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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령한 축복의 사람 (욘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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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는 인간적인 의분과 하나님의 사랑이 충돌하는 대단히 다이나믹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성경입니다. 인간은 공의를 빙자해서 하나님 앞에 반역과 사람을 향한 증오심을 가지고 또 그것을 정당화 하려고 애를 쓰는 반면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말씀을 통해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알기 원합니다.

요나라고 하는 인물은 성경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기에 우리에게는 굉장히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그의 출생이나 삶이 어떤 지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구에 대한 기사가 4번 나와 있는데, 특별히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낸 후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로 인하여 인간적인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신학자들은 요나서를 신화나 우화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요나를 역사 속의 실존적 인물로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요나를 가리켜 "이 악하고 음란한 시대에 보일 표적이 될 만한 선지자로 요나를 지칭"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요나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분명하고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요나가 역사적인 인물임을 입증하는 가장 구체적인 정황은 특별히 열왕기하 14장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까지 회복하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로보암 왕이라고 하는 것은 북왕국 시대를 경제적, 군사적 황금기로 이끌었던 여로보암 2세를 의미하는 데, 41년동안 재위하였던 그의 시대를 그러나 성경은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암흑기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요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요나서인줄로 믿습니다.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5㎞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의 이름으로서 이는 요나가 최초의 갈릴리 출신 선지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요나의 아버지의 이름의 의미가 하나님의 진리라는 뜻을 가진 분으로서, 아밋대라고 하는 말은 아멘의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멘이 무슨 의미인줄 아시지요.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로 참됩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동의합니다...." 라는 긴 의미를 한 마디로 함축한 것이 아멘입니다. 마치 인터넷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익숙한 "알집"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자료들을 함축했다가 다시 풀어 사용하는 것 처럼, 아멘이라고 하는 단 한 마디 짧은 단어 속에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고백적 의미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아밋대라는 신앙적 가정에서 자란 역사적인 인물이었던 요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말씀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을 "신령한 축복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인 줄 믿습니다. 말씀이 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축복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신 사람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나서를 시작하면서 이 요나야말로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2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쳐라." 왜냐하면 그 성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그 성의 죄악이 커서 기도가 상달되듯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드러날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로보암 2세 때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는 풍족하였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어두운 시기요 타락한 시기였습니다.

니느웨가 어떤 도시입니까?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가에 있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그 니느웨가 삼일 길을 걸어야 할만큼 규모가 크다고 했습니다. 부천이 꽤 커보이는 80만의 도시이지만, 걸어간다면 하루면 충분하겠지요? 뿐만 아니라 니느웨는 선교사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두려운 도시입니다. 언제 어떻게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도시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0잘 12절에 보면, 니느웨를 건설한 사람은 당대의 영웅 니므롯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 죄악이 관여하던 도시로 요나를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요나가 가야만 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악독이 주님 앞에 상달 될 만큼 가득했던 니느웨,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니느웨,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이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한 열흘 동안 미국의 성장하는 도시, 그 도시의 교회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아주 행복하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 일정을 받았을 때 저는 조금 속상한 점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일정 속에 라스베가스가 담겨져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라스베가스는 슬롯머신이나 하고 빠찡코나 하는 도박의 도시라고 알고 있었어요. 아마 모르긴 해도 여기 계시는 8, 90%의 성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 이런 곳을 가나? 굉장히 언짢았습니다.

사실 미국에서 가장 영적으로 성장하는 도시, 남부 텍사스주 지역에 특히 텍사스주 수도에 휴스톤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 굉장히 미국교회가 성장하고 있는데, 특히 휴스톤에 있는 레이크 우드(Lakewood) 에 조웰 오스틴 목사님이 사역하고 있는 지금 수만명이 참석을 하고 있어요.

텍사스 레인저스팀이 사용하던 체육관을 인수해서 교회로 리모델링을 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한 번에 만명이 넘는 수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면을 저는 이미 인터넷으로 보았어요. 대단했습니다. 그 곳을 가고 싶었는데, 남부의 허리케인 때문에 수몰이 되고, 수재민이 생기고, 치안이 복잡해서 그 쪽은 순회하는 지역에서 빠져있었습니다.

라스베가스를 도착을 했습니다. 내가 도착해서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고, 예배하면서 제가 첫마디가 그랬어요.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왔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20년- 25년 이상 산 집사님들이 많이 계셨는데, 제 옆에 20년, 25년 이상 사신 집사님들이 앉아 계셨습니다. ‘목사님, 제가요. 이 라스베가스에서 20년 이상 살았어요.’ ‘저는 25년을 살았습니다.’

