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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할 때와 찬송할 때 (약 5: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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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하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10월 첫 주일 여러분과 함께 예배하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부터 다시금 야고보서의 나머지 본문을 중심으로 몇 주간 동안 설교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지만 두 주간 전부터 설교를 하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설교를 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성경주제설교와 본문강해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3년 가까이 주제설교를 주로 해왔습니다. 주제설교란 우리가 알고 싶은 주제를 따라서 하나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를 살피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관심사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식입니다.

그러다 두 주간 전부터는 본문강해설교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주제 중심에서 선택한 본문을 따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그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오늘 우리 상황에서 듣는 것입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5장 12절부터 살필 차례입니다. 특히 12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지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나와서 앉아있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주제로 말씀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어서 더욱이나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제가 늘 아내로부터 말을 잘 안 듣는다는 비난을 받곤 합니다. 어떤 책을 보니 “말을 들을 줄 모르는 남자 지도를 읽을 줄 모르는 여자” 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게 남자들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말을 할 때 잘 들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듣긴 듣는데 그 말을 잡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복잡한 우리 생각을 내려놓고, 다급한 우리 처지를 잠깐 밀쳐두고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어하는가 거기에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한번 들어보려고 마음을 먹고 나아와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느 인생 노정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길에도 항상 햇빛만 비취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서 예상치 않는 보너스를 받기도 하고 파업을 해도 해결점을 찾기가 힘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구절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잠깐 오늘 이 말씀이 위치한 문맥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4장 1절부터 5장 6절까지는 엄한 질책의 연속이었습니다. 책망하는 말이 줄줄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5장 7절부터는 어조가 바뀌어 따뜻한 동정과 충고의 말로 바뀝니다. 5장 7절 이하를 살펴보면 우선 나그네 삶의 시련 가운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들어내지 않는 마음속의 불만까지 금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나그네 삶의 여정에서 상호 비난이나 성급한 막말을 금하라고 교훈합니다.

그러나 “말라” “말라”로 계속되는 충고는 사람들을 위축시키기 쉽습니다. 하지 말라고만 자녀들에게 말해야 될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되는지 균형을 이루는 명령을 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본문은 적극적인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라’ ‘찬양하라’ ‘죄를 고백하라’‘진리를 떠난 자들을 돌이켜라’ ‘가서 그들을 권면하라’고 성경은 명령합니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사람이 갖고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좋은 말을 하도록 주신 입을 잘못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상호 비난하고 정죄하고 막말을 하는 잘못에 빠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입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안은 그 입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함께 기도하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보다는 너희 죄를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냐? 뿐만 아니라 곁길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대신 제자리로 돌이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하라’의 적극적인 명령 두 가지를 살피겠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 하라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하라.” 여기에서 “고난” 당한다는 말씀은 앞에 10절의 말씀과 맥이 통합니다.

1. 고난당하는 성도들은 기도하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본문이 말하는 고난은 어떤 고난입니까? 그것은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이 당했던 그 고난과 오래 참음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주의 이름’으로 말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했기에 그들은 어려움을 당했고, 오해를 받았고,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난 중에 있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지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신약 복음 전도자가 감내해야 할 고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겪는 고난이 찾아온다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본질상 변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개인은 회심한 적이 있지만 세상은 하나님께로 돌아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신약의 사도들을 미워했던 것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은 이방으로부터 받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은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고난이었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고난 받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것이 사도의 교훈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그러했고 신약에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사도들도 마찬가지 길을 걸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사도시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몫입니다.

2000년 교회 역사를 보면 종종 되풀이 되는 일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말씀대로 살기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속화된 교회에 의해서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지난 한 주간 총회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여러분들은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어두워지면 그런 일들을 자행해 왔다는 것이 역사의 증거입니다.

