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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적 열정의 함정 (막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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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지난 종려주일 때 생각했던 말씀입니다. 그 때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잘 생각이 안 나시죠? 또 제가 본문을 다시 묵상하다보니 아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하여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다시 한번 설교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화가가 '그림처럼 사랑하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그림처럼 설교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편의 그림으로 상상해본다면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즉 제자들과 무리들이 평행선을 그으면서 갈 길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진면모를 보여주시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주변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질 못합니다. 나름대로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존경하였습니다. 하여 예수님께 열렬한 환호를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예수님께 입혀 놓고 열광했던 것입니다.

언덕교회에는 한국교회의 왜곡된 종교적 열정을 피하여 모인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덕에 머물러 있다고 자동적으로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정말 열정적으로 사랑해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발견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1.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 드디어 예루살렘 근교에 도달하셨습니다.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베다니를 거쳐 벳바게에 당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이상한 심부름을 시킵니다. 맞은 편 마을에 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볼 텐데 그것을 풀어서 오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주님께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 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라고 답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제자들에겐 매우 생뚱맞은 심부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사람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걸어서 들어가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껏 걸어서 오시다가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이제 새끼 나귀를 타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제자들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습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새끼 나귀를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겉옷을 새끼 나귀등에 걸쳐놓았고 예수님은 그 위에 올라타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마가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 사건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니 마가 뿐 아니라 마태, 누가 그리고 요한까지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뭔가 중요한 교훈이 담겨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실천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진리에 이를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계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설교가요 교사로서 듣는 이들의 눈 높이에 정확히 맞추어서 깊은 진리를 아주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전달해주시곤 하셨습니다. 듣는 이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동안 졸 틈이 전혀 없었거니와 그 진리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에 멈추지 않으시고 제자들 스스로 실천과 성찰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전하고 훈련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사실 지금 스가랴 9:9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십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사실 이 말씀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온 유대인들에게 아주 생경한 말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지 않고 그냥 길가에 묶여 있는 새끼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는 심부름만 시키십니다. 그 심부름을 수행하면서 오가는 길에 그 뜻을 스스로 생각하게 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굳이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시는 것일까?' 하여 스스로 스가랴의 예언을 생각해내어 메시아에 대한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자들은 이에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에 의하면 그들이 스가랴 말씀에 비추어 예수님의 심부름과 행동의 진의를 깨달은 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을 입으신 다음이었습니다(요 12:16).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스스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진리에 도달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많이 부족한 점 중에 하나가 있다면 바로 이 점입니다. 최근 한국의 제일의 설교가 중에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 교계원로들의 부탁에 못 이겨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교회를 시작하기 전 까진 집필과 강연에 집중하면서 어느 작은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셨습니다. 멋있는 분이시죠. 그 때는 그 분과 교제하기 위해 그 교회로 아무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교회를 시작하고 설교를 한데니까 사람들이 몰려들어 몇 달이 안 되어 2부 예배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부럽고 감사한 일이죠. 그러나 문제는 탁월한 설교에 열광하는 만큼 순종과 성찰에 열심을 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한국교회가 처음엔 그런 대로 잘 나가다 결국 빗나간 소수의 목회자들에게 휘둘려 잘못된 길을 걸어가곤 하는 결정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 열정은 남아 있는 데 바른 진리는 사라져 갑니다. 탁월한 설교자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신앙은 교회에 큰 해독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 저의 바디매오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난 다음 김○○ 집사님이 재미있게 소감을 홈피에 올렸습니다. 그는 평소 버릇대로 목사님이 성경대로 설교를 제대로 하나 안 하나 감시(?)하기 위해 설교를 들으면서 동시에 본문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그러다 그만 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을 발견하고 감동에 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점인즉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그냥 '가라'고 하셨는데, 즉 자유와 해방을 선언하셨는데 바디매오는 그 기회를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르는 것으로 실천했으니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심장 한구석이 두근거리고 흥분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 소감을 읽으면서 정말 기뻤습니다.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든 것 있죠? 우리가 교회중심으로 자주 모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려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실천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 여유 그리고 여백을 주기 위함입니다. 자주 모이지도 않고 이런 훈련도 쌓아가지 않는다면 과연 언덕은 존재이유가 있을까요? 네, 저도 이 훈련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여러분! 『말아톤』이란 영화 잘 기억하시죠. 초원이가 포기하고 싶은 순간 다시 일어나 마침내 써브쓰리(sub3)를 해내고 만 것 말입니다. 그 결단의 순간은 몹시 외로웠습니다. 그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싸움에 승리했을 때 비로소 그는 달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언덕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어떤 점에선 매우 쉽습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귀찮게 굴지 않습니다. 대신 여러분 스스로 예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더 어려운 일이죠. 저는 여러분 모두 여기서 승리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초원이처럼 말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공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용기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원수들이 가득한 것을 익히 아셨습니다. 이번에 입성하시면 체포당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후 결국 비참하게 죽을 것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겨 몰래 입성하지 않으십니다. 그 고난을 정면으로 대면하십니다. 떳떳이 새끼 나귀를 타시고 무리들과 함께 공적으로 입성하십니다.