그 집사들이 저에게 반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한국이 라스베가스보다 낫습니까?’ 저는 굉장히 도전을 받았어요. 제가 소돔과 고모라 땅에 왔다고 언짢아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이 정색을 하고 나에게 반문을 하는 것이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라고 정색을 하면서 묻는데 제가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제 머릿속에는 저에게 한 반문이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 그리고 그 지역을 살펴보니까 라스베가스의 인구가 200만명이예요. 인천만한 도시입니다. 거기의 목사님이 제게 소개한다고 자동차로 이렇게 돌아주는데, 한시간만 시간을 내겠다고 하고 한시간 시내를 돌았는데, ‘어느 정도 돈 겁니까?’ ‘이것은 이 도시의 1/3 돈겁니다.’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지요. 저 인천 연안부두에서 부천까지 오는데 30분이면 충분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입니다.

저는 회개했어요. 하나님, 200만이 넘는 이 영혼들을 제가 죄인시하고 정죄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20년 이상을 살아도 거기서 흔히 도박의 도시라고 하는 라스베가스의 그 지역은 여기 있는 자녀들이나 시민들이 1/3, 아니 3/4은 20년 살아도 거기에 한 번도 안 갑니다.

저는 너무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얼마나 단편적인 것인지, 테니스를 하면서 공을 올 것을 알고 미리 라켓을 가져다 댔지만 선수는 그 장면을 보고 반대편으로 서브를 넣은 것처럼 내가 미리 예단을 해 버린 거예요.

큰 실수를 했어요. 목사님, 이 200백만이 넘는 이 도시에 만명이 넘는 교회가 열 교회가 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어요. 인천에 만명 넘는 교회가 제가 알기로는 두 개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순복음교회와 주안장로교회. 한국, 그리고 인천, 한국에서 제일 예수 믿는 사람의 비율이 높고, 가장 신앙적인 도시가 대한민국에서 인천인데, 인천도 그 도시에게 게임이 되지 않아요. 얼마나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부끄럽고, 그들을 도매급으로 넘긴 것을 회개했습니다. 목사님,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

얼마 전 통계를 보니까 젊은 대학생들이 한달에 3- 4번 성관계를 갖는답니다. 젊은 2-30대 부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노래방에서 무슨 방에서 한 달에 몇 번씩 나가서 한번에 1-20만원을 받으면서 자기 몸을 판답니다.

이게 한국사회의 일반화된 모습이예요. 우리가 그들보다 낫습니까? 저는 낫다고 대답을 못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도 절대로 낫다고 대답을 못했습니다. 바로 그 도시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뜨거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도시에 정말 많이 있었어요. 저는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정말 내가 이 도시를 오기를 잘 했구나라는 생각에 감사를 드렸어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말씀, 사실 저는 떠나기 전에 오늘부터 요나서를 말씀해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떠났는데, 얼마나 나에게 도전을 주고, 이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도움이 되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3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2절의 말씀, 주님의 말씀을 3가지 동사로 우리는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어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사회도 1907년에 하디선교사에 의해 원산과 평양에 일어났던 영적대각성 운동의 100주년을 앞두고서 한국교회도 이제 다시 영적으로 깨어서 일어나야 하겠다고 해서 라이즈 업 코리아(Rise Up Korea), 다시 한국이여 일어납시다. 영적으로 일어납시다. 100만 젊은이들을 모아서 백주년이 되는 해에 100만의 기도의 사람들을 모아보겠다고 하는 그런 운동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떠한 요동이 있습니까? 100만의 젊은이, 기도하는 젊은이를 모아서 한국을 다시 일으켜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운동이 있는 이 현실에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감동을 가지고, 어떤 심정을 가지고 이 시점에 하고 계시냐 그 말입니다.