때로는 복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상해야만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 사이의 여러 가지 오해와 조롱때문에 고통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지니라.”고 야고보 선생은 말합니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승리하는 비결은 상대방을 향해 원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갖가지 오해를 만나서 한번 풀어야지 해서는 진정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성급한 생각에, 분한 마음에 다이얼을 돌리고 싶지만 그것 보다는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무릎 꿇기에 앞서서 우리는 말하고 싶어 하고, 기도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전화기를 들고 싶어 합니다.

이것만은 만나서 꼭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에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하라고 성경은 권합니다. 그러면 그 말하고 싶은 욕구도 잊고 하나님께 이럴 때는 기도해야지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택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만나서 한판 해?” 그 쪽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래 그보다는 내가 기도해야지”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로 결단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거기에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오해를 극복하는 것은 맹세와 막말을 내뱉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 교회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구역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것 가지고 마음에 부담을 안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여러 가지 고난들이 있습니까? 일단 먹지 못하는 사람은 배고픈 것도 고통 입니다. 굶주림의 고통 그것이 안 겪어봐서 그렇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먹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사는데 여러 가지 힘든 관계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잠언서는 “고기와 생선이 가득한 상에 둘러앉아도 서로 불화하면 마른 빵, 식은 밥 한 그릇만 갖고도 화목하는 것만 못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시험에서부터 출발해서 오늘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거기서부터 출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고난의 문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누굽니까? 신약교회의 아버지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야곱이 구약 열두 지파의 어른 노릇을 했던 것처럼 야고보, 그는 초대 예루살렘 모 교회에서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편지를 하는데 사람들이 당하는 가장 일반적인 문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 할 찌니라” 다시 고난의 문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사는 날 동안에 끝나지 않습니다. 실낙원의 첫 걸음부터 고난의 발걸음이었지만 천국에 입성하는 순간 까지도 우리를 괴롭히는 시험과 시련의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문제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문제가 없으면 그건 착각이죠. 완벽한 교회가 보이면 그곳에 가지마라 그랬습니다. 왜냐면 가서 여러분이 실망할 것이고 우리처럼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에 끼어들면 그곳도 풍비박산 날것이기 때문에 들어가지 말라고 누군가 그렇게 말합니다. 세상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가 하는 것이 교회와 교회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문제되는 사람을 지목해서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다 왕따시키면 어떻게 그 구역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같이 앉아있어 보면 이 그룹이 나를 환영하는지 나를 밀쳐내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데는 IQ가 특별히 필요한건 아닙니다. 다 압니다. 어린 아이들도 알고 연세가 든 노인들도 압니다. 그렇게 문제 있는 사람을 배제하고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자꾸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다 보면 나중에는 한 주먹 밖에 안 남습니다. 그 사이에도 화목이 안 됩니다. 정신의 문제, 태도의 문제입니다. 문제가 생길 때는 잘라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기도하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민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지니라.”

여러분의 당면한 고난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물질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정신적인 고통입니까?  육신적이든 정신적이든 우리에게 닥친 고통과 고민은 기도의 부름입니다.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내기 위한 기도의 기회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만들어 내는 인내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온전한 인내가 영글게 되면 원만한 신앙 인격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그 때 여러 가지 부족으로 가득한 핍절한 삶입니까?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날을 지새우는 이에게는 우스워보입니다만 여러분도 몸을 가졌으니 먹지 못함이 입지 못함이 무엇인지 느낄 것입니다.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내기 위한 기도의 기회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만들어 내는 인내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온전한 인내가 영글게 되면 원만한 신앙 인격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보는 순간부터 뭔가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이 차를 타는 순간부터 나는 여기에 거룩한 무엇인가를 느꼈습니다.

