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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 기쁨 되기 원하네 (고후 5:9, 엡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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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쁨은 인생의 행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돈 보다도 건강보다도 명예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입니다. 기쁨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기쁨의 종교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쁨이라는 말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임이니라”(사62:4).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

  오늘 아침 “나 기쁨 되기 원하네”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기쁨이 되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고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되고 내가 주님의 종들의 기쁨이 되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복음 찬송가 중에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저는 2절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만들어서 부르기를 원합니다. “나 사람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사람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사람의 기쁨이 되는 것.” 저는 또한 3절을 다음과 같이 만들어 부르기를 원합니다. “나 종들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종들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종들의 기쁨이 되는 것.”

  그것이 사도 바울의 삶의 목적이고 자세이고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의 목적이고 자세이고 소원이기도 합니다. 저는 매일 새벽 이승일 김혜원 동혁이 수혁이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은 저들이 모두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들이 세 가지 종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의 기쁨이 되고 종들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기뻐야 합니다. 내가 기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제 아침 정토회에서 일하는 정안숙씨와 카메라맨 한 사람이 와서 저의 축하의 메시지를 녹화한 후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갔습니다. 그런데 정안숙씨가 계속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참으로 기쁘게 사시네요. 여기 오면 마음이 푸근하고 기뻐요. 참 좋아요” 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대로 주님 안에 있으면 기쁩니다. 다윗이 고백한대로 주님 앞에 있으면 기쁩니다. 십자가 앞에 있으면 기쁘고, 회개의 기도 앞에 있으면 기쁘고, 봉사와 전도의 사역 앞에 있으면 기쁩니다. 우리는 바자회를 하면서 모두 기뻐했습니다. 어제 오후에는 박정희 집사님, 김은희 집사님, 김영경 집사님, 김성수씨가 커피와 과자 등을 들고서 양재천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모두 얼굴과 마음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양재천으로 가기 전에 제가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기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기쁘고 주님 섬김 안에 있으면 기쁩니다. 우리 철원이는 아픔과 고통 중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주고 받곤 했습니다. “철원아 네 마음이 슬프나 기쁘나?” “기뻐.” “왜 기쁜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니까 기쁘지!”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기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기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를 보시고 헵시바와 쁄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세 가지 종류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첫째,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고 자세이고 소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저 소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런 삶을 살기를 애쓰고 힘쓴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보라”(엡5:9). 그저 소원하고 힘쓰는데 그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고 심혈을 기울이며 시험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해서 죄송합니다. 암만해도 저는 왕자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사실 사도 요한도 왕자 병에 걸렸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한평생의 삶에 부족하고 부끄럽고 죄 되고 허물 된 일이 너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도 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가지를 간단간단히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제가 열한 살 때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하는 단 한 가지 소원을 가지고 집과 고향을 떠나 38선을 혼자 뛰어 넘었을 때 아마 하나님께서 저를 보시고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제가 6.25 전쟁 중 중학생 때 대구에 가서 3년 동안 살았는데, 그때 조그만 한 칸 방에서 7명이 함께 살았는데, 새벽마다 몰래 방에서 나와서 대문을 조용히 열고 대구 제일교회를 향해 기도하러 달려 가는 저를 바라보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저는 한 평생 죄를 많이 지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때마다 회개의 기도를 하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삼각산에 가서 관악산에 가서 주암산에 가서 회개의 기도를 하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귀국 후에는 철원이 때문에도 삼각산에 가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느라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저의 회개의 기도가 너무 부족했지만 아마 하나님께서 저를 보시고 기뻐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제사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북한과 중국과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의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조그만 사랑의 손길을 펴느라고 여러분들의 사랑의 헌금을 가지고 이곳 저곳으로 왔다 갔다 하는데 아마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는 저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저는 저의 남은 삶과 저의 몸과 저의 생명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실지 모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고 하나님께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들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과 사람들의 기쁨이 되는 것이 별개의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기쁘게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순서는 있습니다. 먼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15:1,2). 사도 바울은 또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자기의 삶의 목적이고 소원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도 자기처럼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삶의 목적과 소원으로 삼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우리가 이웃에게 관심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 이웃을 기쁘게 하는 길입니다. 중국 고아 학생들을 돕고 있는 이영숙 회장이 최근에 저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빛으로 밝혀 주시고 모든 눈물과 상처를 씻어 주시는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탕자처럼 방황하던 우리들에게 거룩한 목사님의 영원한 사랑을 주었구요! 외롭고 쓸쓸한 우리들이 목사님을 의지한 그날, 그 시각부터 쓰리고 이 아픈 상처를 치료하여 주셨고 고통과 서러움을 당한 우리들을 위로하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민족의 훌륭한 인재로 배양될 어린 고아들은 어버이 목사님께 의지하고 기대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버이 사랑의 손길을 손꼽아 기다리던 80여명 애들은 사랑의 후원금을 받아 쥐고 감사의 기쁨과 행복의 눈물을 진정 삼켰습니다. 동아려 학생은 학교중단 위기에 처해 있다가 어버이가 보낸 6천원의 학비를 받아 쥐고 안도의 숨을 내 쉬고 목사님! 아버님! 