깊은 영적인 태만과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말씀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일어나랍니다. 우리보고 지금 일어나랍니다. 일어나서 우리가 이 시기를 우리가 제대로 진단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에 보면 우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왜냐하면 우리가 잠이 깊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깊은 밤, 너무나도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사회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깨어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살릴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요즘에 조금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으면 무척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겠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제가 22년동안 평안의교회를 목회하고 있는데, 22년전 18평의 지하실에서 아무도 없이 개척을 한 무에서의 개척이었지만, 지금 이 평안의 교회는 감리교회의 5천여 교회 중에 5% 안에 드는 모든 사람이 저를 보면 평안의교회를 보면 성공한 목회자라고 평안의교회 가서 설교를 해 보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하는 그렇게 건강하고 자랑스러운 모델이 된 교회이기도 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성도들의 수고에 저는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그러나 요즘에 저에게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 교회를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 삶의 모토 중에 하나가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주 고백한 것이 있었지요? 나는 밥이나 먹는 목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5% 안에 드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3% 안에 들어갈 것 같아요. 그런 담임목사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게 고민은 이것입니다. 저는 교회다운 교회를 하고 싶습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니고,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5%에 드냐, 3%에 드냐, 성공한 목회자냐, 그런 기준이 아니고, 교회다운 교회를 하고 싶어요.

이번에 라스베가스의 한 목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여기서 개척하시지요. 목사님 같은 분이 개척하면 아마 2- 3년 안에 천명은 모일 것입니다. 미국사람이 만명 모이는데, 목사님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저와 하루 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그 분이 감동을 받았어요. 연세대 음대를 나오고 신학대학을 나와서 이제 와 있는 분인데,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고맙지요. ‘내가 개척 한 번 해 볼까?’ ‘목사님 오시면 될 것 같은데, 제가 도와 드릴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주 투어를 한 이유 중에 하나도 그런 고민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제가 몸부림치는 한 몸부림의 일환이었어요. 살아있는 교회란 무얼까? 교회다운 교회란 무얼까? 그래서 100, 200년 된 교회도 가 보았고, 몇 년 안 된 교회도 가 보았고, 전통지양적인 교회도 가 보았고, 아주 현대적인 교회도 가 보았어요.

여러분 중에는 혹시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녀주고 계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그리고 늘 목회자 앞에, 성도들 앞에 나는 당신들 위해 다녀주고 있는거야. 그런 위세를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영적으로 깨어서 교회다운 교회의 지체로써 우리가 살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저는 올 한 해 동안 이것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뭐, 이런 저런 분들이 교회 간다 그래도 제가 강권해서 막지 않았어요. 그래요. 가고 싶으면 가십시오. 제가 막지 않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교회를 다녀 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세상 끝나도 내가 이 자리에서 목숨 걸고 이 제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 열 두명만 있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지금 일어나야 할 때인 줄 믿습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현실에 안주하고, 이만하면 목사님 되지 않았어요? 뭐가 더 아쉬운데 건축을 더하고, 뭐가 더 아쉬운데 더 넓은 곳을 찾고, 뭐가 더 아쉬운데 무슨 사업을 더 벌리시고, 목사님 그냥 그대로 가십시다.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안주하려고 하려면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충분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앞에서, 말씀 앞에서 고민합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무얼까? 건강한 교회가 무얼까? 다른 교회에 비해서 좀 낫다고 하는 위로를 받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다이나믹한 영적인 헌신과 봉사가 살아 있는 열정과 희생이 살아 있는 그런 교회가 무엇일까를 저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일어나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가라고 말씀합니다. 가라고 하는 곳이 어디예요? 큰 성읍 니느웨입니다. 너무나 큰 성읍입니다. 사흘길을 가야할 만큼 규모도 크지만 가서 외친다고 해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위험과 두려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어떤 일을 맡았을 때,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런 기회를 주심을 기뻐하면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세보다 뭐 이런 새로운 것이 또 와서 한참 수고해야 되겠구만 하면서 짜증을 내지는 않습니까?

그저 괜찮은 곳에 들어가서 그냥 자연스럽게 편입되어서 그저 편안하게 한 해를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까? 우리교회는 내년에는 속회와 선교회가 통합이 되어서 아주 새로운 시스템으로 나갈 것입니다. 아주 파격적인 변화가 내년에는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제도적인 시스템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람이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제도가 바뀌고 시스템이 바뀐다고 달라지겠습니까? 물론 그릇도 바뀌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새로워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가서 외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19절에 보면 너희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너희에게 할 것을 주시리라.

수요일날 오전 10시가 되면 삼삼오오 교회로 모여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웨슬리70인 전도대, 때로는 노인들이, 때로는 젊은 여성들이, 때로는 남성들이 모여듭니다. 그들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여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여듭니다. 부족하지만 주님이 외치라고 하는, 주님이 선포하라고 하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우리는 역전으로도 가고, 아파트로도 가는 것입니다.