세상에 살다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손해가 될 적이 많지요. 어떤 때는 불쌍한 사람에게서 매정하게 눈을 돌려야할 때도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상황에서 상대의 형편을 냉정하게 무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정사정 다 봐주다간 내가 망하기 딱 알맞은 경우가 많지요. 때론 얼굴을 붉히고 목청을 높여 따지고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런 유혹을 뿌리치고 예수님처럼 신앙정체성을 떳떳하게 공개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합시다.

셋째,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대로 자신이 공의로우신 왕이요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며 온순한 왕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구약에서 공의와 구원은 매우 깊은 뜻을 담고 있으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단어들입니다. 공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로운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의로운 관계가 형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그 관계로 말미암아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을 공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겠다고 약속했고 사람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만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약속을 지키십니다.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하신 인간에 대한 의무를 다하신 셈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셨다는 점에서 예수님 역시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셨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온 몸을 던져 사람들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하지만 인류의 죄를 뒤집어쓴 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는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또한 죄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은 용서를 믿으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회복되고 거기에 공의가 선포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사이의 적대관계를 해소시켜 주십니다. 용서받은 자로 원수를 용서하며 사랑 받은 자로 모든 자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부어주시고 그렇게 살도록 요청하십니다.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보듬어 안아 사랑하며 그들의 인간 됨의 권리를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 요청에 순종할 때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회복이 되고 공의는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 갖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의미를 이기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왕을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을 늘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온순한 분이십니다. 공의와 구원의 왕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온순함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 바로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그 초라한 새끼 나귀마저 예수님 소유가 아니라 잠시 빌린 것입니다. 그 나귀등엔 보잘것없는 제자들의 겉옷이 화려한 안장대신 덮여집니다. 그가 가는 길엔 무리들의 겉옷과 그들이 들에서 꺾어 온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은근히 싫어하고 외면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새끼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셔서 승리를 한 손에 검어 쥐고 세상을 호령하며 마침내 모든 것을 쟁취하신 화려한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어떤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는 장소로 헤롯궁도 아니요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요 무시당하던 땅 갈릴리를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와 다른 6제자들이 좌절감에 빠져 갈릴리 바닷가에서 힘겹게 잡히지도 않는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은 해변가에서 손수 그들의 조반상을 차리십니다. 숯불을 펴고 생선과 떡을 구워놓으셨습니다. 참으로 온순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교회는 너무 쉽게 이 예수님을 잊어버립니다. 교계에서 조금만 성공하면 금방 천사대접을 받습니다. 대접을 하는 사람도 행복해하고 대접을 받는 사람은 그것이 성도들의 사랑을 존중하는 겸손한 길이라고 굳게 믿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새끼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오실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니체의 기독교비판을 정당화해주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니체는 기독교가 섬김의 윤리를 전하는 것은 노예들이 초인들의 자리를 강탈하려는 음모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온순한 섬김은 그 자체가 영광스럽고 위대한 것이지 더 영광스럽고 위대한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언덕은 언제나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이 편하게 들어오실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2. 열광하는 무리들의 오류

무리들은 예수님의 앞뒤를 호위하고 따라가며 열광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겉옷과 들에서 꺾어 온 잎 많은 생나무 가지를 예수님 가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9-10):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란 말은 '우리가 비오니 우리를 구하소서'란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그를 통해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여 그들은 예수님과 그를 통해 임할 나라를 축복하면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구원해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으로 다윗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그들은 온데 간데 없어졌습니다. 아니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즉시 예수님을 떠나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아니면 제자들과 함께 성전을 둘러보셨습니다. 때가 이미 저물어 예수님은 다시 조용히 베다니로 돌아오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모습과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마가는 아무런 논평 없이 이들의 열광적인 모습과 무대에서의 사라짐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로써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결여되어 있는 열광의 허망함을 넌지시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금은 비록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지만 조만간 예루살렘 성전을 접수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헤롯의 꼭두각시 정권을 무너뜨리고 빌라도 총독을 제거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을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에 실망하고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열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계 3:15-16).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에 근거한 열광이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왜곡된 열광주의가 한국교회를 망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덕은 그런 열광을 벗어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론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내 이익을 챙기려는 끈질긴 욕망과 과감히 결별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언덕이 한국교회의 희망이 되려면 아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경건하게 포장된 욕망까지도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끼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늘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그 예수님에 대한 건강한 열정을 회복하는 언덕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박 득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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