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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8:12 - 행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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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에 청년들 사이에 유행한 말 가운데 <폼생폼사>라는 말이 있지요
최근에는 코메디 프로 가운데 또 폼생폼사라는 말이 나와서
아마 이제는 많이 들어본 말이 될 거예요.
< 폼생폼사 > 무슨 말이겠습니까?
발음이 이상한 것 보면 중국말 같기도 하고
폼 하는 것 보니 영어같기도 하고 도대체 어느 나라말입니까?
그래서 검색을 해봤더니 <잭스키스> 라는 보컬팀이 부른 노래도 있어요.
그 가사 첫 머리가 해석을 해 주데요.
[ 폼에 살고 죽고, 폼 때문에 살고 폼 때문에 죽고 ]
그래서 폼생폼사 - 폼 때문에 살고 폼 때문에 죽는 것.
혹 교회 안에도 보면 신앙생활을 폼생폼사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요?
말을 지어보라면 바울은 폼생폼사가 아니라 복생복사 했던 것입니다.
복음 위해 살고 복음 위해 죽고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요. 중심인 것입니다.

“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는 주의 음성을 들은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전도하고 양육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 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 잠시 머물다가
안식년도 없이 다시 3차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마지막 코스와
3차전도 여행의 출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3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어떤 것이며
에베소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먼저 본문말씀 앞부분(봉독하지 않음) 18:12-23절까지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 일년 육개월을 머물면서 말씀을 가르치며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12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유대인에 의하여 공격을 받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참 불쌍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디를 가나 항상 핍박하고 공격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기에 개의치 아니하고 전도를 하게 됩니다.
고린도에 사는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새로 부임한 총독 갈리오 앞에 바울을 재판정에 끌고가 세워 놓고
13절 [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
고 송사를 하니
총독 갈리오는 14절에
[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 들어주는 것이 가하나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
하고는 저희를 재판정에서 쫓아 내어 버리니
유대인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다가 재판정에서 때렸습니다.
이 회당장 소스데네는 8절에 앞서 예수 믿고
온 집으로 세례 받은 회당장 그리스보의 후임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 소스데네는 회당장 이었지마는 신앙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고전1:1절에 [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 하면서
바울의 복음사역에 동반자로 불리워 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해지자
더 이상 고린도에 머물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바울은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을 향해 돌아갑니다.
모 교회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가운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함께 하는데
겐그리아라는 곳에서 일찍 서원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바울이 머리를 깎습니다.
그리고는 에베소로 와서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여기로 마칩니다.
그런데 바울이 얼마 있지 아니하고 곧 다시
갈라디아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굳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울의 전도 여정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바울은 바로 복생복사의 사람이구나
연민이 가면서도 참 복음을 위해서 지독한 사람이구나
근간에 맨유에 가서 선수생활하는 박지성 선수를
<폭주 기관차>라는 별명을 달아 주었는데
바울이 바로 복음을 싣고 가는 폭주 기관차구나 싶습니다.
근간에 우리 성도들 중에도 바울을 닮아가는
복생복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브루기아를 거쳐 다시 에베소에 들어가게 되는데
에베소에서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니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라는 유대인을 만났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있던 바로 그 지역에서 온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고 합니다.
아볼로,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이 아폴로입니다.
헬라어로는 아폴론, 로마에서는 아폴로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뜻의 이름인 아볼로를 소개하기를 ‘학문이 많고’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교육을 잘 받아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을 뜻했습니다.
그보다 더 그는 성경에 능한 자라고 지목되었는데
이 말은 <뒤나토스>라는 말을 썼어
힘있고 능력있고 구체적인 기술도 뛰어난 사람을 말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을 바탕으로 성경도 잘 알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일찍 배웠는데
아마 세례요한의 가르침의 전통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니
[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
아볼로는 아주 지성적인 열심있는 교인이었습니다.
문제는 [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이 나~ 가 문제입니다.
성경을 잘 압니다. 예수님도 잘 압니다. 가르치기도 잘 합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러니 불세례 즉 성령세례는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성경도 잘 압니다. 교회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성령이 없습니다.