열 번이면 아홉 번은 우리는 푸대접을 받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요나가 지금 니느웨로 가면서 대접을 받기 위해서, 환호를 받기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할 말은 너희에게 내가 주리라.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10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곧 11월, 12월이 다가오는데 여러분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가 벙어리가 되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파하지 못하고, 한 해를 그냥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한 해가 지나도록 한 사람의 영혼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또 한 해를, 또 365일을 그냥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외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외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웨슬리 70인 전도대가 새해에 작정해서 하나님께 이 일을 감당하겠노라고 했다면 여러분들이 시간을 내고, 물질을 내고, 여러분의 정성을 내어서 헌신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여리고 거리청소를 통해서 내가 봉사의 자리에 서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면 여러분들이 경로로, 여러분들이 구제로, 여러분들이 장례의 자리에 열심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가라. 그리고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요나에게 주셨던 이 사명은 오늘 저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인 줄로 믿습니다. 이 음성이 여러분들을 움직이게 하시고, 이 음성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시고, 사명의 자리로 가게 하시고, 입을 열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고, 선포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요나를 향해 말씀하신 주님의 그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받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일어나게 하옵소서. 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외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목- 신령한 축복의 사람
본문- 요나 1: 1- 2

한 주간 자리를 비웠는데, 무척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을 느끼면서 내가 아직 평안의교회를 사랑하고 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뵙게 되어서 감사를 드리고, 지난 주간까지 사무엘상과 하를 통해서 받았던 은혜를 우리가 요나서를 통해서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요나서는 인간적인 의분과 하나님의 사랑이 충돌하는 대단히 다이나믹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성경입니다. 인간은 공의를 빙자해서 하나님 앞에 반역과 사람을 향한 증오심을 가지고 또 그것을 정당화 하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말씀을 통해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알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명하노라. 요나라고 하는 인물은 굉장히 성경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굉장히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그의 출생이나 그의 삶이 어떤 지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4번 나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요나서를 읽으면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낸 후에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로 우리 인간적인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런 기적 같은 체험한 사람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은 요나서를 신화나 우화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요나를 역사 속에 실존적인 인물로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요나를 가리켜서 이 악하고 음란한 시대에 보일 표적이 될 만한 선지자라고 요나를 지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요나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높고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요나는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신구약 4번의 소개 속에 특별히 열왕기하 14장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로보암 왕이라고 하는 것은 여로보암 2세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북왕국 시대의 황금기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크게 번성하고, 넉넉했던 시기를 말합니다.

41년동안 여로보암 2세는 재위하였는데, 그 기간에 여러 부분에서 그렇게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 황금기를 누리고 있던 여로보암 2세의 시대가 영적으로 가장 깜깜한 암흑시기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대에 당신의 종 요나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가드헤벨이라고 하는 것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5㎞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요나는 최초의 갈릴리 출신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요나의 역사적인 실존적인 부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밋대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그 아밋대라는 말의 의미, 요나의 아버지의 이름의 의미는 곧 하나님의 진리라는 뜻을 가졌는데, 그 아밋대라고 하는 말은 본래 아멘이라고 하는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멘이라고 하는 말은 뭐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로 참됩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동의합니다. 라는 긴 의미를 한 마디로 함축한 것이 아멘입니다.

인터넷을 하시는 분들은 컴퓨터에서 알이라고 하는 그 모든 자료를 알집에 함축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요. 그리고 나서 다시 그 알집을 풀으면 수많은 자료들이 그 알집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단 한 마디 짧은 단어이지만 그 속에는 엄청 중요한 신앙고백적 의미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요나의 아버지의 이름이 그렇게 신앙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 말입니다. 요나의 부모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의 이름을 지으면서 신앙적인 이름을 짓기를 원하고, 또 더 구체적으로는 성경에 있는 인물의 이름을 짓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이름으로 이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이름을 통해서 사회적인 책임까지도 지겠다고 하는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 부친께서 저를 사도요한을 닮으라고 요한이라고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파격적인 일이지요?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초음파도 안 되는 시대에 아들 이름을 지어놓고, 아들을 주실 줄 믿는다고 하는 부모님의 신앙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누님의 이름을 에스더로 지어 놓고 딸을 얻은 부모님의 신앙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이름을 가졌을 때는 그게 나의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닙니다. 이 이름을 가질 때에는 엄청난 사회적 책임을 가지겠다고 하는, 적어도 자녀에게 그런 이름을 주었을 때는 그런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큰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런 의지가 없다면 함부로 그런 이름을 짓지 마세요. 본인에게도 고단하고, 모든 사람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제가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신앙생활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그런 삶을 산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제가 남부시장에 가서 맨날 고스톱만 치고 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고스톱 잘 치는 사람 황요한 이렇게 된다고 하면 그 이름이 주는 의미가 어떻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가리겠지요.

