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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 : 생명의 떡(요 6: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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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생활에 쪼들리고 바쁘게 살고 어느새 지나가 버린 시간들을 돌아다보면서 “이게 사는 건가?” 싶은 바로 그런 우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복이며, 기쁨이며, 감사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생명이며, 쉼을 주는 쉼터이며, 복을 주시는 복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었기에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속 썩였다고 교회 안 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남편이 속 썩였다고 교회 안 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아내가 속 썩였다고 교회 안 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생활이 어렵다고 교회 안 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하는 일이 생각처럼 안 된다고 교회 안 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과연 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우린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예수님께 나아갈 줄 알았습니다. 허지만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 같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도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곧 우리의 생명이며,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쉬게 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은 재미로 다니는 것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것은 기분으로 다니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회 가 봐야 재미가 없어서” “오늘은 기분 나빠서 안 나갈련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믿음 없는 행위입니다.
잘못 예수 믿는 이유의 대부분은 자기 욕심에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 다니는 것도 내 마음이 편하고 좋아야 다니는 거 아닙니까?”
그래요. 그것도 그래요. 그런데 이런 사람은 거의가 남에게 불편을 주는 사람입니다. 남의 감정이야 상하든 말든 자기 감정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마음이 편하고자 남의 마음에 아픔을 주는 사람입니다.

미국 어느 대통령의 취임 연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일부 그리스도인들, “교회에서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는데?” “교인들이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는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는 그 사람은 교회를 위해 뭐 했는가요? 그러는 그 사람은 교인들을 위해 뭐 했는가요? 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 대부분 불평과 원망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를 남겼습니다.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자기들은 상상도 못할 일을 경함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예수님께 요구한 것이 표적입니다. 금방 그 표적을 보았던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어느 교회가 있는 마을에 술집이 있습니다. 이 술집이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기에, 온 교인들이 술집 문 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철야기도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술집에 불이 나서 타버렸습니다. 술집 주인이 들으니 교회가 자기 술집 문 닫게 해달라고 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재판장에 나간 교인들의 말은 이렇습니다. “물론 기도했다. 그렇다고 우리 기도 때문에 술집이 불이 났을 리는 없는 거다.” 술집 문 닫게 해달라고, 심지어는 불이라도 나라고 기도해 놓고선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니 “설마 기도 했기 때문에 그랬을라고. 누군가 실수한 거겠지.”

유대인들이 요구한 표적은 만나 사건입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5병 2어 기적은 단 한번, 그것도 5천명입니다. 만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하늘에서 내려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5병 2어 기적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재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생각은, 예수님의 5병 2어 기적도 대단하지만, 40년 동안 60만 명을 먹인 모세의 만나에 비교하면 별 거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광야의 만나 같이 매일 먹여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욕심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안 되니까 결국 다 예수님을 떠나가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그래. 모세는 60만 명을 40년 동안 먹였다. 그게 대단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3절)
보세요. 모세는 60만 명이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대상입니다. 모세는 40년이고 예수님은 ‘영원히’ 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무엇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무엇을?)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0만 명이 아니라, 세상 모두에게. 40년이 아니라 영원히 생명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래서 보내신 분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만나하고 비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그 외아들을 보내셨다는 이 보다 더 큰 기적이 있어요?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예수 당신이 메시아인 표적을 보이라는 겁니다. 보여 주었는데도 그건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구나”(36절)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다고 다 믿어지는 것 아닙니다. 광야 40년 동안, 유대인들은 수 없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렵고 힘든 순간마다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그렇게 불평과 원망하다가 어떻게 되었어요?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요,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는 직접 보여 주시지 않으셨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 만드셨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고, 심지어 병이라고 보기에도 지나쳐 귀신 들렸다는 사람도 고치셨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직접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한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37절)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 구원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주체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고, 구원을 얻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믿고 나아오는 자를 구원으로 맞아 주시고……. 이 구원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주관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장로교회와 감리교의 다른 생각이 나타납니다.
장로교 신앙 원리는 1) 전적 타락 전적 무능, 2)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만이 구원, 3) 제한 속죄. 선택받은 사람의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 4)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결정하면 끝내 구원으로, 5) 성도의 견인. 하나님께서 멸망으로 결정하면 끝내 멸망. 하나님께서 구원 하신 자는 끝까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겁니다.
전적 타락, 전적 무능은 개혁신앙이 기조입니다. 웨슬리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무조건적 선택이나 제한 속죄 등으로부터는 달랐습니다.

