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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자랑하라 (갈 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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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본능이 있습니다.
흔히 식욕과 성욕과 명예욕을 사람의 삼대 본능이라고 합니다.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부인이 큼직한 다이아 반지를 하나 마련했습니다. 반찬가게에 가서 반찬을 사는데 다이아 반지를 자랑하고 싶어서 다이어 반지 낀 손을 이 반찬, 저 반찬 위에 올려놓으면서  ‘이것은 얼마고 저것은 얼마예요?’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다이아 반지를 가리키면서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반찬가게 주인은 마침 금니를 여러 개 새로 했습니다.
금니를 자랑하고 싶어서 못 견딜 지경인데 마침 손님이 와서 그렇게 하고 있거든요.
‘네, 그것은 얼마이고, 그것은 얼마입니다.’ 하는데 자기의 금니들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난 월요일에 여선교회 경기연회연합회 선교대회가 저희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목양교회 44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연회 행사가 교회에서 열린 것입니다.
그 날 1,200명의 손님에게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여선교회 회원들, 정말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또 남선교회 회원들, 주차안내 하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수고를 하시면서도, 오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교회당을 보면서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것을 보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은 저도 그랬습니다.

여러분, 자랑하세요. 자랑하는데, 십자가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실컷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자랑은 많이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데 본받아야 할 인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도를 받아야 할 인물, 이런 사람들을 ‘멘토’라고 부릅니다. 알기 쉽게 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들이 제일 중요한 모델로 삼아야 할 인물은, 제일 모델은 참 사람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에 ‘참 신’이 더 붙어서 ‘참 사람이요 동시에 참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셨습니다.
성도들은 화가가 되어 자신의 삶을 그려나가야 하는데 우리의 삶이 참 사람인 예수님과 닮도록 그려야 합니다.
기도, 성경읽기, 교회출석, 봉사, 그리고 전도, 이런 것들이 붓이고 물감입니다.

그 다음에 성도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따르려고 해야 하는 분, 제2 모델은 바울입니다.
바울에게는 신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가깝게 여겨지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 바울이 오늘 본문 14절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합니다.
‘나는 십자가만 자랑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힘써야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정하는데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원칙대로 한다면, 바울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린다면 ‘십자가만 자랑하라’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하여 아직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것들, 세상의 것들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도 자랑하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것들을 실컷 자랑하고 거기에 십자가도 하나 끼어서 자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것들보다 십자가를 많이 자랑하고, 다른 것들보다 십자가를 먼저 자랑하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다른 것들 자랑은 점점 적어지고, 십자가 자랑이 점점 많아져서 나중에는 십자가만 자랑하는데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십자가를 신앙체험, 신앙생활의 핵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바울은 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을까요?
자랑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학벌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출생지를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경력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보다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이 제일 중요한 줄 알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면 구원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율법을 강조할 때도 저 깊은 곳에는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중요합니다.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고 외칠 때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습니다. 한구석이 빈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아, 이것은 저 사람이 자신감을 가지고, 신념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저 사람이 자기도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면서 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저 사람이 마지못해 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가 확신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는  작게 말해도 크게 들립니다.
그가 마지못해서 하는 이야기는  크게 말해도 작게 들립니다.

설교자들이 제일 고민하는 것이 ‘이것이 내가 마지못해 하는 설교,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라고 하는 설교, 꾸민 설교가 아니게 하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속회 인도자들도 설교자들입니다. 속회 지도자 교육을 할 때 제일 강조하는 것이 속장님들과 인도자들이 속회 공과 내용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를 많이 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제 그것을 열심히 말하는데 그것을 말할 때 바울은 신이 났을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 후반부에서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이어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이루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을 할 때 바울의 눈에는 빛이 났을 것입니다.

