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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척량줄을 잡은 사람 (슥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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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스가랴서를 '예언서들의 진수'라고 예찬한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가랴의 예언 속에는 다른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들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의 격동기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이나 포로 생활을 하던 민족 수난의 현장에서 태어난 포로 1세 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혈관에는 선민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인 할아버지 잇도와 또 아버지 베레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일찍 죽임을 당한 일로 인하여 할아버지의 제사장직을 일찌기 승계하였습니다(슥 1:7).
  그러므로 스가랴는 제사장인 동시에 선지자로서 일인이역(一人二役)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해방령을 받아 처음으로 돌아오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그룹에 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민족사적 거사에 참예할 수 있었던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여덟가지 환상을 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홍마를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있는 자의 환상이었습니다. 선민 중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전 재건의 메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네 뿔과 네 공장(工匠)들의 환상이었습니다. 선민을 들어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원수들을 물리치는 환상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의 환상입니다. 그 환상 계시는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척량하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1.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2장 1절로 2절에 [내가 또 눈을 들어 본 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 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長廣)을 보고자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본문을 다시 표현하면, [보라 한 사람을!] (and vehold, a man!) 하는 뜻입니다. 여기 나타난 '한 사람'이 누구인가?
  1장 8절에 [홍마를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선] 그 사람입니다. 바로 사사기 중에 저 소라땅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난 기묘자를 가리킵니다(삿 13:18).
  겔 40:2-3에도 에스겔 선지자는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잡은 한 사람의 이상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한 사람(힌네 이쉬 =      )은 황폐되어 버린 예루살렘을 재건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가 천사의 모습이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남은 하나의 영체인데,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 전달의 한 양태입니다. 실제로 그 분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사람으로 도성인신하여 33년을 지구에 사셨습니다.
  그가 '한 사람'으로 나타남은 강하고 능력 있는 유일의 존재자임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2.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2장 1절에 [내가 또 눈을 들어 본 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라고 하였습니다.
  '척량줄'(line of measurement)은 물건이나, 공간을 자로 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척량줄을 손에 잡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의 주권적 관할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는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동

시에 그 모든 것을 통치하고 관장할 수 있는 주인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척량줄을 가지고 동과 서를 나누고 남과 북을 구별시키는 자입니다. 그는 그 척량줄을 가지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시키는 자입니다. 그는 그의 손에 있는 척량줄을 가지고 양과 염소를 나누고 있는 자입니다. 그는 그 척량줄을 가지고 성전 안에 있는 자와 성전 밖에 있는 자를 구별시키는 자입니다. 바로 그의 손에 있는 그 척량줄은 죄인들의 영혼을 통치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이요, 신구약 66권 성경인 것입니다.

  3. 예루살렘의 장광(면적)을 척량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2장 2절에 선지자는 그의 손에 척량줄을 잡은 사람에게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때 그분이 답하기를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뜻일까?
  ①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재건을 알려 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위로요, 소망입니다.
  ② 구별시키는 경계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구별시키는 경계의 표식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갈라놓고 구별시키는 생명의 척량줄이 됩니다(고전 1:18).
  ③ 예언적 의미로 주님의 교회 관할을 나타내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께로부터 받은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아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하는 메세지를 받은 바 있습니다(계 11:1-2).
  ④ 영원한 새 예루살렘 곧 천국 통치의 내용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계 21:15-17에는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을 척량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중대한 내용은 그 한 사람! 손에 척량줄을 잡은 그 한 사람이, 예루살렘의 면적을 재 보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루살렘의 재건과 복구를 알려 주는 소망의 환상 계시임을 알려 줍니다.

  둘째. 예루살렘의 번영을 약속하신 한 사람이었습니다(2:3-5).

  스가랴 선지자는 손에 척량줄을 잡은 그 한 사람이 또 다른 천사를 시켜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예루살렘의 번영을 알려 주라고 하는 사실을 보고 듣게 되었습니다.
  2장 4절에 나오는 [그 소년]은 바로 스가랴 자신을 가리킵니다.
  척량줄을 잡은 그 사람은 천사를 재촉하였습니다. 달려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에게 예루살렘의 번영을 속히 알려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영계는 살아 움직이고, 질서정연하고, 또 신속하고, 확실합니다.
  스가랴는 자기에게 말하여 주는 천사도 보았고, 그 천사를 영접하는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스가랴 선지자를 [그 소년]이라고 지목하고, 그 소년에게 빨리 달려오는 천사들의 기민한 동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갖고 온 메세지의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장래 예루살렘의 번영입니다.
  천사가 그 소년(선지자 스가랴)에게 갖고 온 예루살렘 번영의 메세지와 내용이 무엇인가?
 