이런 교인들 교회생활도 잘 합니다.
교사도 하고 직분도 맡아 봉사도 하고 사역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적 감화를 주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브레이커를 겁니다.
교회 부흥에 방해가 됩니다.
아볼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이런 교인들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에 눈이 뜨여지고
성령 받아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받아 성령의 사람이 되면
말씀이 기본기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나타냅니다.

이 아볼로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있던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십자가의 도와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자세히 풀어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그 후 그의 설교에는 구원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그의 복음에는 생명력이 넘쳐흘렀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아볼로 선생 - 아직 뭘 모르는군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배웠습니까?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아마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 아볼로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언제 한 번 식사 같이 한 번 합시다 ]
그래서 그 후 만난 장소에서 성령에 관한 사실을 말해 준 것 같아요.
이렇게 사람 잘 만난다는 것 아주 중요한 일 같습니다.
아볼로라고 하는 능력의 복음 전파자가 있는 데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멘토가 있었습니다.
아볼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알지 못할 때
그들은 나서서 아볼로에게 영적인 충고와 지도를 하게 됩니다.
아볼로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자칫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사랑으로 복음의 진실을 바르게 전달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결국 아볼로라고 하는 믿음의 사람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이들 부부가 얼마나 복음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한 사람을 사랑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는 단면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데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 하딩 목사란 분이 계시는데 이 분의 체험담입니다.
젊어서 조그마한 회사에 다녔는데
그는 자신의 봉급이  오르지 않자 사장에게 단단히  항의할 결심을 했습니다.그리고 그 결심을 아내에게도 알리고 출근했습니다.
그날 회사일이 너무 바빠 사장에게 항의할 시간을 내지 못하고 
퇴근한 그는 우연히 아내의 경대서랍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두 장의  카드가 있었습니다.
『여보, 봉급인상을 축하해요』
또 하나는 『봉급인상은 안됐지만 난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하당의 아내는 항상 순경과 역경 두 가지 모두에 대비하여
지혜로운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딩 목사가 간증하기를
[ 나의 목회의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현명한 아내의 덕분이다 ]
이런 부모 되고 이런 부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특히 아볼로와 브리스길라 아굴라의 관계는 교역자와 평신도 관계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이런 은혜와 지혜와 폭넓은 이해심이 나옵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1년 반 동안 고린도에서 성경을 부지런히 바울에게 배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갔을 때 이들 부부도 동행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린도에서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 함께 따라 나선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위하여
고린도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머나먼 아시아 에베소로 따라 나선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고전16:19을 보면.
[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 합니다.
이 편지를 쓰는 곳은 에베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들 부부에게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모교회와 같으니
간절히 문안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들만 문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문안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 집에 교회가 섰는지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그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바울과 이들 부부는 에베소로 갑니다.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를 첫번 방문한 곳입니다.
바울은 이들 부부를 이곳에 떨어뜨려 놓고는
홀로 안디옥 본 교회로 돌아갑니다.
그 동안에 이들 부부는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었습니다.
당연히 이들 부부는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사용하였을 것이고요.
바울이 에베소로 돌아와 2년간의 본격적인 사역을 할 때
이들 부부가 전도하여 세운 교회가 중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교회 중심 교역자 중심으로 나타남을 봅니다.
교회 중심 교역자 중심의 충심으로 아볼로에게 권면했기 때문에
아볼로도 진심으로 저들의 권면을 받고 능력 있는 일군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의 수고로
아볼로가 말씀 위에 성령의 능력이 더 해지니

27절에 [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
28절에 [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더라 ]
그 후 아볼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기친 일군이 됩니다.
고전3:4- 이하에 보면 아볼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이는 아볼로에게로라 하니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
[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거두었다 ]
이것을 볼 때에 아볼로는 잘 거두는 사람,
즉 양육을 잘 하는 사역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사역을 잘 했으며
아볼로파 바울파가 생길 정도로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고전4:6절에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
그 후에 바울이 보기에도 신앙의 본이 된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성령에 능력에 한 번도 붙들려 본 적이 없는 직분자라면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고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이 되는 일군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바울은 안디옥에서 잠시 머물다가 3차전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갈라디아, 브루기아 땅을 거쳐 에베소로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 19장의 내용은 
에베소 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기 전의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사도 바울이 볼 때에 깜짝 놀랄만 했습니다. 
