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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적 순결을 지키라 (레 18: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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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 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26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시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도 행하지 말라 27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29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30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좇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서론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생각할 때에 기독교는 감정도 없고 근엄하기만 한 종교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감정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사랑도 느끼고 정열도 느끼고 따뜻함도 표현하고 공정심도 표현합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사랑도 없고 감정도 없어서 마치 수도승처럼 근엄하기만 하다면, 기독교는 사회의 축복이 되기보다는 재앙이 될 것입니다. 기쁨은 기독교인들의 특징이고, 기독교인들은 사랑이 풍부하며 감정이 풍성합니다. 그런데 이 감정에는 약점이 있습니다. 한계를 쉽게 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을 제멋대로 놀도록 풀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은 반드시 순결과 의를 기준으로 해서 조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사랑을 해도 덕스럽고 의롭게 할 때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하게 통제되지 않는 사랑은 잘못하면 파멸의 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사랑하는 감정, 소유하고 싶은 감정, 즐기는 감정들이 다 좋고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음란이 되고, 부정이 되고, 사욕이 되고, 탐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18장과 20장의 말씀은 특별히 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명확한 한계를 그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성적 순결이라고 하는 원칙 아래에서 엄격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8장에는 ‘인간의 사랑의 한계는 이것이다.’ 하고 정해져 있습니다. 레위기 20장에는 ‘이 한계를 넘어설 때에는 어떤 형벌이 부여되는가?’ 하는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특별히 이 문제에 관해서 철저한 회개와 개혁이 필요합니다. 성매매 특별법 시행 이후에 집창촌의 활동은 위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넷 성매매, 해외 성매매, 핸드폰 성매매 등 그 유형이 다양화 되고 은밀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풍선효과’라고 합니다. 풍선이라고 하는 것은 한군데를 누르면 그곳은 들어가지만 다른 곳이 불룩하게 나오게 됩니다. 한국 사회는 외국보다도 성적 타락의 도가 심합니다. 어떤 분들은 뉴올리언즈가 성적으로 타락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서울이 뉴올리언즈보다 훨씬 더 부패했습니다. 뉴올리언즈는 특정한 지역만 그런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뉴올리언즈 어디에서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까? 단란주점이니 노래방이니 하는 곳을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프랜치 쿼터’라고 하는 특정지역만 그런 것입니다.
지역 전체가 일반적으로 부패한 것으로 따지자면 우리 한국 사회가 단연 으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철저한 회개와 개혁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부패는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이런 문제에서 결코 자유스럽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부흥사 목사님이 교회 부흥회에서 자녀를 갖지 못하는 여성도를 위해서 뜨겁게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그 여성도가 자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아이가 자신의 남편의 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소위 제자훈련이라는 것이 한국 교회에 유행하면서 일대일 양육이 한국 교회에 유행하다 보니 여자가 남자를 양육하고 남자가 여자를 양육하면서 이성적 감정이 싹트고 결국 타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는 사랑의 감정이 제대로 통제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레위기 18장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사랑의 감정에 명확한 한계를 주셨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실히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이 말씀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26절에 보니까 “그
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시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도 행하지 말라” 이것이 이스라엘만의 법도가 아니라 온 우주의 법도요,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포함하는 법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적 순결을 유지하고 사랑의 한계를 제대로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의 대원리는 무엇일까요?

1. 성적 순결의 대원리 - 한 몸 관계를 지키라

가정을 지키고 부부가 한 몸을 이루었으면 한 몸 관계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결혼과 부부의 바른 정의를 성경은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9장 5절에서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님은 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한 몸관계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법적인 결합이나, 감정적인 결합이나, 종교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근본적인 의미는 육체적인 결합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6절에도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죽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창기와 합하는 것은 창기와 육체적인 결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법으로는 아무리 사람이 남녀가 육체적인 결합을 해도 결혼이 되지는 않습니다. 혼인신고를 해야 결혼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원리는 결혼과 육체적인 결합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적인 결합이 곧 결혼이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육적인 결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결합과 결혼이 같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4장 67절에 보니까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이삭이 결혼을 합니다. 창세기 23장에 모친 사라가 죽고 24장에서 리브가를 취하여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모친의 장막에 리브가를 취하여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이삭이 취한 그 행동이 결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육신적인 결합이 결혼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장 16-17절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정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빙폐를 드려 아내로 삼을 것이요” 총각이 결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했으면 동침했기 때문에 아내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로 삼을 때에 그 여자를 그렇게 키워준 부모에게 감사하는 표시로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내로 삼는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꾀어서 동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육체적인 결합 그 자체가 결혼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성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원리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원리는 변치 않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를 꾀어 동침을 했지만 결혼을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 될 사람을 싫어해서 딸 주기를 싫어할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반드시 ‘빙폐하는 일례로 돈은 반드시 여자의 아버지에게 주어야 한다’고 창세기 22장 17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부의 아버지의 반대가 없는 한 육체적인 결합은 곧 결혼이요 결혼이란 한 몸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원리입니다.