이번에 일본 단기선교 갔는데 가이드 두 사람이 다 신앙으로 돌아오겠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사람은 이전에 신앙생활 하다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돌아와야 되겠다고 했고 또 한 가이드는 일본 안내가 바쁜 게 아니고 자기 안에서 일어난 간증한다고 2호차를 전부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말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뭔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야 정상이지 않겠습니까? 일본 선교여행이 아니라 가이드를 위한 전도여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희 중에 괴로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지니라.” “너희 중에 아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지니라.” 고통과 고민은 기도의 처소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손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을 나타낼 절호의 찬스가 기쁜 순간보다 오히려 고통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평안할 때는 너나 나나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수없는 고통이 줄줄이 들이닥칠 그때에 신앙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통의 순간, 고민의 순간에, 오해를 받는 괴로운 순간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부은바 된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분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쳐 저주하는 것 보다, 도무지 참을 수 없어 맞닥뜨려 해명하는 것보다, 아니 다이얼을 돌려 성급히 해명을 요구하는 것보다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세상 사람들처럼 반응하고 싶어 하는지 모릅니다. 그저 나하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 성토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의 도화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간곡한 기도에로의 초대를 팽개쳐 버릴 때가 있습니다.

시험을 맞이하는 주님의 모습은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라고 합니다. 기도로 몰아넣는 것을 느끼면서도 기도 안하고 버티는 것 옳은 일 아닙니다. 이제는 달리 방안이 없다고 생각하면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벽에 부딪혔는데도 주저앉아 기도 하지 않습니다. 무슨 다른 길이 없나하고 생각을 하고 또 부딪힙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력이 없어지면 그제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나 같으면 그런 기도 절대 안 들어 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때 와도 들어 주신다는 게 그게 차원이 다른 사랑의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생명, 사랑, 나눔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함께 기도하면서 “울산에서 정말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십시오”기도해야 됩니다. 간절히 소원하지 않으면 우리가 저절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물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필요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삶에 수용하기 위해서는 겟세마네의 통곡이 그분에게도 필요했는데 죄악 가운데 태어난 우리가 눈물 흘리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50주년을 맞이하는 교회에서 해야 될 일은 사실은 리노베이션이 최우선 과제는 아닙니다. 정말 바라기는 우리 안이, 그리고 우리가 모이는 공동체가 하나님이 보실 때에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안팎으로 금을 칠한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깨끗한 마음, 정말로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는 사람들, 그런 교회를 원하고 계십니다.

고통의 순간 시험을 맞이할 때에 주님은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년 동안 한솥밥 먹고 같은 이불 덮고 살던 제자들이 떠나가는 그 시련의 순간에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 고통의 순간에 ‘더욱 간절히’기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상황의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답답한 마음이 들면 그것이 구역문제일 수도 있고 그것이 공동체 전체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신호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억울하고 답답할 때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이 세상의 소금, 빛으로 처신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늘의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고 들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은 그날 이후 항상 유효한 초청입니다. 어떤 삶의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과 저는 예수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어떤 고통이라도 좋습니다. 어떤 고민이라도 좋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보좌로 나아가 아룁시다. 그분의 보좌로 향하는 길은 열려 있습니다. 항상 그분의 눈은 자기를 찾는 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항상 그 팔을 우리를 향해 벌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님이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활짝 열린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순간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며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또한 즐거워하게 됩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험하여도”를 찬송했던 성도는 자기의 세 딸을 수장시킨 가장 고통스런 그 해역을 지나면서 그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라고 했던 찬송은 일들이 잘되는 가운데서 불렀던 찬송이 아니라 역경에 처했을 때에 지었던 찬송입니다. 시카고 대 화재에 그 많은 재산 다 날려 버리고 아내와 세 딸을 유럽에 휴가로 다녀 오도록 보냈는데 그 뱃길에 난파해서 딸 셋이 물에서 죽고 유럽에서 아내가 전보를 보내왔습니다. 건너오라고. 그 딸들이 죽은 그 바다를 지나면서 “내 평생에 가는 길 험하여도 늘 잔잔한 강 같은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상관없이 내 영혼이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2. 줄거워하는 성도들은 찬송하라!

