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칼을 쓰는 자 (눅 22:47-53)

  • 잡초 잡초
  • 375
  • 0

첨부 1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칼을 씁니다. 그런데 그 칼이 얼마나 예리한지 목숨까지도 빼앗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을 죽입니다.
비난의 칼, 시기와 질투의 칼, 자기 욕심의 칼, 저주의 칼, 책망의 칼, 희롱의 칼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칼들을 휘두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만해 두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누가, 왜 칼을 쓰는 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기 위해서 칼을 씁니다.
한 무리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들 가운데 앞장서서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예수께 입을 맞추기 위해서 가까이 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려고 하느냐?”

지금 가룟 유다가 왜 무리를 끌고 예수님께 왔는지 그 이유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아먹기 위해서 무리를 끌고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예수니 그를 잡으면 된다.”고 미리 무리들과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 그는 예수를 팔기 위해서 이렇게 무리를 끌고 왔으면서도 겉으로는 “선생님 평안하십니까?” 하면서 입을 맞추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려고 하느냐?”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왜 예수를 팔아먹으려고 했을까요? 누구보다도 신임을 받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재정을 담당했을 정도로 예수님이 신임하셨습니다. 그런 그가 삼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보고 배웠고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알고 있는 제자 중 하나인 그가 어찌하여 예수를 팔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느냔 말입니다. 물론 성경은 사단이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예수를 팔고자 하는 생각을 집어넣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사단이 집어넣어 준 마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가 사단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한때 열심 당원이었던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기대했던 것은 메시야의 왕국입니다. 예수가 로마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실 분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의 기대를 저버리셨습니다. 아니 그의 기대와는 달리 로마와 맞서 싸우고자 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전혀 그들을 모아 로마를 물리칠 생각은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아니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내 나라를 갉아먹는 철천지원수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 개인의 원수라면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이건 내 나라를 쳐들어와 점령하고 있는 원수 중의 원수 나라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나라를 찾겠다고 나섰다가 죽임을 당하는 많은 동료들을 보면서 “그래 예수라면, 이렇게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면, 이렇게 많은 무리들이 따르는 분이라면, 능히 저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어”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넘는 많은 무리들을 먹이고 난 다음 그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일 때 예수님은 서둘러 무리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그 많은 무리들이 환호할 때 한번만 나를 따르라고 외치셨다면 금방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예수님은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시는 연약한 모습만 보였을 뿐입니다. 기껏 한 것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장사꾼들만 내쫓으시면서 지도자들의 반감을 샀을 뿐입니다. 그리고 한 주간을 머물면서도 한 번도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려고 하는 시도를 해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으로는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앞장선다고 하는 것은 기대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실망감은 곧 좌절과 분노로 바뀌고 맙니다. 속으로 얼마나 예수를 비난했는지 모릅니다. 아니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가도 했습니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예수를 따라 다녔나 싶으니까 더 속이 상합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는 그럴 바에는 예수를 없애는 것이 낫겠다 싶었던 것이요 그래서 자기 손을 대지 않고 그토록 예수를 잡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백성들 몰래 넘겨주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예수님을 향해서 들이댄 칼은 “선생님 평안하십니까?” 하는 평안을 가장한 세치 혀의 칼이었습니다. 그 어떤 칼보다도 더 무서운 칼을 그는 예수님을 향해 내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안을 말하고 있지만 속에는 무서운 독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 나라를 다시 세워보고자 하는 자기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아니 자기 바람이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실망을 넘어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만을 섬기기로 다짐을 하였지만 그런데도 주님이 지금까지 내게 베풀어주셨던 그 사랑보다 내가 주님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느끼는 실망과 좌절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에게 바라는 것은 이런 건데 내가 바라는 것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힘들고 지쳐서 넋두리처럼 주님 나를 어떻게 좀 도와주세요! 간구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허전한 마음을 채울 길이 없습니다. 아니 지금 내가 부딪치고 있는 나의 삶은 너무도 처절하기만 합니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이게 아닌데 여전히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기만 한 나의 모습이 내 스스로도 실망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나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봅니다. “그래 아무개는 역시 나보다는 나아” 기대감을 가지고 가까이 지내지만 어느 순간에 그의 실망스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럴 때 느끼는 좌절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좌절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데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겨우 겨우 진정해 보지만 한번 실망한 마음에는 보이는 것마다 들리는 것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 다 짓밟아버리고만 싶습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지내보지만 속상한 마음의 상처는 더 깊어지기만 합니다. 도대체 은혜가 뭔지, 앞서서 수고하는 사람을 보면서 저런 사람을 왜 하나님이 저렇게 쓰시는지 몰라, 저런 사람을 왜 앞세우시는지 도무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니 그래서 슬그머니 비수를 들이댑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입을 맞추고 있지만 그 속에 독을 품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고 하셨지만 한 번 실망한 마음에는 모든 것이 고깝게만 보입니다.

