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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보려는 자리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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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젠돌프라는 청년은 젊은 시절에 여행을 하다가 어느 시골 미술관에 들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림을 보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해가 지고 미술관의 문을 닫아야 하기에 미술관을 지키는 아저씨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치는 순간 그는 정신을 차리고 그곳을 떠났다. 그때 그는 울고 있었고 피를 흘리며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 완전히 변화되어 있었다.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모든 재산을 다 팔아 수많은 선교사를 보내어 예수의 은혜를 전하는 모라비안 교도소의 아비가 되었다.

예수를 본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봄으로써 사람의 생애에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젠돌프는 예수를 그림으로 보고도 변화되었다. 오늘 우리도 예수를 어떤 모습으로든지 보기만 한다면 이대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를 보고자 한다는 것은 예수를 만난다는 의미이다. 지나쳐 가는 것으로 만난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면한다는 말이다. 여기 예수를 보고자 한 사람이 나온다. 바로 삭개오이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였고 결국 그 보고자 하는 마음이 뽕나무에 올라가게 하였고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눅19:8 삭개오는 자기 집에 찾아오신 주님 앞에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완전히 변화된 삭개오의 신선한 고백 앞에 예수님은 눅19: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중요하다. 누구든지 보고자 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은혜와 구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여기 삭개오를 보라. 예수님을 보고자 하여 어떻게 하였는가?

첫째, 하던 일을 중단하였다. (눅19:2)

눅19:2을 보면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적고 있다. 삭개오의 직업이 세리장인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세금을 거둬드리는 세무 공무원이요 세무 서장임을 알 수 있다. 세리가 되는 일은 특별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동족들의 세금을 거둬드려 로마로 상납하고 그 중에서 자신의 삶을 위해 적당히 착복을 하는 이들이 세리였다. 세리는 동족들에게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직업이지만 보이는 곳에서의 권리가  당당하였다. 삭개오는 바로 이런 사람의 장이었으니 얼마나 돈과 착취와 상납과 물질적 이권에 철저한 사람이었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곳으로 달려나갔으니 그는 하던 일을 중단한 것이다.

삶의 변화를 위해 중요한 것은 하던 일을 멈추어야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곳으로 가게 된다. 자기가 하던 일을 끝장내지 않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은 신앙의 우유부단이고 다른 사람의 흉내내기이다. 거기에는 은혜가 임할 수 없고 구원도, 변화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리러 왔다. 예배 드리러 온 것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예배당 안에 들어와서도 하던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마음으로, 공상으로 하던 일을 계속한다면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다. 하던 일을 중단해야 한다. 예배 드리는 자리에서 핸드폰을 계속 켜 놓고 있다. 사업장에서 와야 될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자세가 바로 하던 일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예배 후에도 어서 다른 볼일을 보겠노라고 예배하는 시간의 시간만 재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를 보는 은혜를 원한다면 하던 일을 중단하라.

미국의 백화정의 왕 존 워너메이커는 미 상공부 장관에 임명받았을 때, 조건을 내 걸었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릴 수 있도록 주일을 허락하지 않으면 장관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예배 드리는 일은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하는 일이기에 예수를 보려는 자는 반드시 하던 일을 중단해야 한다.

둘째, 장애물을 뛰어 넘는다. (눅19:3)

눅19:3 삭개오는 예수를 보고자 하였으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었다고 기록한다. 예수를 보고자 하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삭개오에게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지닌 약점인 자신의 타고난 장애물이었다. 즉 그는 키가 작았다. 키가 작아서 사람들 틈에서 시야가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장애물은 바로 자기 밖에 있는 상황이었다. 즉,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를 보기 어렵게 되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삭개오에겐 장애물이었다.

그때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려는 마음, 예수를 보려는 마음을 꺾어버린다든지, 찢어버리지는 않았다. 할 수 없게 만드는 나의 장애물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장애물을 뛰어넘는다. 눅19: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하였다. 예수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장애물이 어디에서 기인하였든지 간에 그 장애의 원인들을 내세워 핑계대선 안된다. 장애물 앞에서 자포자기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앞으로 달려가 보려고 하자. 은혜를 받으려고 예배당에 왔는데 사람들이 내 자리라고 주장하며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별로 친절하게 대접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역시 활달치 못하여 사람들의 눈총이 예민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예수를 보러 왔다가 한달 만에, 반년 만에 포기하는 이들이 때론 있다. 그러나 뛰어넘어야 한다. 예수를 보게 되면 은혜가 임하고 구원이 임하고 변화가 임하기에 사단은 나의 약점과 생각과 태도를 건드린다. 말을 통해 건드린다. 주변 환경을 이용해 주저앉게 만드는 장애물을 쌓아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달려가라.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곳으로 더욱 나아가길 힘쓰라. 장애물을 뛰어넘어 가로 막는 것을 부숴버리고 나아가자.

