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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주일] 신앙의 목적을 회복하자 (마 1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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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례 요한의 삶에 대한 잘못된 평가와 잘못된 관심이 퍼져 나갔다.

마태복음 3장은 세례요한의 삶을 증거합니다. 그가 황량한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라고 외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음식으로 삼으며, 그 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서, 열심히 외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세례 요한을 보기 위해 무리지어 세례 요한에게 나아갔습니다.

마 3:5에 보면,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라고 표현합니다. 거의 모든 무리들이 세례 요한을 만나러 광야에 나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 11:2에 보면 그렇게 “회개하라”고 외쳤던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습니다. 무리들은 이러한 세례 요한에 대해서 잘못된 평가를 내렸습니다. 마 11:18에 보면, 귀신들린 자라고 평가받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세례 요한을 만났지만 세례 요한에 대한 잘못된 평가로 인하여 무리들은 세례 요한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무리들이 세례 요한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 왔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무리들의 세례 요한에 대한 관심이 정확한 곳에 집중 되었다면 예수님의 복음 전파가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의 관심들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잘못된 관심이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 번의 반복되는 질문을 통해 무리들의 잘못된 관심을 지적하십니다.

2. 갈대처럼 나약하고 지조가 없는 자를 보러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첫째로 예수님은 마 11:7에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묻습니다. 무리들이 다 알고 있는 “그 광야”에 나간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원문에 정관사가 붙은 “그 광야”는 바로 세례 요한이 활동한 곳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들이 다 알고 있는 “그 광야”입니다. 모두가 한 번쯤 나가 보았던 곳이기에 알고 있는 “그 광야”입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 회개의 말씀을 선포한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곧잘 지조가 없고, 우유부단하며, 나약한 모습에 빗대어 표현됩니다. 허약한 모습이나, 안정감이 없는 불안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변덕스럽고 연약한 사람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갔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진 한 사람을 찾기 위해 광야로 나갔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분명했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 요한의 외침은 강력했고,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감옥에 갇히는 자가 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요한의 회개는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일방적인 요구였습니다. 생명은 오직 한 길에만 있기에 일방적인 요구를 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외침을 듣기 위해 모두가 그 광야에 나간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답은 이미 “아니오”였습니다.

만약 첫 질문에 “네”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단지 구경꾼이었을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본인에게는 연약한 현실이지만 구경꾼에게는 멋있는 구경거리입니다. 광야 갈대숲의 흔들거림은 보는 이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입니다. 아마 그 광야에서 제일 멋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 광야의 중심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의 목소리였습니다. 무리들 중 누구도 이 질문에 “네”라고 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들립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갔더냐”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연약한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을 기념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나왔습니까? 능력도 없고, 권세도 없고, 지조도 없는 예수를 보러 나왔습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구경하러 나왔습니까?

여러분은 교회 건물의 멋있고, 웅장한 모습을 보러 나왔습니까?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과 경건하고 무게 있고, 품위 있는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러 나왔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우리들의 답변도 당시의 무리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분명히 “아니오”입니다. 우리도 분명히 연약한 예수를 구경 온 자들이 아닙니다. 언제나 변함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3.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 두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질문을 통해 무리들의 시야를 강력한 선포자 세례 요한에게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마 11:8에서,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러 나갔느냐고 묻습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서 높은 지위를 얻고, 대접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둘째 질문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나갔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의지처가 되는 사람들을 만나러 나갔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광야에 있는 세례 요한을 만나러 나간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만을 음식으로 삼으며 지낸 볼 품 없는 몰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리들은 그를 만나러 광야까지 나갔습니다. 결코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세례 요한을 만나러 나간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에 대한 무리들의 대답도 이미 “아니오”였습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둘째 질문도 지금 우리에게 내려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을 만나려고 교회에 나왔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기에 만나러 나온 것입니까? 인격적으로 훌륭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오신 것입니까? 물질적으로 풍성하신 분이기에 만나러 나오셨습니까? 세상에서 많은 유익을 주실 수 있는 분처럼 보여서 나오셨습니까?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도 분명합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동일하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 광야와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4. 세례 요한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것을 알 때 만남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세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마 11:9에서,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자니라” 라고 하십니다. 무리들은 세례 요한을 구경하기 위해 광야에 나간 것도 아닙니다. 또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광야에 나간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셋째 질문에서 왜 나갔는지 그 이유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대답을 하십니다. “선지자를 보려더냐?” 무리들이 선지자를 보러 나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중에 뛰어난 선지자 한 분이 나타나신 것으로 알고 만나러 나간 것입니다. 뛰어난 선지자 세례 요한을 만나러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맞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무리들에게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무리들이 광야에서 만난 세례 요한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밖에 인식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인식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만나러 나간 것은 좋았으나, 그를 잘못 알고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무리들이 세례 요한을 잘못 알고 잘못 받아들였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무리들이 세례 요한이 누구며, 그가 행한 사역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정확히 알았다면 예수님을 쉽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11:9b-15에서 세례 요한을 자세히 소개하십니다.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라고 소개하십니다. 말 3:1을 인용하여, 마 11:10에서,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고 소개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모두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직접 메시야의 길을 바로 앞에서 안내하는 자였기에 다른 선지자보다 나은 자입니다. 말 4:5에 예언된 선지자로서 오리라고 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입니다. 그래서 마 11:11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십니다.