적어도 부모님이 그런 이름을 지었을 때는 그런 이름대로 가르치겠다고 하는 의지를 가진 것입니다. 그런 이름을 제가 받고, 자라서 알았을 때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하는 다짐을 끊임없이 합니다.

어릴 때는 조금 불편했어요. 과거에 6,70년대에는 명찰을 달고 다녔는데, 요즘처럼 학교 갈 때는 붙이고, 올 때는 떼는게 아니라 아예 교복에 재봉질을 해서 딱 부착되어 있었어요. 제 이름은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에 누를 황 한자 외에는 요한은 한글이었어요.

한문으로 된 이름표는 얼른 지나가면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잘못된 일을 해서 붙잡히면 금방 알아요. 과거에 서울로 통학할 때 열차 패스가 있었는데, 그 당시 얼마나 행정이 되지 않았느냐 하면 한 달 패스를 끊는데, 학교에 6, 7시에 도착을 해서 소사역에서 기다려 가지고 패스를 끊으면 줄이 수백미터입니다. 학생이 많으니까요.

그거 무슨 증명서를 해 가지고 와서 패스를 끊어주는데, 열두시가 넘어야 제 차례가 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열두시가 넘어서 패스를 끊어가지고 소사에서 약대까지 그 십리가 넘는 밤길을 걸어 갔었어요. 매달 그 일이 반복되었어요.

그리고 그 패스가 매달 1일부터 새로운 패스가 되니까 적어도 30일나 31일날 끊어야 되는데, 어느 때는 학교일이나 그런 일로 바빠서 31일에 못 끊으면 1일이나 2일에 끊어야 하는데, 그러면 하루 지난 패스를 쓰게 되지요. 그 패스를 역무원에게 내 놓으면 역무원들이 하루 지났다고 벌금을 내도록 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벌금 낼 돈이 없는 거지요. 들고 뛰는거지요.

저는 항상 불리해서 뛸 수가 없어요. 이름이 한 눈에 보이니까 애당초 포기하는 거지요, 불편해 가지고 왜 내 이름 이렇게 지어줬느냐고 집에 와서 불평한 적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이름 좀 바꿔달라고 부모님께 떼를 쓴 적도 있었어요.

제 별명이 멸치볶음인데, 왜 멸치볶음이냐 하면 처음에는 요한볶음이었어요. 요한복음을 발음을 된 발음으로 해 가지고, 친구들이 요한볶음, 요한볶음 그러다가 어느 날 멸치볶음으로 바뀌었어요. 초등학교 때 별명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싫어가지고 이름을 바꿔달라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철이 들고 나서 얼마나 이름의 의미가 소중한지 알고 난 이후에 알게 된 거예요. 나 한 사람이 잘 못된 것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신앙적인 책임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아밋대라고 이름을 설명하면서 좀 설명이 길어졌습니다만은, 그런 요나의 신앙적인 가정의 의미로 볼 때 굉장히 신앙적인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적이면서 또한 역사적인 인물이었던 요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말씀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을 신령한 축복의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인 줄 믿습니다.

말씀이 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말씀을 듣는 시간에 집중을 해서 들어야 합니다. 다른 잡생각들이 여러분의 생각을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눈은 멀쩡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지만, 생각은 상상의 날개를 펴는 사람들, 저는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눈에 이미 초점이 흐려져 있어요. 멍해져 있습니다.

짧은 이 30분의 시간이 한 주간을 전심을 다해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대로 말씀을 받지 못하고 나서 여러분이 맥없이 세상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그렇게 실패자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신 사람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나서를 시작하면서 이 요나야말로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2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쳐라. 왜? 그 성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기 때문이다. 너무 그 성의 죄악이 커서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데, 그들의 죄악이 너무 커서 저절로 하나님 앞에 드러날 정도로 그 성의 죄악이 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여로보암 2세 때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는 풍족하다고 하지만, 가장 영적으로 어려운 시기, 영적으로 타락한 시기,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에서 지금 이스라엘에도 영적인 상황이 깜박깜박하는 상황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 할 수 없는데 지금 어두움의 세상이 온 땅을 지배해서 하나님 빛이 이제는 드러나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런 상황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두시고, 저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파하라는 거예요.