그러나 우리 본문은 또 다른 상황을 설정합니다. 같은 교회 성도들이지만 그 가운데는 또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기도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니 기도 조차도 안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는 항상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햇빛이 내려 비칠 것입니다. 계속 빗방울을 뿌리면 비가 언제 그치나 하고 조바심을 내지만 비는 반드시 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의 햇살이 온 누리를 채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수놓아 가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암울한 단색으로 전체를 채우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슬프고 괴로운 것은 순간이요 훨씬 더 많은 날들을 기쁨과 만족의 그 은혜의 해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그때 아름다운 감사와 찬송을 부르는 자입니다. 보십시오 그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나가면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려운 일 닥치면 그 잊고 살았던 하나님을 떠올려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무슨 낯을 가지고 그러는지.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을 한번도 떠올리지 않던 사람이 고통당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억해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곤 원망을 합니다.

성도는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래서 가장 기쁜 순간에는 찬송합니다. 괴로운 순간 그 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그뿐 아니라 가장 기쁜 순간에는 찬송으로 그분께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해도 고통의 순간에 나아가 아뢸 수 있는 하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 새생명 훈련생 40명을 면접 하면서 보니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까지도 이번에 들어왔더라고요. 그런데 보니까 교회 나와서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를 물어보면 다 거기에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답답하면 나가서 부르짖을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자식이 이해해 줄 수 없고 부모가 보상해 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늘아버지가 내게 있다는 것이 그게 특권 아닙니까? 가장 힘든 순간에도 아버지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의 순간에도 역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원망과 막말 대신 그 입술을 기도와 찬양으로 채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한 자 마다 그 마음이 하늘을 향해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엄청 기쁜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설교자인 저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생각나도록 확인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1세기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들과 함께하고 있는 성령님의 임재로 인해서 그 마음마다 샘솟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찬송하는 교회였습니다. 기도만큼이나 찬송은 기독교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등록상표입니다.  자신을 성도로 여기는 자들은 기쁜 순간에 찬양에 함께 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찬송할 이유를 저마다 분명히 알게 될 때 교회는 찬송하는 교회가 됩니다. 찬양하는 순서가 특별히 프로그램에 주어져서가 아니라 찬양하는 교회가 된 것은 화려한 성가대를 갖추어서가 아닙니다.

국민 위화감을 낳을 만큼 수천, 수억을 들여 파이프 오르간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초대 교회가 찬양하는 교회로 역사의 기록에 남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이 생생한 가슴속 찬송의 음률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러 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 -그것이 찬송하는 교회를 만듭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가슴속에 그리스도 예수가 얼마나 좋은 분인지 다가오게 될 때에 교회는 찬송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못해 부르는 찬송만큼 하나님이 들으시기 역겨워하는 찬송은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서 넘쳐나는 주를 만난 기쁨 그것이 찬양의 도화선이 되어야 합니다. 혼자 있을 때도 찬양의 음률이 흘러나오고 함께 모이면 합창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만큼 합창대가 빵빵한 단체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어떤 교회는 앞에 앉아 있는 교인들보다 옆에 앉아있는 찬양대가 더 많습니다. 그렇게까지 꼭 해야 될까 싶기도 합니다. 저희는 백오륙십명 될 때까지 찬양대를 별도로 조직을 안했습니다. 다만 성탄 때나 부활절 되면 온 교인이 악보로 준비해서 찬양했습니다. 찬미라는 선교단체의 외국 대표가 와서 참석해서 그러더군요. 자기가 여러 교회 가봤지만 전 교인이 찬양하는 교회는 처음 봤다고 말이죠.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는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는 사람들은 소위 말해서 제2 세대 크리스천들입니다.

직접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여러분이나 저처럼 예수를 눈으로 본적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고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찬양케 했습니다.

그들의 삶에도 “잠깐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서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제 너희가 말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고 말합니다. 성도의 삶에 때로 빗방울이 들리기도 합니다. 정말 소낙비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반드시 소낙비는 그입니다. 그리고 햇빛이 쨍하고 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찬양하게 해야 합니다.