메시야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는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였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인 것을 모르고 그를 만나러 광야에 나갔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선포하는 것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임도 모르고 만나러 나간 것입니다. 무리들이 세례 요한에게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그것이 메시야와 어떻게 관계되는지 모르고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이 열심히 사역을 했음에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이제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기까지 하자 요한에 대한 평가는 더욱 나빠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가 닦아 놓은 길에 장애물까지 설치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 번의 질문을 통해 그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세 번째 질문도 지금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교회 속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유익을 안겨주실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이라는 분을 만나러 나온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베푸신 크신 사랑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기까지 하신 그 사랑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 되시고, 속죄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이 헛수고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야 한다.

지금 이 시대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교회에 나옵니다. 이들은 무능력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벌이는 구경거리들을 보러 나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구경거리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로 떠돌아다니기도 합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교회, 경치가 좋은 교회, 환경이 좋은 교회, 사람들의 구성원이 마음에 드는 교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교회, 교육적으로 좋은 교회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첫째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갔더냐?” 예수님은 이 첫 질문을 통해 구경거리를 찾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헛수고를 지적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언제나 변치 않고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중에는 구경거리만 찾는 헛수고를 하시는 분이 없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또한 자신의 정치적이고, 물질적이며, 세상적인 각종 유익을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함께 누릴 자들을 찾아 교회에 나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승리를 위한 연줄을 찾아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돈과 명예가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위해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둘째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갔더냐?” 예수님은 이 둘째 질문을 통해 인간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자들의 헛수고를 지적하십니다. 우리들 중에는 이러한 헛수고를 하시는 분이 없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평가 속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알고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화 중의 한 인물로 알고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도깨비 방망이 정도로 알고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을 위한 종과 심부름꾼 정도로 알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셋째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갔더냐?” 예수님을 인간을 위한 도구나 들러리 정도로 알고 나오는 사람들의 헛수고를 지적하십니다. 우리들 중에는 이러한 헛수고를 하시는 분이 없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속죄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고 교회에 나와서 이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만이 천국을 침노하는 자로서 천국 백성이 됩니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누리는 자로서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됩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들은 세례 요한보다 큰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세례 요한보다 큰 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천국을 누리는 자입니다.

6. 이제는 교회에 나오는 목적과 신앙의 목적을 회복할 때이다.

우리들도 이제는 교회에 나오는 목적을 분명히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을 회복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세 질문을 통해 그것을 명확히 하시기 원하십니다. 교회에 구경하러 나오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능력의 주님을 능력이 없는 주님으로 알고 구경꾼에 머물지 않기를 원합니다. 구경꾼으로 떠돌이 성도가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곳이 아닙니다.

또한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돈과 명예를 취하려고 나오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세상적인 즐거움을 누리러 나오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세상적으로 화려한 인생을 살려고 나오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인생은 교회밖에 가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오직 교회의 중심에 우뚝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영원한 멸망의 형벌, 곧 지옥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교회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서 교회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구원받은 기쁨 속에 구원받은 감격 가운데 교회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로 향할 때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시야의 중심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오십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나오십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나오십니까? 오직 구원의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오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천국을 침노하여 천국을 누리는 자입니다. 세례 요한보다도 큰 자입니다. 예수님은 마 11:12에서,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를 분명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이 시기는 교회에 나오는 우리들의 목적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시는 때입니다. 이 시간에 그 목적을 찾고 확신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나오는 목적을 회복하는 것은 곧 신앙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기독교의 변질과 타락은 개인의 신앙의 목적이 변질될 때부터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개인의 신앙의 목적이 회복될 때부터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이 회복될 때 우리의 신앙적인 삶의 모습들이 회복됩니다. 이러한 회복의 삶은 매년마다 점검되어야 합니다. 매년마다 절기를 정하여 신앙의 목적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구경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을 우리 욕심의 도구로 삼기 위함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 우리 신앙의 목적을 회복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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