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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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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영웅들의 뒤를 잇는 신앙 릴레이>
오늘 봉독한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11장과 연결시켜서 읽어야 이해가 됩니다.
히 11장은 그 유명한 '믿음 장(章)'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정의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의 영웅들을 하나 둘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창세이래 영웅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계보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야곱, 이삭,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수많은 예언자들의 영웅적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 11: 32은 창세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믿음의 영웅들을
다 언급하려면 시간이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히 11: 33-38은 가능한 언어를 총동원하여
이들의 영웅적 믿음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를 정복했습니다.
사자의 입을 막는가 하면,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결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돌에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녀야 했습니다.
이들은 가히 믿음의 영웅들이요, 실로 믿음의 대표자들이라고 할 만 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영웅들의 일대기를 쭉 언급한 뒤
히 12장은 오늘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본문 1절의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란 바로 영웅적 믿음을 보였던
믿음의 선진(先進)들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우리의 신앙을 하나의 '경주'(競走)로 비유했는데,
특히 '이어달리기,' 즉 릴레이 경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한 믿음의 릴레이 바톤은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야곱, 이삭,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수많은 예언자들과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을 거쳐 마침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믿음의 계보를 잇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본문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신앙 릴레이에서 바라봐야 할 목표물은?>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의 영적 교훈을 상고하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소개한 믿음의 영웅들과 우리를 비교해봅시다.
우리는 과연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모세,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들은 가히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신뢰했는데 우리는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저나 아마 여러분들도 썩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웅들의 믿음에 비해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왜소하고 연약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믿음 때문에 고난받으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조금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주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얼마나 우리의 이득과 안전을 위하는지 모릅니다.
말 한마디에 시험에 들고 아무 것도 사소한 일 때문에 쉽게 걸려 넘어집니다.
하나님 생각보다는 우리 자신과 가족 등등 우리 것에 대한 생각을 훨씬 더 많이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엘리야의 믿음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이제 믿음의 릴레이 경주가 마침내 우리 차례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자세로 믿음의 바톤을 이어받아야 할까요?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의 경주를 해왔는데
우리는 그들에 비해 너무 부족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본받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너무 약하고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세속적입니다.
이제 우리 믿음의 선배가 우리 손에 건네 준 바톤을 손에 쥐고
뛰기는 뛰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뛰어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을 던질 때 본문 2절 말씀이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가 믿음의 릴레이 경주를 할 때 바라봐야 할 대상이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같은 믿음의 영웅들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갈 때 바라봐야 할 목표물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히 11: 39-40은 참 신기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과 같은 믿음의 영웅들이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는데
우리가 없이는 믿음의 영웅들도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없이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믿음은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 분명히 그 누구도 비길 데 없는 믿음의 영웅들이
분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보다 우월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영웅적 믿음보다 예수 그리스도 있는
우리의 왜소한 믿음이 훨씬 더 우월하고 완전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 제 아무리 위대한 영웅적 믿음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없는 저들의 믿음은 아직 희미한 그림자요 불완전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을 때,
예수를 통한 믿음이 예수 없는 저들의 영웅적 믿음보다 훨씬 더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지만
'자기 의(義)'(self-righteousness)에 사로잡힌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의 의나 공로에 의한 믿음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한 믿음이기에 더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해나갈 때 바라봐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인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늘 자주 넘어지고 연약하고 부족해도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의지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거룩하다 인정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개역 성경은 그 뜻이 불분명한데, 표준 새번역을 보면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the pioneer and perfecter of our faith)'로 번역해놓았습니다.
이 번역이 희랍어 원어 성경에 정확하게 합치합니다.
우리 믿음의 궁극적 대상은 예수님이신대, 이 예수님은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켜 놓은
창시자요, 우리의 믿음을 궁극적으로 완성시킬 완성자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 믿음의 릴레이를 시작하신 분이시며 궁극적으로 완성하실 분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켜 주신 믿음의 창시자요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켜주실 완성자이지요.
오늘 우리가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하고 믿음의 경주를 해나갈 때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신앙 경주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승리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여러 가지 어려움을 잘 참고 이겨내면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신앙의 릴레이 경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자,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요?
본문 1절 말씀을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여기에서 구름떼와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달리기 시합을 할 때 수많은 관중들이 지켜보듯이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이제 우리의 경주를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증인들 앞에서 믿음의 릴레이 경주를 펼쳐야 하는데 두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던져야 합니다.
달리기하는 선수에게 무거운 것은 무엇이든 해롭습니다.
운동복도 가벼워야 하고 운동화도 가볍고 경쾌해야 합니다.
하물며 우리의 신앙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속에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가진 채 달릴 수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고 죄는 그 모양이라도 다 툴툴 털어 버릴 때 잘 달릴 수 있습니다.