김인서(金麟瑞: 1894~1964)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41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한국교회의 역사에 굵직하고 독특한 자취를 남긴 분입니다. 
지금 연세대학교에서 매년 이 분을 기념하는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이 분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교편생활을 했는데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하게 연락을 하며 독립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이것이 발각되어 체포되어 4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이 분은 감옥에서 깊은 신앙체험을 합니다.
그 체험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쓴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나는 예수교에 입교한 지 십 년이 지나도록 내게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난생 처음 감옥에 들어갔을 때 나 자신을 애국 청년, 독립운동가, 의인열사로 자처하여 이미 옥중에 있는 죄수들이야말로 죄인들이라고 멸시하였다. 나는 옥중에 들어가 조용히 눈을 감고 정좌묵상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었다. 그러한 지 여러 달  만에 내 양심에 ‘너도 죄인이다’ 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 나도 모르게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옥중 죄인들은 세상 재판장들에게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죄인이다’ 하는 심판을 받았으니 나는 다른 죄수들 보다 더 큰 죄인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매일 감옥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홀연히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영음을 듣고 내 앞에 나타난 불꽃같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때부터 예수는 내 예수, 십자가는 내 십자가, 성경은 내 성경, 천당은 내 천당이라는 것이 의심 없이 믿어졌다. 나는 이처럼 예수의 사랑에 삼키워져  그 감옥에서 사는 날까지 예수 십자가의 구원을 증거하기로 결심하고 오늘까지 이 몸 바쳐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 분은 이와 같은 체험을 하고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장로교신학교는 평양에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문서선교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앞장서서 반대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보라’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체험 한 가운데는 십자가가 있어야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앙체험, 십자가가 저 한 구석에 희미하게 있는 신앙체험은 참된 신앙체험이 아닙니다.

자전거 바퀴를 보면 바퀴의 살들이 한 가운데 있는 부품을 중심으로 퍼져 있으면서 바퀴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 신앙에서 그것, 그 중심에 있는 부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다른 모든 것들이 퍼져 나가야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와 같이 한 가운데에 십자가를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아까 다이아 반지 낀 부인이 다이아를 자랑하고 싶어 하듯, 반찬가게 주인이 금니 자랑하고 싶어 하듯,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십자가를 신앙체험,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어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세상의 것들에 대한 자랑을 버려야합니다.

찬송가 102장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송가 가사의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여러분, 진정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서 9장 23절과 24절에서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성경 나오는 ‘안다’는 말은 대강 안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자세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구석구석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게 되면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저 십자가에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다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야고보 사도는 세상의 자랑은 다 허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세상의 것들을 가장 많이 자랑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마도 솔로몬일 것입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졌습니다. 그는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마음 먹은 것은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그는 많은 저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다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 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라고 했습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잠27: 1)
그래서 우리는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기록한 잠언서와 전도서를 지혜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지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과 2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바울은 29절에서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적인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금하십니다.
바울은 이어서 아까 말씀드린 예레미야서 9장 23절 이하의 말씀을 요약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1절의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을 자기 자신의 전도생활에 어떻게 적용했는지 말합니다.
나는 고린도에 들어가서 전도할 때 말,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전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다음 주일이 전 교인 전도의 날인데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의지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아덴, 오늘날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 잠시 전도하고 고린도에 왔습니다.
아덴에서 다소 현학적(衒學的)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현학적이라고 할 때 ‘현’자는 ‘자랑할 현’입니다.
자기의 학문이나 재능을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바울의 아덴 설교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그 설교를 했는데 아레오바고 주변에는 웅장한 신전들이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그 신전들을 가리키며 “우주와 그 만물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행17: 24) 할 수 있었던 것,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에는 십자가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정하신 사람” 이렇게 간접적인 표현을 한 번 했을 뿐입니다.
아덴이 철학의 도시이고, 지금 자기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에피쿠로스 철학자들, 스토아 철학자들이기 때문에 ‘나도 철학도 공부한 사람이다.’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것은 이 일에 대한 후회에서 온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바울은 십자가 외의 것을 자랑하지 않기 위해서 무척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천국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가 천국에 다녀왔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는데 그가 천국에 다녀왔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일을 될 수 있는 대로 삼가세요.
찬송가 305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를 작사한 전영택(田榮澤) 목사님은 ‘자랑은 믿음을 썩게 하는 원수이다.’라는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40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이 분은 그것을 열심히 자랑했습니다.
거기에서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부작용이 점점 커졌습니다.
교인들은 ‘저 분은 차라리 40일 금식기도 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 뻔 했는데…’ 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자랑은 상대적인 자랑입니다.
지난 주간에 서점에 갔더니 좋은 성서주석이 있었습니다. 서른 권이 한 질로 된 것인데 정가 60만 원짜리를 반값인 30만 원에 주겠다고 합니다. 얼른 샀습니다.
나온 지 좀 시간이 흘렀고 제가 그 서점 VIP  회원권을 가지고 있어서 특혜를 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 다음날 사무실에서 점심 먹으면서 자랑했지요. 그랬더니 이진우 전도사님이 하는 말이
‘어, 나는 그 주석 25만 원에 샀는데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웃었습니다. 자랑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세상 자랑에는 비린내가 납니다.
십자가 자랑에는 향내가 납니다.
십자가보다 다른 것을 더 자랑한다면 참된 성도가 아닙니다.

