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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순종 (창 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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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순종 (창22:1-19)

하나님께서 참 좋아하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의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순종에는 말씀하신 자에 대한 존경과 믿음과 사랑과 온갖 아름다운 신앙의 요소가 내포된 것일 뿐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복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사실 이 이야기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를 위해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실재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모리아산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갈보리산의 바로 그 장소입니다. 얼마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이 아름다웠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을까요? 우리 성도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순종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순종은 어떤 순종이었을까요?

1. 사랑의 순종이었습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셨는데 여기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는 최소한 3개 이상의 수식어를 사용하신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수십 년을 기다려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으니 그렇게 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이삭이 얼마나 순종적인 자식입니까? 본문에서도 아버지가 자기를 묶고 칼로 찔러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데도 순종한 자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을 위하여 포기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이 자기와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은 쉽게 순종하지만 자기 이익이나 욕심에 관계된 일은 잘 순종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울 왕이 모든 것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좋은 것은 자기를 위해 갈무리해놓고 낮은 것은 다 멸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순종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짜 순종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사랑의 순종입니다.

2. 겸손의 순종이었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대답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순복하도록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자기 위치를 고백하는 대답입니다.

이런 겸손이었기에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으시고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언제는 주셨다가 이제 와서는 바치라 하시니 애초에 하나님께서 주시지나 말던지 왜 주시고는 빼앗아간단 말입니까?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겸손했기 때문에 뜻을 알지 못해도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교리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요구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겸손하셨기에 아버지의 말씀 따라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3. 열심의 순종이었습니다.

3절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음을 보여줍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요청을 받았음에도 불구라고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손을 잡고 끌었던 소돔의 롯과는 달리 지체하지 않았던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드릴 산을 지정하셨는데 그곳은 사흘 길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길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죽음의 길이니 보통 사람 같으면 얼마나 마음 무거운 길입니까?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자기 편법을 쓰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반대로 열심 없는 그의 조카 롯을 보세요. 천사가 롯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피하여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였을 때 거부하고 작고 피하기 좋은 소알을 택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런 마지못해서 하는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즐기는 아버지는 없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이상의 순종이었습니다.

4. 불변의 순종이었습니다.

4절에 “제 3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바라본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 산까지는 사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까운 곳을 지시하지 아니하시고 사흘 길을 가서 바치라고 하였겠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입니다. 사흘이면 마음이 바뀔 수 있는 기간입니다.

우리말에 ‘작심 3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게 결심해도 사흘만 지나면 흐지부지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실 때 상당한 기간을 보십니다.

5. 믿음의 순종이었습니다.

5절에 사환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하였습니다. 돌아오리라는 단어는 1인칭 복수형으로 그 정확한 의미는 “우리가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아들을 제물로 드리고 나면 혼자 와야 할 텐데 그는 우리라고 했습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삭으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자손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을 약속하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한 입으로 두 말하시는 분이 아님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믿음이 있었기에 이삭을 묶어 놓고 칼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이삭이 칼에 찔려 죽어도 살기 어려울 텐데 번제란 몸의 부분 부분을 갈라 각을 뜬 다음 태워서 재로 만드는 제사인데 그것을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순종은 믿음의 순종입니다. 순종의 결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칭찬하시고 온갖 아름다운 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6. 온전한 순종이었습니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순종에 방해가 될 지도 모르는 유혹의 요소까지 제거하며 순종했습니다. 아내 사라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이성적이지만 여자는 감정적이 아닙니까? 만약 그런 아내와 의논했다면 아담이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 따먹는 조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신앙의 사람이지만 한 다리 걸쳐서 들은 사람이기에 긍정적인 말해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삭 대신 좋은 소나 몇 마리 드리자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내가 대신 죽겠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또 5절과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사환들에게 산 밑에서 기다리게 하고 이삭에게 나뭇짐을 지고 올라가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인들을 거기 머물게 한 것은 그의 순종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온전한 순종을 위해서 모든 유혹의 요소까지 떨쳐버리고 순종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순종이 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종이라는 하나님의 큰 복 앞에서 유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배웁시다. 우리 주님에게서 배웁시다. 복이 그냥 옵니까? 순종하는 자에게 옵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사랑의 순종, 겸손의 순종, 열심의 순종, 불변의 순종, 믿음의 순종, 온전한 순종을 하여 하나님께 사랑 받고 인정받고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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