성도의 기쁨의 원천은 좋으신 예수 귀하신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으로 본적이 없으나 생생한 임재하심이 나를 얼싸 앉고 있다는 이 느낌이 그들로 하여금 찬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찌니라”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양할 찌니라” “너희 중에”라고 말합니다. 아무나 그렇게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아무나 어렵다고 무릎 꿇고 기쁘게 찬송하지는 않습니다. 예배하는 너희 중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너희 중에는 고난당하는 자 있느냐? 기도하라. 너희 중에 기뻐하는 자 있는냐? 비록 육신의 눈으로 뵈온적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순례자의 길에는 곳곳에 기쁨의 샘물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찬송은 세상 노래와 그 의미가 다릅니다. 곡만 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찬불가와 찬송가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곡조만 있다고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가 이민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곳에는 밝고 힘차고 아름다운 노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수심이 서려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음률이 솟아납니다. 세상 노래는 스스로 달래거나 기껏해야 자기 즐거움의 도취이지만 하늘 노래는 하늘의 소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관광버스만 타면 찬송가는 어디가고 늘 옛날에 했던 한가닥 노래를 불러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름은 그럴듯하게 선교지, 순교지 탐방을 한다고 하면서도 버스만 타면 사람들이 조금 바뀌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가장 슬픈 순간에도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고 가장 기쁜 순간에도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저의 입장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도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내일 전도팀 여수 갈 때 고민 되겠죠? “주님을 찬송하는 사람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저는 찬송할지니라.”는 단어를 잘 살펴보면 ‘입으로 소리 내어서 노래 부르라’이런 뜻도 있습니다.

본래는 ‘현악기를 가지고 연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이 그 점입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그 암울한 시대에 주위를 둘러봐도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았습니까? 사백 명이 모여있지만 전부가 남의 돈 떼먹은 사람들, 세상에서 환란을 만나서 도피한 사람들, 제대로 된 국립대학 졸업생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하고 지낼 때에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찬송할 힘이 없을 때 그는 연주했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악기 하나쯤 다룰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 앞에 앉아계신 분들처럼. 그러나 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분들도 괜찮습니다. 왜냐면 테이프도 있고 CD도 들으면 우리가 듣는 가운데서 영적으로 얼마든지 회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비파를, 수금을 사용하면서 현악기를 연주하면서 주를 찬양하라’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골로새 교회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찬송가도 불렀고 가스펠송도 불렀고 여러 가지 찬송의 종류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너희 마음으로 주께 찬양하고. 저는 여기 앉은 분들은 영성이 탁월하기를 바랍니다. 목소리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선교지에 가서 합창단을 보니 거기에는 영적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 앉히지 않습니다.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앞장설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영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앉지 않습니다. 저는 음대 성악과 출신으로 이곳을 다 채워야 된다고 믿지 않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정말 마음속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주님을 찬양하는 일을 위해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고린도 전서 14:15절을 보십시오. 초대 교회 분위기의 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사 있는 정해진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영으로 찬미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으로 찬미한다는 것은 앞의 문맥과 비교해 보면 방언 가운데서도 찬송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으로 기도해보지도 못했고 영으로 찬송해보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마음으로 이성으로 기도하고 이성으로 찬송하는 그것밖에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송하는 일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가한 경험이 성경을 판단하는 시금석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많은 것 가운데서 한 부분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들의 경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참된 경배에는 영혼의 음률이 연주되어야 합니다. 함께 노래할 수도 있고 혼자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악기를 반주하며 노래할 수도 악기 없이 노래할 수도 있습니다. 영으로 노래할 수도 있고 마음으로 노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방법이야 어떠하든지 ‘즐거울 때에 찬양하는 것’은 성도의 특징이자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동안 본문 말씀 그대로 우리 삶에 적용시켜 봅시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당하는 자 있습니까? 저는 기도할 때 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사람 있습니까 저는 찬송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찬양을 받으시는 영화로우신 분이십니다.아멘. (정 근 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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