흔히 우리는 선교를 말하면 우리나라에도 아직 전도되지 못한 지역도 있고, 교회가 없는 면소재지도 있고, 아직도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무슨 외국에 선교며, 무슨 해외에 구제냐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은, 오늘 이 요나서를 보면서 우리는 전도 안목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이스라엘을 보면 영적으로 어두워서 깜빡깜빡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 요나를 앗수르에게 보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니느웨가 어떤 도시입니까?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가에 있는 앗수르,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그 니느웨 수도의 면적을 삼일 길이 될 만큼 크다고 했어요. 3일을 걸어가야 할 만큼 수도의 지름이 크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넓은가를 알 수 있지요. 여러분 부천이 꽤 커보이고 80만의 도시이지만, 걸어간다면 하루면 충분하겠지요? 반나절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저 오정구까지 우리가 걸어간다 할 지라도 반나절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느웨의 이 성은 3일길을 걸어야 할 정도로 큰 도시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니느웨는 선교사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제약과 불의에 두려운 도시입니다. 언제 어떻게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도시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0잘 12절에 보면 니느웨를 건설한 사람은 당대의 영웅 니므롯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해서 바벨탑을 쌓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 죄악이 관여하던 도시에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요나가 가야만 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악독이 주님 앞에 상달 될 만큼 가득했던 니느웨,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니느웨,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이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한 열흘 동안 미국의 성장하는 도시, 그 도시의 교회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아주 행복하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 일정을 받았을 때 저는 조금 속상한 점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일정 속에 라스베가스가 담겨져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라스베가스는 슬롯머신이나 하고 빠찡코나 하는 도박의 도시라고 알고 있었어요. 아마 모르긴 해도 여기 계시는 8, 90%의 성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 이런 곳을 가나? 굉장히 언짢았습니다.

사실 미국에서 가장 영적으로 성장하는 도시, 남부 텍사스주 지역에 특히 텍사스주 수도에 휴스톤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 굉장히 미국교회가 성장하고 있는데, 특히 휴스톤에 있는 레이크 우드(Lakewood) 에 조웰 오스틴 목사님이 사역하고 있는 지금 수만명이 참석을 하고 있어요.

텍사스 레인저스팀이 사용하던 체육관을 인수해서 교회로 리모델링을 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한 번에 만명이 넘는 수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면을 저는 이미 인터넷으로 보았어요. 대단했습니다. 그 곳을 가고 싶었는데, 남부의 허리케인 때문에 수몰이 되고, 수재민이 생기고, 치안이 복잡해서 그 쪽은 순회하는 지역에서 빠져있었습니다.

라스베가스를 도착을 했습니다. 내가 도착해서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고, 예배하면서 제가 첫마디가 그랬어요.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왔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20년- 25년 이상 산 집사님들이 많이 계셨는데, 제 옆에 20년, 25년 이상 사신 집사님들이 앉아 계셨습니다. ‘목사님, 제가요. 이 라스베가스에서 20년 이상 살았어요.’ ‘저는 25년을 살았습니다.’

그 집사들이 저에게 반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한국이 라스베가스보다 낫습니까?’ 저는 굉장히 도전을 받았어요. 제가 소돔과 고모라 땅에 왔다고 언짢아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이 정색을 하고 나에게 반문을 하는 것이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라고 정색을 하면서 묻는데 제가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제 머릿속에는 저에게 한 반문이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 그리고 그 지역을 살펴보니까 라스베가스의 인구가 200만명이예요. 인천만한 도시입니다. 거기의 목사님이 제게 소개한다고 자동차로 이렇게 돌아주는데, 한시간만 시간을 내겠다고 하고 한시간 시내를 돌았는데, ‘어느 정도 돈 겁니까?’ ‘이것은 이 도시의 1/3 돈겁니다.’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지요. 저 인천 연안부두에서 부천까지 오는데 30분이면 충분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입니다.

저는 회개했어요. 하나님, 200만이 넘는 이 영혼들을 제가 죄인시하고 정죄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20년 이상을 살아도 거기서 흔히 도박의 도시라고 하는 라스베가스의 그 지역은 여기 있는 자녀들이나 시민들이 1/3, 아니 3/4은 20년 살아도 거기에 한 번도 안 갑니다.