루시 그릴리(Lucy Grealy, 1963-2002)라는 여성이 쓴
「얼굴의 자서전」(Autobiography of a Fac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여성은 턱과 뼈와 뺨에 생긴 암 종양 때문에 많은 수술을 했습니다.
자그마치 서른 번이나 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굴이 자꾸만 일그러져 아주 보기 흉해졌습니다.
한국의 선풍기 아줌마처럼 얼굴모습이 흉해졌던 것이지요.

그 때부터 이 여자의 소원은 새로운 얼굴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마다 다 자기보다 잘 생기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항상 열등감과 수치심에 시달리다보니 자연 사람들을 피하게 되었고
어쩌다가 외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머리카락을 얼굴 쪽으로 쏠리게 해서
흉한 얼굴을 가렸으며 반드시 모자를 쓰고 다녔습니다.

그릴리는 점점 왕따가 되어 갔고 정신 상태는 불안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새 얼굴 갖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던 그녀가 삼십대에 접어들었을 때
마침내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은 새 얼굴이 아니라 새 마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마음만 바꿀 수 있다면 그녀는 흉한 얼굴을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 속에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신앙경주를 방해하는 죄가 있습니까?
다 벗어 던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가벼운 마음과 몸으로 신앙 경주에 우승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둘째로, 인내함으로서 경주해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에게는 인내가 제일 중요한 덕목입니다.
42.195 km나 되는 긴 거리를 뛰어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완주(完走)하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우승하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에도 이를 악물고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날씨가 무더워 땀을 뻘뻘 흘릴 때에도 그저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잘 참고 이기는 사람이 마라톤 경주에 우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일생 동안 지속해야 할 문제입니다.
어느 순간 반짝하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생활 하다보면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도 있고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도 있습니다.
날씨가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오는 궂은 날도 있을 터이고, 화창한 날씨도 있을 것입니다.
나쁜 일도 있고 좋은 일도 있습니다.
괴롭고 슬픈 일도 있고 즐겁고 기쁜 일도 있습니다.
여하한 일을 만나도 잘 참고 이기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성미가 급한 사람들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뭐든지 "빨리 빨리" 처리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하이텍이 지배하는 인터넷 시대에 빨리 처리하는 것은 경쟁력을 높이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빨리 빨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끝까지 잘 참는 사람이 최후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경주를 해나가실 때 잘 참으십시오.
하루아침에 승부를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꾸준히 잘 참아내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내가 누군 지는 알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이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 )의 새 양복」에 얽힌 실화 하나를
소개해 드림으로서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2000년 1월, 빌리 그레이엄의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의 샬롯(Charlotte)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그레이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만찬에 초청했습니다.
그 당시 그레이엄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거절하려고 했지만
샬롯 마을의 지도자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뭐 대단한 연설이 아니라
그저 여기 오시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해서 수락했습니다.

환영 만찬에 참석한 그레이엄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앨버트 아인슈타인 박사님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한 번은 프린스톤에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을 때, 차장이 차표 검사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 차례가 되었을 때 이곳 저곳을 아무리 뒤졌지만 차표를 찾을 수가 없었답니다.
가방도 뒤져보고 의자 밑도 샅샅이 살펴봐도 도무지 차표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차장이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을 모를 리 없어서,
'박사님, 저는 박사님이 누군지 잘 압니다. 차표 안 보여주셔도 괜찮습니다.
박사님은 틀림없이 차표를 사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냥 두세요!"

차장은 계속해서 열차 복도를 다니며 차표에 펀치 구멍을 뚫어서 검표할동을 했습니다.
차장이 다음 열차간으로 막 옮겨가려고 하는 순간 아인슈타인 쪽을 보니
아직도 의자 밑을 뒤지면서 차표를 부지런히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차장이 부리나케 아인슈타인에게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박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박사님이 누군지 잘 압니다. 
저에게 차표 안 보여주셔도 저는 박사님을 믿습니다. 차표 찾지 마세요!'

이 때 아인슈타인이 차장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젊은이, 나 역시 내가 누군 지는 잘 안 다네.
그렇지만 내가 차표를 찾기 전까지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를 알 수 없다네!'

빌리 그레이엄이 계속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입고 있는 이 양복을 좀 보세요.
이 양복은 오늘 이 환영 만찬을 위해 새로 산 양복입니다.
제 아내나 자녀들, 손주들이 늘그막의 제 모습이 꾀죄죄하다고 해서 이 양복을 새로 샀답니다.
그런데 이 양복은 오늘 이 환영 만찬뿐만 아니라 다른 또 한 가지의 행사를 위해서 샀답니다.
그 다른 한가지가 뭔지 아십니까?
제가 죽어서 땅속에 묻힐 때 이 양복을 입으려고 샀습니다.
[미국인들은 죽어서 입관할 때 가장 아끼고 보기 좋은 옷을 입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가 입고 있는 이 양복을 즉각 떠올리지 마시고
오직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뿐 아니라
제가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예비하시는 아름다운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 경주의 목표와 목적지를 분명히 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김 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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