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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평안을 누리려면 (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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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위로의 말씀을 상고함으로써 성도님들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때는 공생애가 끝마쳐갈 무렵,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이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믿고 따르던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가시다니…, 단 한번이라도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제자들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생각이 되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입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들만 남아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주님과는 영영 이별하는 것일까? 등등 제자들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온화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의 말씀과 같이, 불안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하면, 불안이 근심과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평안(平安)은 불안(不安)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불안한 것은 마음에 평안이 없다는 말이요, 평안한 것은 마음에 불안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불안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빛이 비치면 어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평안이 임하면 불안은 사라지고 맙니다. 반대로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면 불안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기독교 심리학자인 개리 콜린스는 불안을 ‘이 시대의 공식적인 감정’ 또는 ‘이 시대에 가장 만연된 심리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거 다른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불안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 시대의 급속한 변화와 치열한 경쟁과 다원화된 상태가 불안을 부추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불안, 인간관계의 불안, 질병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불안 등이 있습니다. 수험생들은 진학에 대한 불안이 있고, 대학생들은 사회 진출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지진이나 쓰나미가 발생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재난에 대한 불안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은 구체적인 원인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이라는 책에서 불안의 원인을 죄의식에서 찾았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타락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불안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 속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뱀의 꾐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나자 눈이 밝아졌습니다. 자기들의 벌거벗은 것을 알고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벌거벗은 것을 보이는 것이 불안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금령을 어기고 나자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죄가 아담과 하나님 사이를 단절시켰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죄가 불안의 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느낀 불안의 원인도 죄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불안은 죄와 상관없이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것을 염려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불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세상이 주는 평안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구적이지만,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입니다. 어제는 평안했는데 오늘은 평안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누리는 평안은 영원한 평안입니다. 영원하다 함은 변질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철이나 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학반응이 일어나서 녹이 쓸고 색깔이 변합니다. 그러나 순금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가 성 우물가에 물 길러 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물이라고 다 같은 물이 아니고 종류가 있습니다. 마셔도 다시 목마르게 되는 물이 있고,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습니다. 전자는 세상이 주는 기쁨이나 만족이나 행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형편에 따라서 쉬 변질되고 맙니다. 그러나 후자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의미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변질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평안은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서 좌우되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조건에 상관없는 평안입니다. 우리 몸이 건강하면 평안합니다. 경제 사정이 넉넉하면 평안합니다. 대인관계가 원만하면 평안합니다. 반대로, 병들거나 경제가 나빠지거나 대인관계가 나빠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경우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고 했습니다.

사도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불안의 원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과 질병도 사도에게서 평안을 빼앗아가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던 어떤 고질적인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아마 사도는 질병으로 인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를 받으면 어쩌나 불안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도는 말씀하기를 “9)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고 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이와 같이 말씀하는 사도에게서 불안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었을까요?

사도 베드로가 헤롯왕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끌려 나가 처형될 판국인데도,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서 잠을 청했습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으면 베드로를 구하러 온 주의 사자가 그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했을까요.

그리고 세상이 주는 평안은 그 속에 죄가 섞여 있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전도해 보면 대체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 걱정근심 없는 사람들이 완악하게 거부하는 것을 봅니다. 세상적인 평안함은 사람들을 죄악의 잠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 보니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 심령을 깨워서 은혜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아 언제나 영혼의 만족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천래적(天來的)인 평안입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누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혹시라도 불행이 닥쳐서 빼앗기지나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집에 가보면 방문 위에 부적을 붙여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악귀로부터 가정의 평안을 지키기 위해서 붙여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적이 평안을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평안은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그 조건이 없어지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돈 때문에 누리는 평안은 돈이 없어짐과 동시에 사라질 것입니다. 육신의 건강으로 인해 누리는 평안은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하늘로부터 온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증오와 위협도 그의 심령의 평안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누리는 심령의 평안에 대하여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라고 읊었습니다. 아직 엄마의 젖을 먹는 아이는 항상 젖을 갈망하느라 마음에 평안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젖을 떼고 밥을 먹는 아이는 더 이상 엄마 젖에 대한 갈망이 없으므로 엄마 품에 안겨서 한없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저물 때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데,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히니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부르짖었습니다.

때에 예수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봅니다. 배를 뒤집어엎을 만큼 큰 광풍도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빼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의 노여움을 사서 풀무불에 들어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심령 속에 천래적인 평안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놓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자와 풀무불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치 위대한 평안을 선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어려운 일을 만난 분들이 있으십니까? 주님께 평안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에게도 제자들에게 주셨던 평안을 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늘의 평안을 성도님들의 심령 속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주님의 평안을 받아 누리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영적 생명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은 주님의 생명에 동참함으로써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생명 안에 거할 때 주님의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생명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죄를 미워하는 이유는 죄는 우리의 생명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불교에서는 생명의 소멸을 적멸 또는 열반이라고 하며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로 삼습니다. 적멸은 존재의 소멸을 말하는데, 그것이 최상의 축복라고 하는 이유는 생명이 있는 한 끊임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인연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말하는 평안은 죽은 자의 평안에 불과합니다.

성도 여러분, 평안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풍성한 생명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그 다음, 주님의 평안을 받아 누리려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서두에서 말씀하였듯이,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입니다. 그리고 죄인이 불안한 이유는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모와 불화하고도 마음이 편치 못하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불화하고서야 어찌 마음에 평안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 세상에 질병, 죽음, 미움, 살인, 파괴, 전쟁과 같은 모든 악한 것들이 생겨난 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불안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를 청산함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때 부모와 화해한 자식과 같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짐을 하나님께 내어 맡길 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편 68편 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 짐을 져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또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삶의 모든 무거운 짐들, 그것이 아무리 크고 어려운 것일지라도 하나님께 다 맡기십시오.

마음의 불안도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성도들도 마음에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고라 자손이 지은 시편 42편에 보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 시인과 같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불안의 원인을 다 하나님께 고하십시오.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심으로 그 얼굴의 도우심을 받아 누리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는 성령님께서 임하여 계십니다. 그것도 어느 기간 동안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이유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행할 바를 일러주십니다. 성경은 이를 성령의 소욕이라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깨우쳐 주시는 대로 살아가면 생활 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3절에 보니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성령님께서 기뻐하셔서 평강에 평강을 부어주십니다.

반면에,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내 생각, 내 고집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의 열매는 고사하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므로 악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5장 19절로 21절에 이르기를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님의 지시에 불순종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면 즐거울 리가 만무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불안하고 편치 않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젊은 날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술취함과 방탕함을 좇아 살았습니다. 기독교를 떠나 마니교라는 사교를 섬겼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줄 알았지만, 나중에 회심하고 하나님의 품에 돌아왔을 때 그는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 마음에 참 평안이 깃들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한 세상을 사노라면 언제나 형통할 수만은 없습니다. 때로는 역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항상 사랑이 충만할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갈등 속에서 괴로워할 때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치 못하고 의심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고 내 뜻대로 행할 때도 있습니다. 항상 건강할 수 없고 병들어 힘든 나날을 보낼 때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은 불안해지고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는 것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고서 믿음으로 살지 못한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먹구름을 뚫고 빛나는 태양이 비치듯이 불안의 먹구름이 걷히고 주님의 평안이 우리 마음속을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힘입어 이 세상의 불안에 감염되지 아니하고 날마다 생명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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