저는 너무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얼마나 단편적인 것인지, 테니스를 하면서 공을 올 것을 알고 미리 라켓을 가져다 댔지만 선수는 그 장면을 보고 반대편으로 서브를 넣은 것처럼 내가 미리 예단을 해 버린 거예요.

큰 실수를 했어요. 목사님, 이 200백만이 넘는 이 도시에 만명이 넘는 교회가 열 교회가 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어요. 인천에 만명 넘는 교회가 제가 알기로는 두 개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순복음교회와 주안장로교회. 한국, 그리고 인천, 한국에서 제일 예수 믿는 사람의 비율이 높고, 가장 신앙적인 도시가 대한민국에서 인천인데, 인천도 그 도시에게 게임이 되지 않아요. 얼마나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부끄럽고, 그들을 도매급으로 넘긴 것을 회개했습니다. 목사님,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

얼마 전 통계를 보니까 젊은 대학생들이 한달에 3- 4번 성관계를 갖는답니다. 젊은 2-30대 부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노래방에서 무슨 방에서 한 달에 몇 번씩 나가서 한번에 1-20만원을 받으면서 자기 몸을 판답니다.

이게 한국사회의 일반화된 모습이예요. 우리가 그들보다 낫습니까? 저는 낫다고 대답을 못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도 절대로 낫다고 대답을 못했습니다. 바로 그 도시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뜨거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도시에 정말 많이 있었어요. 저는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정말 내가 이 도시를 오기를 잘 했구나라는 생각에 감사를 드렸어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말씀, 사실 저는 떠나기 전에 오늘부터 요나서를 말씀해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떠났는데, 얼마나 나에게 도전을 주고, 이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도움이 되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3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2절의 말씀, 주님의 말씀을 3가지 동사로 우리는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어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사회도 1907년에 하디선교사에 의해 원산과 평양에 일어났던 영적대각성 운동의 100주년을 앞두고서 한국교회도 이제 다시 영적으로 깨어서 일어나야 하겠다고 해서 라이즈 업 코리아(Rise Up Korea), 다시 한국이여 일어납시다. 영적으로 일어납시다. 100만 젊은이들을 모아서 백주년이 되는 해에 100만의 기도의 사람들을 모아보겠다고 하는 그런 운동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떠한 요동이 있습니까? 100만의 젊은이, 기도하는 젊은이를 모아서 한국을 다시 일으켜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운동이 있는 이 현실에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감동을 가지고, 어떤 심정을 가지고 이 시점에 하고 계시냐 그 말입니다.

깊은 영적인 태만과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말씀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일어나랍니다. 우리보고 지금 일어나랍니다. 일어나서 우리가 이 시기를 우리가 제대로 진단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에 보면 우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왜냐하면 우리가 잠이 깊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깊은 밤, 너무나도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사회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깨어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살릴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요즘에 조금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으면 무척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겠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제가 22년동안 평안의교회를 목회하고 있는데, 22년전 18평의 지하실에서 아무도 없이 개척을 한 무에서의 개척이었지만, 지금 이 평안의 교회는 감리교회의 5천여 교회 중에 5% 안에 드는 모든 사람이 저를 보면 평안의교회를 보면 성공한 목회자라고 평안의교회 가서 설교를 해 보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하는 그렇게 건강하고 자랑스러운 모델이 된 교회이기도 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성도들의 수고에 저는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그러나 요즘에 저에게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 교회를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 삶의 모토 중에 하나가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주 고백한 것이 있었지요? 나는 밥이나 먹는 목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5% 안에 드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3% 안에 들어갈 것 같아요. 그런 담임목사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게 고민은 이것입니다. 저는 교회다운 교회를 하고 싶습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니고,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5%에 드냐, 3%에 드냐, 성공한 목회자냐, 그런 기준이 아니고, 교회다운 교회를 하고 싶어요.