그건 스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해 봐야지 하다가도 어느 순간 또 다시 좌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왜 나는 항상 이 모양인지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은 이게 아닌데 내가 볼 때도 이런데 남이 나를 볼 때는 어떨까 싶어 더 속이 상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 않은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그래 더 잘해 보려고 해도 어느 순간 또 다시 이게 아닌데 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 또 그랬어! 하며 실망합니다. 다 포기해 보리고만 싶습니다. 다 버리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아니 그런 자신에 대한 분노는 다른 사람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대는 모습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래 상대방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겨주고 맙니다. 내가 볼 때도 이런데 남이 나를 볼 때는 어떨까 아니 주님이 나를 보실 때 어떨까 싶어 전전긍긍합니다. 이러면서도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가 싶어서 더 좌절하고 맙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통곡하며 가슴을 쥐어뜯어도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마다 다 상처가 됩니다. 들려지는 것마다 고통이 됩니다. 차라리 내가 안 보고 안 들으면 되지 하는데도 여전히 보이고 들리니 어쩌란 말입니까? 그런데 그런 모습들이 다 예수를 팔아먹는 유다와 다름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바입니다. 문제는 유다가 아니라 그런 유다를 바라보며 분노하는 내 자신의 모습 역시 유다와 다를 바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독을 품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부고 있는 내 모습이 바로 예수를 팔려고 하는 유다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도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는데 하나가 되기는커녕 여전히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내 모습이 아니 상대방의 연약함까지도 감싸 안아주지 못하는 내 모습이 바로 유다의 모습이기에 더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사랑이 무엇입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고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셨으며 주님이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셨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셨으며 주님이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너희도 이렇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과연 나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나는 감싸 안기보다는 돌을 던지고 있지는 않았는지 깊이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으로 인하여 진흥한다고 했는데 축복하기보다는 비난하기에 더 빠르지 않았는지 그렇다면 나 역시 예수를 팔아먹기 위해 세치 혀의 칼을 들었던 가룟 유다와 마찬가지로 말만 번드르했지 여전히 예수를 팔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유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기의 빚을 다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함으로 인해 자기가 다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주님의 비유를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나 역시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의 자리로 떨어지고 마는 것인데 어찌 그런 어리석은 자로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마음 내 생각 내 상처로 인해서 내 기대에 못 미친다고 해서 예수를 파는 자 되었던 가룟 유다의 어리석음에 우리가 빠져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참고 기다리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며 끊임없이 제자들을 참된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나가시던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소망을 잃지 말고 원수까지도 내 사람, 주님의 사람으로 바꾸어나가는 그 믿음의 길, 사랑의 길에 동참하시어 못난 사람, 내 속을 지지리 썩이는 사람까지라도 끊임없이 격려하고 작은 것까지도 인정해 주며 감싸 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귀한 백성으로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사장들과 무리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서 칼을 씁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예수를 잡기 위해 칼을 들고 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생각에는 예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마귀의 자식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으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가 바알세불 즉 마귀를 힘입어서 이런 일들을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자기들처럼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의 모습과 예수님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은혜가 많고 아무리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이래야 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실망은 그에게 임한 은혜와 은사마저도 무시해 버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은사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온전한 사람을 택하셔서 일꾼 삼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을 세워 잘 낫다 여기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허물이 보입니다. 여전히 많은 은혜와 은사를 받은 사람치곤 부족하기만 합니다. 처음에는 엄청 교만스런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세워나가는 주님의 비결입니다. 그 교만을 하나님이 깨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바꾸어 가시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앞서서 수고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그 사람을 위해 우리가 합력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사람을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혼자서는 부족하냐면 주께서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만으로도 이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완벽한 사람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혼자서 완벽해질 수 있는 것 아닙니다. 함께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에는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며 협력해주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왜 주께서 전도자를 보내실 때 두 사람씩 짝을 지워 보내셨습니까? 혼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연약해도 함께 하면 강해집니다. 그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두 세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그들과 함께 있겠다 하셨고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할 때 내가 그들을 위해 이루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약한 부분을 감싸 안으십시오. 내게 상처가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더 감싸 안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비난을 앞세운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칼을 들고 온 제사장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왜 제사장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까? 예수가 자기들보다 앞서가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앞서야 되는데 예수가 앞서갑니다. 마땅히 자기들이 있어야 될 자리에 예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어야 한다고요?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어찌 제일 앞장 설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는 보호해야 될 대상입니다. 천방지축 나선다고요? 그래서 더 감싸주고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나설 곳 나서지 않을 곳 가리지 않고 얼마나 툭툭 불거져 나옵니까? 그러다가 고꾸라진 베드로를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감싸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주님의 큰 일꾼으로 그가 든든히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저 자리는 내 자리라고 하시겠습니까? 왜 나설데 안 나설데 다 나선다고 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어디든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속상하기도 합니다. 너무 교만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흠이라도 보일라치면 그러면 그렇지 그러면서 왜 나서냐고 비난을 합니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습니다. 답답하니까 견디지를 못하고 자기가 또 나서게 됩니다. 그래요. 이게 인생입니다. 그러나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절제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그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준다는 마음을 가지면 모든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서지를 못하는 사람은 앞에 있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설 수 있도록 힘을 도와준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교만하다고 느껴진다면 겸손으로 허리를 숙일 수 있도록 이끌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도록 힘을 합쳐주면 됩니다. 비난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나가는데 있어서는 비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들을 보십시오. 앞서가는 교회치고 앞서가는 목회자들치고 한번쯤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너무 튄다고요? 그 중심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를 먼저 보란 말입니다. 그 중심에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작은 흠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잘못될까 두려워하지 말고 잘못되지 않도록 기도로 밑받침해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주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일꾼을 삼으면 됩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신령한 은사를 제한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보다 뛰어납니까? 우리 가운데 온전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온전치 못하기에 신령한 은사도 부인합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잘못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됩니다.