장로교는 에베소서1:4,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되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 그래서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와 멸망 할 자를 창세전부터 예정해 놓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무조건적 선택이나 선택 받은 사람의 수가 제한되었다는 것 아닙니다  더더욱 김 아무개는 구원, 이 아무개는 멸망으로 이미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 아닙니다.
4절, “그리스도 안에서” 5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장로교 옥한흠 목사님이 이스라엘과 비교했습니다. 민족들 중에 가장 작고 연약한 민족.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조금만 상황이 바뀌어도 어느 민족보다 빨리 타락한 민족.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택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에 의해 제한된 선택을 받은 자들은 온 인류가 아니라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는 선택 받은 민족이요, 이방인들은 지옥 불을 때는 장작에 불과하다.”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이미 선택 받았기 때문에 어떻든 다 구원 받고, 이방인은 선택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다 멸망당해야 하는 건가요? 더구나 선택 받은 사건의 수가 제한되었다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9)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장로교 이종윤 목사님께서 사용한 예화입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고요.
영국의 한 청년이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한달이 넘도록 가야하는 여행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형편이 어려워서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빵과 치즈, 버터 등을 준비(경비 줄이려고)했습니다. 한 주일, 두 주일이 지나면서 준비해간 빵, 치즈, 버터가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배의 식당에 가서 가장 싼 음식을 먹으려고 알아보니 모두가 다 공짜인 겁니다. 그 식당의 음식은 그 배표를 살 때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몰랐다는 겁니다. 그것이 예화입니다.

보세요. 1등석 사람은 식당 음식이 공짜, 3등석 사람은 돈 내야 한다는 것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 식당의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그 식당의 음식을 먹든 안 먹든 그것은 그 청년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도 그래요. 인간은 타락한 죄인입니다. 스스로 구원 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에게 은총을 주셨어요. 그게 뭐냐면?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이미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가 누구에게는 효력이 있고, 누구에게는 효력이 없는 것,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효력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그렇게 누구든지 예수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존 웨슬리는 선행 은총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미 배 삯에 식당 음식비까지 포함 된 것, 그게 선행은총이고, 먹고 안 먹고는 청년의 문제입니다. 예수 믿고 안 믿고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이 복음은,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로다.”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미 차별이 없느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6:36,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 하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믿지 못하도록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아니라, 인간의 한계, 인간의 무능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내가 보고, 판단하고, 이해하고, 그래서 믿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 온 떡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렸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고 하느냐?” 이들의 수군거림에 예수께서 그들이 이해하도록, 그래서 그들이 ‘아하! 그렇구나!’ 하도록 하려면, 예수님과 요셉, 예수님과 마리아, 예수님과 그 형제에 대해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유대인들이 판단하고 이해하고 결정할 거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수군거리지 말라”(43절) 하시고, 다시 “나는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신자나 교회 다녀도 불평이나 원망 하는 사람들은 늘 수군거립니다. 대부분, 뭔가 확실히 모르는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이 수군거림에 대해 예수님은 무시하셨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수군거림이 예수님께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방어나 자기변호를 하시려 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뭐라고 수군거리든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그렇기에 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자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이 떡을 먹으면 영생합니다. 그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7,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니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그런데 그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하셨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높이 들려야 하실 분입니다. 그 높이 들린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곧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 곧 살과 피를 내어 놓으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외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이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밥을 먹었다.’ 그러면 그 밥을 어떻게 되었어요? 몸 안에 들어가 소화가 되어 형태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밥은 영양분이 되어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습니다. 밥이 바로 내 자신이 된 것입니다. 음료도 마찬가지…….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내 몸에 들어와 내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내 삶에 들어와 바로 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6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57절)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므로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날 위해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날 위해 하나님께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개념이, 마치 형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야곱이 준비한 선물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예수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닙니다.
로마서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 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계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우리도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도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 찌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 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본문 54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즉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은 영생을 가졌다는 겁니다.  ‘가질 것이다’가 아니다 ‘가졌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3:18,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으면? “벌써 영생을 가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 믿으므로 지금 영생이 있는 자는 예수님의 재림 때 영원한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6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영생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염려도 없습니다. 새삼스레 무슨 기적이니 표적이니 구할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의 삶 그 자체가 기적이요,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못 믿으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겁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민수기 14:22-23,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 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 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삶 가운데 있어, 여러분은 생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끝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활하게 될 것 입니다.
표적을 구하다가 없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하고 감사 하십시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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