감사 드린다고 몇번이구 웨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님이 아니면 그 고아 애들이 어찌 학교 문전에 다 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목사님의 따뜻한 사랑은 그들이 활기를 띄고 무럭무럭 성장하게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들의 심부름을 했을 뿐이고 사랑의 손길을 편 것은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관심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의 손길을 폈을 때 여러분들은 수 많은 고아 학생들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상당수의 학생들은 교회에 나가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저는 선교지를 여행하면서 그곳 현지인들과 그리고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과 저들의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기쁨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10여년 동안에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설교나 강의나 훈계가 반드시 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도움과 힘과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그저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때로는 함께 놀아주는 것이 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도움과 힘과 기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2년 전 브라질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성철 선교사와 몇몇 제자들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그때 최광혁군도 반갑게 만났습니다. 이틀 동안 밤마다 강성철 선교사와 총신 제자 한 사람과 젊은 선교사 한 사람과 함께 볼링을 친 일이 있습니다. 아주 재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모두 이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지도 못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강성철 선교사를 통해서 며칠 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젊은 선교사가 많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저하고 이틀 동안 볼링을 치고 나서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이 자기와 열심히 놀아준 것이 그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와 힘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선교에 임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5년 전에 불라디보스톡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거기 모인 20여명 선교사 자녀들과 서너 시간동안 열심히 논 일이 있었습니다. 게임도 하고 제가 시장에 가서 사온 선물도 나누어주고 농구도 같이 하고 그네도 같이 타고 씨이소도 같이 타며 신나게 놀았습니다. 제가 어린이들과 몇 시간 동안 신나게 노는 것을 보고 선교사들이 모두들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저를 너무 좋아했고 모두 너무 기뻐했습니다. 유치부 나이 정도의 어린 아이 하나는 제가 떠날 때 공항에서 예쁜 상자 선물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네를 함께 탄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 상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정예찬 2000.6.10” 내일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데 예찬이와 다른 어린이들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래서 스티커를 20개 가지고 갑니다. 하루 오후에는 선교사 사모들 대 여섯 명을 데리고 바다 가에 가서 놀다가 왔습니다. 맛있는 바다 가제도 사 주었습니다.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스승이 되는 제가 그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함께 놀아준 것이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과 마음만 있으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고아 학생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구룡 마을 이웃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노숙자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구역 식구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새 신자들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사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삶의 자세와 목적과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보고 자기처럼 그렇게 살라고 분부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셋째, 주님의 종들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직설적으로 자기를 기쁘게 하라고 분부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는 그렇게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4).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라”(빌4:10). 그래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요 사랑” 이라고 불렀습니다. 루디아가 사도 바울에게 기쁨이었고 에바브로디도가 사도 바울에게 기쁨이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한 오네시보로를 위해서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오네시보로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딤후1:16). 여기 유쾌케 했다는 말은 기분 좋게 했고 기쁘게 했다는 말입니다. 알렉산더는 자기에게 해를 많이 끼쳤지만 오네시보로는 자기를 유쾌하게 하고 기쁘게 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의 종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제가 한경직 목사님을 이따금씩 찾아 뵙곤 했습니다. 97세 생신 날에 한 목사님을 찾아 뵈온 일이 있었습니다. 저를 보시고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을 항상 곁에서 돌보시고 계시던 백운경 장로님이 저를 보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김 목사님 오시면 제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한 목사님의 기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남한 산성을 떠난 우리는 박종렬 목사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박 목사님도 저를 보고 너무 좋아하시면서 몸이 불편하셨지만 말씀을 하시고 또 하시고 또 하셨습니다. 옆에 계시던 사모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목사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아무 말씀도 못하셨는데 김 목사님이 오시니까 이렇게 말씀을 잘 하시네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의 종들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고 축복입니다. 그 길로 정진경 목사님을 찾아 뵈었는데 정 목사님도 마찬가지로 너무 좋아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에게도 교수님들 중에서 아마 제가 제일 큰 기쁨이 되었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황송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에게도 제가 기쁨이 되었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전화를 걸면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어떤 때는 토요일에 전화를 걸고 설교 준비하는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아니라고 말하면서 제가 전화를 했기 때문에 설교준비가 더 잘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성탄절에 저에게 이런 글을 써서 보낸 일도 있습니다. “성탄절이 오면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나는 성탄절이 오기 전 머리 속에는 김명혁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김 목사님을 좋아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입니다. 오늘도 하늘 아래 가까운 곳에 김 목사님이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가 잘도 지나갑니다. 지난 해와 같이 서로 기뻐하면서 또 새해를 살아갑시다.” 서로 기뻐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서로에게 기쁨이 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특별히 주님의 종들에게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새벽을 깨우는 새벽 성도들은 모두 저의 기쁨입니다. 신앙이 자라고 삶이 변화되는 새 신자들은 모두 저의 기쁨입니다. 전도와 봉사에 힘을 쓰는 성도들은 모두 저의 기쁨입니다. 말없이 조용히 선교에 힘껏 참여하고 있는 성도들은 모두 저의 기쁨입니다. 가슴을 열고 눈물로 은혜를 받으며 기뻐하는 성도들은 모두 저의 기쁨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주님의 종들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섭섭함이 되는 대신 모두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근심거리가 되는 대신 모두 즐거움과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그것이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자손에게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나 기쁨 되기 원하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하고 가장 보배로운 것은 기쁨입니다. 가슴과 얼굴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가슴과 얼굴에 기쁨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서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있으면서 기쁨을 누리시고, 회개의 기도 앞에 있으면서 기쁨을 누리시고, 봉사와 전도의 사역 앞에 있으면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시고, 사람들의 기쁨이 되시고, 그리고 주님의 종들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시고 기쁨을 베푸시는 기쁨의 사람들 행복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 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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