는 동물적 수준의 사람이라고 말들 합니다. 반면에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 앞서고, 그리고 그 생각에 따라 자기의 모든 것을 복종시켜가며 사는 사람이라면 바르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먹고 입고 사는  이러한 육신적인 생활이란 어떤 사람이든 너나 할 것 없이 별로 큰 차이가 없는 거기가 거깁니다. 특별히 유별날 것이 따로 없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요, 그 생각과 관심일 것입니다. 즉, 생각의 바탕, 생각의 고향 즉, 그 사람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인간됨의 가치기준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성장에 관하여 매슬로우(Maslow)라는 발달 심리학자가 발표한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육체적인 욕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이 문제가 되고, 아울러 생리적인 욕구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동물적인 것입니다. 이 동물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그 다음으로는 안전의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고통과 공포와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며, 되도록이면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이러한 욕구 다음에 오는 것이 바로 소속의 욕구입니다. 친구가 있어야 하고 친구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는 바램을 갖게 됩니다. 모임에 끼어들기를 바라고 거기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인정받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낍니다. 이런 소속의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자기 존중의 욕구 즉, 자기실현의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이렇게 자기의 욕구가 채워지는 데에서 확인이 됩니다. 육체적, 생리적 욕구가 채워짐으로 행복해 하던 사람도 어느 정도 성장하고 성숙해지게 된다면,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를 채우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이 채워져야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 중에 가장 깊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자기 존재를 확인함으로 행복함을 갖게 되는 자기실현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성숙해짐에 따라 관심도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행동여하, 추구하는 삶의 농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10월 9일은 우리 한국에서는 한글날로 지키는 날입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날을 기념하여 제정한 날입니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우리 민족은 우리만의 고유한 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장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왜 다른 할 일도 많이 있었을 텐데, 굳이 한글을 만드실 생각을 하셨을까요?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것처럼,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만드신 이유를 훈민정음(한글의 옛말) 서문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우리는 여기서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신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를 원문대로 읽으면 “내가 이를 어엿비 여겨”라는 말인데, 이 “어엿비”란 말은 “불쌍히 여겨” 즉, “사랑하는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이유는 바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서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종대왕의 관심은 백성들에게 있었고, 그것도 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한글창제라는 귀한 일을 해 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관심이 사랑과 연결되게 된다면, 여기에는 그 사랑이 역사하는 놀라운 일이 만들어지는 귀한 모습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 관심이 다를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은 생명의 문제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이러한 돈의 가치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가 전제되어 있을 때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돈은 아무 쓸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은 바로 생명의 문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건강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우리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사인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우리 인간 자신보다 인간의 생명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가인(Cain), 그가 자기 동생 아벨(Abel)을 죽이고 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동생을 죽인 가인이었지만 자기 자신은 살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은 살고 싶어 했다는 염치없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염치없는 가인을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을 죽이고도 자신은 살고 싶어 하는 가인을 하나님은 살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생명을 죽음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는 살인하지 못하도록 율법을 제정하심으로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인간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공통적 관심사인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그 생명을 대하는 내용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심은 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한다든지, 병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받지 않도록 건강하게 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현실적 관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심은 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The Eternal Life)” 곧 “영생”이 되도록 하는데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영생”이라는 말은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는 씌어지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하거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할 만큼 우리 인간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현실적 가치와 영원한 가치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양옆에 있는 십자가에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편의상 이들을 두 강도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십자가라는 참혹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한 마디의 말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어려운 고통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이들이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강도는 이렇게 말하는 동료를 꾸짖으면서, “네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받는 것이라 당연하지만, 이 사람은 그러하지 않아. 이 사람은 잘못 행한 것이 없어”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 하였습니다. 이 두 강도의 모습에서 생명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관점을 봅니다. 한 강도는 생명을 현세적 가치로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영원한 가치로 보았습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현실적 가치로 본 사람은 생명을 당대의 것으로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가치로 본 사람은 생명을 당대로만 국한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아도 좋겠습니다만, 예수님은 누구에게 응답하셨는가를 보십시다. 그것은 생명을 영원한 가치로 본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진실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오늘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세요. 우리의 생명이 당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말은, 우리는 죽음 후의 모습에만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그런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나의 생명을 영원한 가치로 대할 수 있는 변화된 사고와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젖줄과 연결함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기술 과학 문명이 가장 발달된 세상, Post Modernism의 세상 등등. 그런데 종교적으로 현대를 표현하기를 “성숙한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신학자요 목사인 디이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사람이 사용한 단어입니다. 본회퍼는 “장차 올 세상은 성숙한 세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본회퍼가 언급하는 이러한 성숙한 세상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역할이 점점 줄어지고 인간의 역할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이란 뜻입니다. 즉, 교회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이 세상의 역할이 점점 커진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몸이 아프면 교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병원을 찾습니다. 옛날에는 동네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마을 주민들이 교회에 모여 목사를 중심으로 의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변호사를 찾아갑니다. 옛날에는 비가 많이 오거나, 아주 안 오면 교회에 나아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늘날에 만일 이런 식으로 처신하면 오히려 미신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영역에서 세속의 영역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는 더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생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의 부분들을 만들어, 못쓰게 된 부분은 바꿀 수도 있는 세상이 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를 조작하여 인간의 생명까지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생명을 아주 오래오래 연장시키는 날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고 오래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점점 더 많이 닮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신앙심 깊은 사람의 유전자를 이식한다한들 그 사람이 예수님의 형상대로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지만, 이 인간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데에까지 그 관심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성숙한 세상에서도 고유하게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부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이 영생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지니고 있는 가운데에서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관심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일을 스스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바로 우리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차원으로까지 끌어 올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한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의 생명에 관심을 가지심으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요 3:16은 우리 자신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요 3:17은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이 나타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구원을 받는 그 일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부르심에 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나의 관심으로 여기는 모습으로 우리의 주변의 삶에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노 강 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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