세상 자랑을 점점 줄이고 십자가 자랑을 많이 하고, 나중에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데까지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가치관이 바뀌어야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달아서 죽이는 사형도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실패요, 수치입니다.
누가 거기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수치 가운데 수치였습니다. 
그런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여기려면 가치관이 바뀌어야합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가장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어떻게 메시아라고 하는 거냐!’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이제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변하면 자랑의 소재도 변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나는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치의 질병 이야기를 합니다.
병 이야기는 될 수 있는 대로 숨기려고 하는 것인 사람의 습성인데 바울은 ‘나에게는 불치의 질병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 번 기도해도 이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기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이 사도라면서 기도 응답도 받지 못하는 엉터리이네!’ 이런 비난 받기 쉬운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 병은 내가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시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나를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이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라고 말합니다.
가치관이 바뀌면 세상의 약한 것이 강한 것이 되고, 세상에서 받는 능욕과 궁핍과 곤고가 기쁜 것들이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라고 말합니다.
가치관이 바뀔 때 우리도 십자가를 참을 수 있게 되고 부끄러움을 마음에 담지 않게 됩니다.

해외여행을 할 때 시간을 가리키는 장치가 둘 있는 시계를 차고 나갑니다.
하나에는 'HOME TIME'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국 시간입니다.
하나에는  'LOCAL TIME'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행하고 있는 곳의 시간입니다.
'HOME TIME'이라고 되어 있는 시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LOCAL TIME'이라고 되어 있는 시간은 가는 곳에 따라서 자꾸 바꿔주어야 합니다.
이 시계가 참 편리합니다. 'HOME TIME'이라고 되어 있는 시간을 보면서 ‘아, 여기는 지금 몇 시이지만 한국은 지금이 몇 시로구나! 지금 예배드리는 시간이로구나!’ 하면서 함께 예배드리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아, 지금 국제전화하면 되겠구나!’하게 됩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얼마동안은 시차 적응 문제로 고생하는데 이렇게 ‘한국은 지금 몇 시’ 이것을 인식하다 한국으로 돌아오면 시차로 인한 어려움이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면 여러분, 천국에 가서 누고보다 빨리 잘 적응하게 됩니다.
성도의 가치관은 이 'HOME TIME'이라고 되어 있는 시간과 같습니다.
변하지 않는 가치관입니다.
'LOCAL TIME'의 가치관으로 보면 십자가는 수치입니다.
'HOME TIME'의 가치관으로 보면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변하지 않는 가치관을 갖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대개 다른 사람이 받아썼습니다. 
로마서는 더디오라는 사람이 썼다고 로마서 16장 22절에 기록되어 있지요.
갈라디아서도 1장 1절에서 6장 10절까지는 다른 사람이 썼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친히 섰습니다. 큰 글자로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성도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쓴”(에그랍사)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 시제를 보면  ‘지금 쓰고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보라” 강한 명령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너희도 그렇게 해라!’ 지금 강하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갈라디아 교회가 있었던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터키의 중부 내륙지방,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 일대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요즘 터키 성지 순례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 지역에 가서는 바울 사도의 이런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십자가를 신앙체험, 신앙생활의 핵심에 놓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자랑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바른 가치관을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이 하여 십자가만 자랑할 수 있는데에 이르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 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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