셋째, 세상적인 것을 모두 포기하고 도전하라. (눅19:4)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갔다. 왜 올라갔을까? 눅19:4을 보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고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는 예수를 보기 위하여 만날 수 있는 자리를 향해 나아갔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상상도 하지 않는 장소로 나아갔다. 뽕나무에 올라가면 아무런 장애도 없이 예수를 쳐다볼 수 있기에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이 뽕나무로 찾아간 모습은 얼마나 삭개오가 예수를 보고 싶어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예수를 조금 보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그저 구경 삼아 보려한 것도 아니다. 삭개오는 예수 보는 일이 그의 모든 것의 우선이었다. 뽕나무에 올라가는 이 적극성은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를 만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포기하고 시도한다는 의미이다.

1. 사회적 지위를 포기한 것이다.
세리장이란 사회적 지위를 붙잡고 있다면 뽕나무에 올라가지 않는다. 예수를 보는 일이 더 중요하기에 세무 소장이란 직위를 고려하지 않았다. 계급장 따위는 예수 만나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게 여긴 것이다.

2. 체면을 포기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체면을 중요시한다. 유교 문화권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면을 위해서 허례 허식 문화가 있다. 삭개오라고 해서 그 얼굴에 손가락질 당할 일을 수용할 수 있겠는가? 어른이 뽕나무를 타고 올라가 있으면 조롱의 대상이 된다.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예수를 보려면 볼 수 있는 장소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조롱이나 멸시나 체면이 문제될 수 없다. 예수가 더 중요하다. 예수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삶이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은혜와 구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면 체면이 무엇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기 위해 업신여김을 받는 모든 일을 오히려 짊어지고 행동하였다.

3. 약점을 감추려는 위선을 포기한 것이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다. 그런데 그가 뽕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키가 작기 때문에 올라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권세도 있고 돈도 있으나 만족하지 않기에 행복을 찾아서 올라간 것이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못남과 자신의 공허한 삶과 자신의 키가 작은데서 오는 열등감의 삶을 뽕나무에 올라감으로 오히려 나타낸 것이다. 지난 날을 숨기고 살고 싶어 악착같이 부자도 되고 세리장도 되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나는 못난 인생이다. 키가 작은 인생이다. 시위하게 된 셈이다. 예수를 만나고 예수 보는 것이 더 내 일생에 특별한 사건이기에 삭개오는 약점이 알려지는 것을 문제 삼지 않고 은혜의 자리로 접근하여 기어올라간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보고 만나는 은혜의 생활을 위해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장소를 업신여기지 말라. 시1:1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자기를 구별하여 앉는 것이 복 있는 길이라 하였다. 출25:22을 보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이을 네게 이르리라" 이 말씀을 보면 '거기서 만나고' 즉 만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심을 믿는다. 그렇다면 특별한 장소가 왜 필요한가? 그러나 하나님은 굳이 장소를 정하여 성소를 만들게 하시고 그 성소로 자기 백성을 나아오도록 명령하신다.

성경의 시대에도 우리에겐 은혜의 장소가 구별되어 있다. 아무데서나 주님을 볼 수 있는 시대요, 그 얼굴의 도우심을 구하는 시대이지만 장소의 구별은 아직도 신앙에 있어 소중하다. 눈을 맞고 걸으려면 눈 내리는 날, 야외로 나가야 하듯 예수를 보려면 자리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가끔 기도하는 자리를 찾고 계신다.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사 기도하신 막1:35과 눅5:16의 의미는 주님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간 것이 아닌가?

우리도 삭개오처럼 그 자리를 찾아 나아가야 한다. 21세기 이 시대에도 예수를 볼 수 있는 자리, 그 뽕나무로 기어올라가는 자리는 지금도 요청되는 것이다. 예수를 보기 위해서라면 지위도, 체면도 포기할 수 있고 약점도 공개되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예배당에 나와야 한다. 바쁜 일도 포기하고 시간 없음을 포기하고 회사 일도 포기하고 예수를 보려는 단 하나의 마음으로 나온다면 나의 있는 자리는 뽕나무의 자리인 것이다. 사모하는 마음의 자리를 정말 준비한 것이다. 바로 그런 자리에 머물러 예수를 보려 하면 눅19:5의 말씀처럼 예수는 먼저 나를 바라보시고 예수가 먼저 말씀해 주시고 예수가 먼저 삭개오의 집에 들어오시며 마침내 구원을 선포해 주실 것이다.

만남의 자리를 준비하자. 매일, 매주 그냥 나오지 말라. 예수를 기필코 보려고 만나려고 오라. 다 포기하고 다 뒤로 하고 앞으로 달려 나오라.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히 준비되어 교회에 나아오라. 영적으로 뽕나무에 다 올라가는 오목천교회 성도가 되자. 그러면 당신의 걸음이 달라진다. 집에서부터 달라진다. 당신의 앉는 자리가 달라진다. 당신의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당신의 듣는 귀가 달라진다. 당신의 태도와 생각이 주를 향한다. 그러면 당신의 삶 속에 은혜가 임하고 즐거움과 기쁨이 주어지고 거기서 구원 얻은 아브라함의 자들이 된다. 그러면 가정도 변화되고 교회도 변화된다.

스펄젼 목사는 어느 추운 겨울날 작은 집회소에서 단지 주를 바라본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그 말씀 앞에서 신문지를 바라보듯 바라보라는 단순 초청 앞에서 예수를 집중하여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은혜를 받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를 보려 하자.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열심으로 만나는 자리를 준비하자.
(김철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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