1. 예루살렘은 성곽 없는 촌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2장 4절에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곽 없는 촌락'이란 '탁 트인 땅'을 뜻합니다. '평원의 부락' 혹은 '넓은 마을'을 의미합니다.
  성벽이나, 문도 없고 벽도 없는 완전 개방의 마을을 의미합니다. 곧 완전 평화의 마을, 완전한 안전의 마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대적의 침략을 상상할 수 없는 곳입니다.
  도대체 과연 이런 이상향의 마을이 지구촌에 존재할 수 있을까? 역사상에 존재할 지구촌의 예루살렘이 이런 이상향의 마을을 가져 볼 때가 언제 있었던가?

  성경의 이러한 영감의 표현은 철두철미하게 영적이고, 메시야적 미래 왕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벨론의 압제 아래서 예루살렘 해방을 받은 영적 자유를 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들이 인종의 차별이나, 국경의 차별이 없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릴 신약교회 운동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영원한 새하늘, 새땅의 메시야 왕국을 알려 주는 웅변적 예언입니다.

2.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거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4).

  이는 예루살렘의 인구 증가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재건 이후에 누릴 번영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신령한 메시야 왕국의 자손들의 번영, 곧 신약교회 시대의 왕성을 알려주는 예언입니다. 별 같이 빛나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번영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예루살렘 곧 교회의 풍요와 번영과 축복을 알려 주는 소망의 메세지입니다.

3. 하나님 자신이 불성곽이 되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2장 5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 불 성곽이 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불성곽'이란 불의 보호나 파수를 뜻함인데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역사를 뜻합니다.
  예컨대 출애굽하여 가나안 행군을 계속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 왕 바로가 변심하여 추격하여 온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기둥이 나타나고 불기둥이 나타나서 저들의 행진을 인도하여 추격하던 애굽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갈라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라놓았습니다(출 13:21, 14:20).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엘리사가 거하던 도단성을 아람의 군대가 포위했을 때 하나님께서 불 말과 불병거로 엘리사를 둘러 진치고 보호한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6:17). 이런 일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 선민을 위기에서 구원하고 보호해 주는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슥 9:8에는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 눈으로 친히 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불성곽은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의 보호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일종의 불이요, 불성곽입니다.
  사 26:1에 [그 날에 유다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극적인 전능의 구원이 바로 불성곽이 되는 것입니다.

4. 그 가운데 영광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2장 5절이 다시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 불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불성곽이 되신다 함은 외부의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영광'이 되신다 함은 그 예루살렘에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히 육적으로 임마누엘이 되어 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축복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약적 의미로 예언성을 띠고 움직일 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화육강세하시므로 생명의 불성곽이되시고, 세상에 빛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요 1:1-4).
  바로 임마누엘의 영광입니다(마 1:21).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를 정복하러 적국을 통과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던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과부는 나폴레옹 군대의 횡포를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 집 주위에 성벽을 쌓으셔서 우리들을 지켜 주옵소서. 아무도 우리 모자를 해치지 못하게 지켜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아이들 중 막내가 형에게 물었습니다.
  "형 아까 엄마가 가정예배 때 우리 주위에 성벽을 쌓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성벽이 뭐야?" 그 형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날밤 그 과부 성도의 아이들은 어머니가 기도 드린 성벽에 대해서 궁금해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제일 어린 막내가, "형! 저기 좀 봐! 하나님이 성벽을 쌓아 놓으셨어!"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온 가족이 놀라서 창 밖을 내다보니, 밤새도록 눈보라가 쳐서 집 주위를 온통 눈으로 덮었습니다. 집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은 온 마을을 눈 성벽으로 쌓아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군대들의 횡포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성곽도 있고, 눈의 성곽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시간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척량줄 안에 들어 있는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척량줄 안에 있는 예루살렘은 번영의 축복이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스가랴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바로 오늘에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스러운 교회운동의 승리를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높이를 척량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넓이를 척량하십니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인데 사랑입니다. 그것이 세계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깊이를 척량하십니다. 그 깊이란 교회를 향한 충성과 봉사, 헌신의 농도를 가리킵니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을 달고 계시는 저울도 되십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척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척량 안에 들어 있는 개인, 가정, 교회 나라는 반드시 번영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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