이번에 라스베가스의 한 목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여기서 개척하시지요. 목사님 같은 분이 개척하면 아마 2- 3년 안에 천명은 모일 것입니다. 미국사람이 만명 모이는데, 목사님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저와 하루 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그 분이 감동을 받았어요. 연세대 음대를 나오고 신학대학을 나와서 이제 와 있는 분인데,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고맙지요. ‘내가 개척 한 번 해 볼까?’ ‘목사님 오시면 될 것 같은데, 제가 도와 드릴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주 투어를 한 이유 중에 하나도 그런 고민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제가 몸부림치는 한 몸부림의 일환이었어요. 살아있는 교회란 무얼까? 교회다운 교회란 무얼까? 그래서 100, 200년 된 교회도 가 보았고, 몇 년 안 된 교회도 가 보았고, 전통지양적인 교회도 가 보았고, 아주 현대적인 교회도 가 보았어요.

여러분 중에는 혹시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녀주고 계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그리고 늘 목회자 앞에, 성도들 앞에 나는 당신들 위해 다녀주고 있는거야. 그런 위세를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영적으로 깨어서 교회다운 교회의 지체로써 우리가 살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저는 올 한 해 동안 이것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뭐, 이런 저런 분들이 교회 간다 그래도 제가 강권해서 막지 않았어요. 그래요. 가고 싶으면 가십시오. 제가 막지 않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교회를 다녀 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세상 끝나도 내가 이 자리에서 목숨 걸고 이 제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 열 두명만 있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지금 일어나야 할 때인 줄 믿습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현실에 안주하고, 이만하면 목사님 되지 않았어요? 뭐가 더 아쉬운데 건축을 더하고, 뭐가 더 아쉬운데 더 넓은 곳을 찾고, 뭐가 더 아쉬운데 무슨 사업을 더 벌리시고, 목사님 그냥 그대로 가십시다.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안주하려고 하려면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충분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앞에서, 말씀 앞에서 고민합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무얼까? 건강한 교회가 무얼까? 다른 교회에 비해서 좀 낫다고 하는 위로를 받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다이나믹한 영적인 헌신과 봉사가 살아 있는 열정과 희생이 살아 있는 그런 교회가 무엇일까를 저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일어나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가라고 말씀합니다. 가라고 하는 곳이 어디예요? 큰 성읍 니느웨입니다. 너무나 큰 성읍입니다. 사흘길을 가야할 만큼 규모도 크지만 가서 외친다고 해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위험과 두려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어떤 일을 맡았을 때,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런 기회를 주심을 기뻐하면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세보다 뭐 이런 새로운 것이 또 와서 한참 수고해야 되겠구만 하면서 짜증을 내지는 않습니까?

그저 괜찮은 곳에 들어가서 그냥 자연스럽게 편입되어서 그저 편안하게 한 해를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까? 우리교회는 내년에는 속회와 선교회가 통합이 되어서 아주 새로운 시스템으로 나갈 것입니다. 아주 파격적인 변화가 내년에는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제도적인 시스템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람이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제도가 바뀌고 시스템이 바뀐다고 달라지겠습니까? 물론 그릇도 바뀌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새로워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가서 외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19절에 보면 너희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너희에게 할 것을 주시리라.

수요일날 오전 10시가 되면 삼삼오오 교회로 모여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웨슬리70인 전도대, 때로는 노인들이, 때로는 젊은 여성들이, 때로는 남성들이 모여듭니다. 그들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여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여듭니다. 부족하지만 주님이 외치라고 하는, 주님이 선포하라고 하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우리는 역전으로도 가고, 아파트로도 가는 것입니다.

열 번이면 아홉 번은 우리는 푸대접을 받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요나가 지금 니느웨로 가면서 대접을 받기 위해서, 환호를 받기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할 말은 너희에게 내가 주리라.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10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곧 11월, 12월이 다가오는데 여러분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가 벙어리가 되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파하지 못하고, 한 해를 그냥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한 해가 지나도록 한 사람의 영혼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또 한 해를, 또 365일을 그냥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외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외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웨슬리 70인 전도대가 새해에 작정해서 하나님께 이 일을 감당하겠노라고 했다면 여러분들이 시간을 내고, 물질을 내고, 여러분의 정성을 내어서 헌신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여리고 거리청소를 통해서 내가 봉사의 자리에 서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면 여러분들이 경로로, 여러분들이 구제로, 여러분들이 장례의 자리에 열심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가라. 그리고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요나에게 주셨던 이 사명은 오늘 저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인 줄로 믿습니다. 이 음성이 여러분들을 움직이게 하시고, 이 음성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시고, 사명의 자리로 가게 하시고, 입을 열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고, 선포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요나를 향해 말씀하신 주님의 그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받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일어나게 하옵소서. 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외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 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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