그것은 1) 에베소라는 도시의 사회상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에베소는 아테네, 고린도 처럼 잘 알려진 도시입니다.
에베소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세계 7대 불가사의라 할 수 있는 아데미 신전입니다.
이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것으로
거대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는데 20M 높이의 기둥이 127개 였다고 합니다.
그리스인의 구전에 의하면,
[ 지금까지 태양이 운행하는 중에 아데미 신전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보지 못했노라 ]고 하는 격찬의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데미 여신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의 여신입니다.
아데미 여신의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이 있고,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의 부조로 새겨져 있었고
매년 5월 아데미 여신의 축제날이 되면
유방과 같은 수의 24명의 흰 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데미 여신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 따른다.
이 신전에서의 여신을 숭배하는 모습은 기묘하고 황홀하며 가히 광적입니다. 고함소리와 울음소리를 동반하며 나팔이 울리면서 분향을 시작하게 되면,
군중들은 흥분과 발광으로 날뜁니다.
게다가 음탕하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서슴치 않고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에베소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세속도시의 배경을 가진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성령을 몰랐으니깐 어찌 세속의 물결을 물리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심지어 교회에서 일하고 있는 교인들의 신앙생활 중에도 
엡5:에 보면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과 세속화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과거에 이방신을 섬길 때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혼합적인 신앙생활을 했으며, 
또한 아볼로의 영향으로 율법적이고 지식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뒤따르지 못하는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를 보고 대뜸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 물음의 의미는 성령을 받고 그 능력으로 신앙을 하면 
이렇게 무기력하고 변질되고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신앙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건데
너희가 신앙생활을 해도 성령을 받지 못했으니 이 모양이구나,
그래서 [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 고 물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8>
옛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거듭난 새사람의 신앙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제자들이라고 하면서 어찌 죄악과 타협하는 신앙을 하고 있는가하는 
책망이자 바울 사도의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그럴 때 에베소 교인들은 실제로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듣지 못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는 [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고 물었습니다. [ 요한의 세례 ]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물세례는 받았지마는 성령으로 세례는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 있는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는 본인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신앙 실천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토레이> 목사는 성령의 불세례를 체험한 뒤에
[ 성령의 불세례는 거듭나는 것과 달랐고 본인이 알고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써 봉사적인 사람이 되었다 ] 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토레이 목사의 말과 같이 거듭나는 것은 성령 세례와는 다릅니다.
거듭남과 동시에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으나(우리 교단은 성령충만이라함)
대부분의 사람은 거듭나는 경험을 하고 나서 성령충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로교 창시자 칼빈은 [ 성령을 받았느냐? ] 는 이 말을
[ 믿는 자를 새로 나게 하여 새 생명으로 다시 살게 되는
생명의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은사적인 성령을 말한다 ]
즉 성령충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라도 성령충만에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럼 어떻해야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성령 세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겠다고 기도하면 됩니다.
6, 7절 말씀입니다.“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에베소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님의 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자, <9>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방언하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임한 표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 받지 못한 교인의 신앙생활은 마치 촛불과 같습니다.
바람을 막아 주면 좀 살다가 막을 벗기면 간들간들 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저 기쁘고 즐겁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줍니다.
세상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 됩니다.
뒤에 보면 에베소에 성령 받은 열두 사람들이
에베소를 변화시키는데 주역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이 임하니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더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영적통찰력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 유행가도 부르다 보면 신바람이 납니다.
남행열차에~ ! 얼마나 신나게 부릅니까?
그런데 예수 믿어도 신바람이 안나는 교인
성령충만 받지 못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바람 난다고 다 성령충만인냐?
성령충만 받고 나면 반드시 예수의 증인이 될 줄 믿습니다.
성령충만 받으면 폼생폼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 위해 살고 복음 위해 죽는 삶
복생복사로 살아갈 줄 믿습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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