왜 주님께서 남의 눈의 티를 빼라고 하기에 앞서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비난에 앞서서 함께 세워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입장에서는 예수가 너무 앞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죽어야 마땅하다고요. 그래서 칼을 들고 예수를 잡으러 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잡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일꾼은 함께 세워나가는 것이지 비난하고 거꾸러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일꾼이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함께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지키기 위해서 칼을 씁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을 보고 베드로가 칼을 휘두릅니다. 제사장의 종 가운데 하나가 그 칼에 귀를 맞아 귀가 떨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종의 귀를 만져 고쳐주시고는 “그만해 두어라”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들을 막을 힘이 없어서 가만히 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이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일을 하다보면 내 딴에는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뜻과는 반대로 나갈 때가 있습니다. 다 교회를 위해서 한다고 말들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주님은 죽어가는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은 살리는 영이지 죽이는 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면 그 어떤 대적을 행해서도 칼을 휘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비난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뒤에 서야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쓰시는 칼은 오직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 칼은 사랑의 칼입니다.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만져서 고쳐주시는 사랑입니다. 아픈 곳을 감싸안아주는 사랑입니다. 내가 아프니까 너도 아파야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내가 아프기에 다른 사람은 아프지 않도록 싸매주어야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내게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를 불 일 듯 하게 하고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은사를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사는 말 그대로 은사 즉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중에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해롭게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가지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나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까지 감싸 안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람까지 고쳐주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을 슬프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내 생각에 가두지 마십시오. 성령이 내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도록 맡기십시오. 그리고 내게 주시는 감동을 따라 충성하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영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갈라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단의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서로 비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비난하거든 입을 다무십시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가 누구를 비난하고픈 마음이 생기거든 아주 입을 앙다무십시오. 그 비난의 칼을 빼들 때 주님은 아파하십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만해 두어라.”

칼을 휘두르기를 그만해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말이 칼이 되면 안 됩니다. 칼이 필요합니까? 말씀의 검을 취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내 말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사랑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잡아 내리지 않습니다. 오직 세워갈 뿐입니다. 돌을 던지기로 한다면 돌에 맞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의 죄와 허물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우리 가운데 나는 떳떳하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교회를 망치고 하나님의 일을 어긋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누구에게건 보인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더 기도하십시오. 더 축복하고 중보기도 해 주십시오. 내가 칼을 들지 마십시오. 바로 잡을 것은 하나님이 바로 잡으시도록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하시게 하십시오. 무엇으로 내가 판단합니까? 너희가 판단하는 그것으로 너희가 판단을 받으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만해 두어라”
이 주님의 말씀 앞에 조용히 엎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말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힘든 게 아니라 내가 힘들다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일하는 소의 입에 멍에를 씌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힘껏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곁길로 빠지려고 한다면 고삐만 당겨주면 됩니다. 어떻게요? 사랑으로 감싸주고 기도로 도와주면 됩니다. 잘하는 것은 더 잘하도록 격려해주고 부족한 부분은 내가 감싸 안으면 됩니다. 그 수고하는 것조차 부인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 해보라고 해 보십시오. 먼저 수고했다고 칭찬해 주십시오. 그리고 난 다음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해 보라고 길을 알려 주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거든 조용히 사람 앞에서는 침묵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입을 여십시오. 이것이 아니다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도록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되 내 입의 말로 하나님의 제한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칼을 드는 자가 되지 마시고 또한 주님을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향해 비수를 휘두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사랑으로 나아가시기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귀한 사랑의 교회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귀한 일꾼들을 계속해서 세워나가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홍 인덕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