성경은 혼전 성관계의 문제를 허용하느냐 하는 문제는 이야기의 주제도 될 수 없을뿐더러 그러한 내용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혼전성관계와 같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경과 모순 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들이 다른 처녀를 꼬여서 동침을 했을 경우에 신랑측 부모가 “우리는 저런 처녀를 며느리로 들일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신랑의 부모는 반대할 권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이 처녀를 꾀어 동침했으면 그 처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살아야 합니다. 처녀 아버지가 싫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 측에서 싫다고 거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육체적인 결합이 곧 결혼이요 한 몸 관계인데, 한 몸 관계를 이룬 이후로는 예쁘든지, 밉든지, 곱든지 간에 한 몸 관계를 평생에 지켜 나가라는 것입니다. 가정이 유지되는 것은 사랑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유지된다고 하면 사랑이 없어지면 깨지라는 말입니까? 감정이라는 것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가정의 근거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닌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몸 관계를 이루었으면 그것을 지켜 나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명확한 명령입니다.

2. 성적 순결을 깨뜨리는 네 영역

그런데 오늘 레위기 18장을 보면 사람이 성적 순결을 깨뜨리는 네 가지 영역이 나옵니다. 네 가지 영역이 대단히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읽고 이런 죄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대단히 솔직합니다. 애매모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우리가 읽기에도 민망스러운 구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성경의 솔직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8장은 인간이 성적 순결을 깨뜨리는 네 가지 영역이 나와 있고, 레위기 20장에는 그에 대한 형벌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 형벌은 대단히 가혹합니다. ‘죽일찌니라’ 아니면 ‘무자하리라’ 아니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의 세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물론 이 시대에 성적인 부패에 관해서 이런 형벌을 대한민국 형법에 두어서 형벌을 부과한다고 한다면 여기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이 형벌을 오늘날 시대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만 성적인 순결을 지키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은 만고불변의 시대와 민족을 초월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적 순결을 깨뜨리는 첫째영역은 레위기 18장 6절에 있습니다.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 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것은 근친상간(Incest)을 금하는 말입니다. 우리 한국의 민법은 오랫동안 동성동본의 혼인을 금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금지를 폐지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동성동본의 혼인을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은 골육지친과의 혼인입니다. 7절에는 어미, 아비, 8절에는 계모, 9절에는 자매, 10절에는 손녀, 외손녀, 11
절에는 계모의 딸, 12절에는 고모, 13절에는 이모, 14절에는 아비 형제의 아내, 15절에 자부, 16절에는 형제의 아내 등등 결혼할 수 없는 골육지친의 명단이 대단히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동성동본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골육지친을 금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골육지친과의 결합을 금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유전학적인 이유로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골육지친이 결혼을 하면 유전자중에서 열성 유전자들이 결합을 해서 장애아를 낳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유전학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거룩한 하나님인데 골육지친을 범하는 근친상간은 거룩하지 못한 짓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인류가 처음 번창할 때에는 어떻게 합니까? 아담 하와 밖에 없고 아들 딸 밖에 없으면 서로 결혼해서 번창해야 하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인류가 번창한 이후에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의 특수한 상황의 예를 들어서 근친상간을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크리스천 라디오에서 상담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이전에 근친상간의 경험이 있어서 그것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담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화상담이 계속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에 성도들 가운데에도 근친상간의 아픈 경험이 있어서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사람이 이런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근친상간, 골육지친의 결합을 금하십니다.

둘째영역은 18장 20절입니다. “너는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여 그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찌니라.” 간음(Adultery)을 금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한 몸 관계를 이룬 부부와 가정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게 되면 타인의 아내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 아내와의 한 몸 관계가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몸 관계가 깨진 부부가 다시 이전의 관계로 회복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더구나 간음으로 인해 자녀가 태어나는 경우에 그 자녀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태생으로 말미암아 한평생을 얼마나 가슴 아프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한국사회에는 이런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외국사람을 비판합니다만 우리 사회에 이런 일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다른 것은 용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한 몸 관계를 깨뜨리는 간음은 부부사이에도 대단히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가정부가 전화를 받습니다. 그러자 이 남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아내 어디 갔습니까?” 가정부가 깜짝 놀라면서 대답합니다. “아니, 주인 어르신이 어제 밤일을 마치고 아침에 들어오셔서 두 분이 같이 주무시고 계시는데요?” 그러니 이 남자가 얼마나 화가 납니까? 그래서 가정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돈 오백만원을 줄테니까 그 남녀를 몽둥이를 가지고 가서 졸도를 시켜라” 그러자 가정부가 마음이 동해서 몽둥이로 남녀의 머리를 때려서 졸도시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말합니다. “안방에 화장실이 있으니까 거기에 꽁꽁 묶어서 집어넣어라.” 그러자 가정부가 “아 이 집에는 안방에 화장실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그 남자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고 합니다. “그 집 전화번호가 542-OOOO 아닙니까?” 그 남자는 엉뚱한 남의 집에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부사이에 한 몸 관계를 깨드리는 간음은 이성을 잃어버리게하고 극도의 악한 감정을 유발한다는 우스개소리입니다. 이처럼 간음의 죄는 서로 용서하기가 힘이 듭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영화가 부패했습니다. 연속극이 부패했습니다. 소설이 부패했습니다. 대학교수도 참으로 부패한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시대는 프리섹스의 시대라고 합니다. ‘free’라는 말은 자유라는 뜻도 있지만 공짜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성적인 부패는 참으로 엄청난 대가를 하나님으로부터 치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첫째 금하신 영역은 근친상간이요, 둘째 영역은 간음입니다.

세 번째 영역은 무엇입니까? 8장 22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이것은 동성연애(Homosexuality)를 금하는 말입니다. 동성연애자들은 이성연애자들이 자신들보다 더 부패하다고 공격을 합니다. “우리는 동성일 뿐이지만 우리는 너희들처럼 부패하지 않았다” 고 하면서 이성연애자들을 공격합니다. 이성연애자들이 부패해도 하나님이 진노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성연애가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강도가 “왜 나를 처벌하느냐? 살인자도 있는데!” 그러면 살인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강도의 죄는 죄가 아닌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동성연애는 하나님이 인정치 아니하십니다. 동성연애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22절 후반에 보면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동성연애는 가증한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가증한 일에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가증한 일이 이 사회에 떳떳한 것으로 나오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권리가 되고 합법이 되고 타당화가 되어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저것도 괜찮은 것인가보다’ 하는 생각을 주는 사회 분위기는 기독교가 막아야 합니다. 가증한 일은 가증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가증하다고 하신 일이 지금에 와서는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영역은 18장 23절입니다.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이것은 수간(Bestiality)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모세의 시대에도 인간들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성적 순결의 상급과 성적 부정의 형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적 순결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한 몸 관계를 이루었으면 그것을 평생에 걸쳐서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상을 주십니다. 어떤 상입니까? 18장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살리라’하는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생명(Life)과 번영(Prosperity)입니다. 사람이 성적 순결을 지키게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장수의 생명도 주실 뿐만 아니라 잘 사는 번영의 축복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래 살며 번영하고 싶으시면 성적인 부패의 죄악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성적인 부패로 인한 죄악이 있으시면 회개하시고 씻음 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네 가지 영역에서 성적 부정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땅도 그런 사람은 토하여 내고, 하나님도 그런 사람은 백성 중에서 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구약시대만의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신약시대에도 그런 것입니까?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을 보면 간음자, 동성연애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좇아 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약시대에도 그러한 성적 부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증거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대할 때에, 남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남에게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돌로 들어 “죽일까요 말까요?”하고 예수님에게 물어 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릎을 굽히시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글씨를 쓰신 후에 일어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먼저 돌로 치라” 그러니 사람들이 돌을 놓더니 슬금슬금 도
망가 버리고 아무도 그 여자를 돌로 찍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남들이 죄가 있을 때 돌을 던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살펴보면 죄가 있습니다.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인,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간음한 여인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너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의롭게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예수님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우고 지금도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그런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과 대화하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 주시고, 그 여인에게 믿음 주시고,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거룩한 기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끌어내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죄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심판하시지만,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하시고 잊으시고 새 삶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성경 호세아서를 볼 때에도 아이를 낳고도 가정을 버리고 떠난 고멜, 창기 고멜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남편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돈을 주고 창기가 된 네 아내를 다시 사다가 집에 들여 아내로 삼고 살아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는 호세아 2장 2절에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음행은 제하고 깨끗이 씻어서 다시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가정을 성적인 죄에서 지킵시다. 남자들은 특히 반성할 것 반성하고, 회개할 것 회개하고, 지금도 죄에 빠져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이 와서 치기 전에 회개하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죄가 있는 사람은 다시는 죄에 빠지지 맙시다. 그래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번영의 두 가지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피 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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