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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사람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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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본능이 있다(윌리암 제임스). 사람은 인정받을 때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 누구든지 회사에서 인정받기만 하면, 출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면 승진하기 어렵다.

  식당도 맛있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앉을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손님들이 붐비게 된다. 병원도 환자들에게 인정받으면 차고 넘친다. 교회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부흥된다. 이렇게 인정을 받으면 행복하지만, 인정받지 못한다면 불행해 진다.

  인정받을 때 중요한 점은, 사람에게도 인정받아야 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한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영원히 행복한 사람이 된다. 우리의 문제는 다 해결된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어, 능력의 사람, 축복의 사람이 된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넘쳐나기 바란다.

  오늘 말씀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그때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셨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1. 진실한 신앙이 되라(7).

진실한 신앙인이 되려면, 2가지 면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아주 잘해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면, 가장 비참한 신앙이다. 마7장을 보면, 선지자, 귀신도 쫓고, 능력도 행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래서 찬송가 405장의 저자 존 뉴튼은, 천국가면 3가지로 놀라게 된다고 했다. 꼭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없어서, 못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있어서, 자신이 천국에 있기에 놀란다고 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만 아시기에, 다른 사람의 신앙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① 의인의 길로 가는 신앙이다(시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땅의 무화과나무는 상당히 커, 나무 가지가 10m정도 된다. 그늘은 참 좋아서 안식처로, 피서할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성경을 읽었다. 경건한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대하면서, 언제나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는 자리가 되었다(미4:4, 슥3:10).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셨다. 이처럼 나다나엘은 주님을 사모하며, 말씀을 붙들고 살았다. 의인은 세상에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다.

② 하나님의 시험에 인정받아야 한다(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하였다. Test에 통과해야 한다.

  욥기를 보면, 하루는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셨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욥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며, 욥을 믿음을 인정해주셨다(욥1:8). 그때 사단은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했다. 그래서 시험을 허락하셨는데, 욥은 말할 수 없는 환란 중에서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 환난과 풍랑이 다가올 때,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니,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결국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은 욥은, 훗날 두 배의 축복을 받았다. 괴로웠던 지난날의 환란들이, 마치 흘러간 물같이,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큰복을 주셨다. 또 아브라함은 100세에 난 자식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 이유를 몰랐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그대로 순종했다.

  연약한 아내와 종들과 의논하지 않았다. 또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도, 처음에 먹은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드디어 칼을 들어서, 자식을 제물로 드리려는 순간에, 침묵하시던 하나님의 음성이 다급히 들려왔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며 인정하셨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인정받는 시간에,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는 숫양을 이미 예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2)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아니라,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게 된다고 했다.

  마5:23-24에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같이, 인간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부부간에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우리 아내는 진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야!, 우리 남편은 진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야!" 부모와 자식간에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우리 부모님은 진짜 집사님이야!, 우리 자녀는 성실해!"

  또 이웃에게도 인정받아야 한다. "저 교회는 진짜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달라야 한다. 딤전3:7에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고 하였다. 신뢰성과 정직성, 또한 말에 대한 책임성을 인정받자.

2. 중심이 바로 되어야 한다(47).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칭찬하실 때에,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다. 간사함은 미끼, 덫을 말한다. 이중성을 말한다. '간사'(    )는 물고기를 낚으려는 미끼다.

  자신은 감추고,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행위다.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성도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려야 한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쳐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불행은, 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은, 간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책망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창녀보다, 살인강도보다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이 사람들은 옷깃에다가 성경구절을 써 붙이고 다녔고, 주일도 잘 지키고 십일조도 잘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무섭게 책망하셨다. 왜 책망을 하셨나요? 중심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아! 너희 속은 마치 회칠한 무덤 같구나"하셨다. 무덤은 겉은 아름다운 잔디로 꾸며져 있지만, 그 속을 파헤쳐 보면 썩은 송장이 들어 있다.

  겉으로는 성경구절을 써서 몸에 붙이고, 그 마음속에는 간사함과 외식으로, 썩는 송장 같은 것이 들어있다고 책망하셨다.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이다. 우리는 안과 밖을 다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디를 더 꾸며야 합니까? 당연히 속을 더 꾸밀 줄 알아야 한다.

  봉사를 해도 중심으로 해야 한다. 기도를 해도 중심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속이 바로 되어야 복을 받는다. 중심은 곧 마음이다. 마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과 같다. 마음의 자세가 바로 되어야, 양심의 기능을 잃지 않게 되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고전13장을 며느리13장으로 바꾸면 이렇다. 내가 시어머니에게 애교 있는 말로, 안부전화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내가 세상지식과 지혜로 교회의 집사가 됐을지라도,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재물로, 시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려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은 시어머니가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참고, 시어머니가 좀 심한 말을 할지라도 온유하며, 남편이 시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려도 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시어머니 앞에서 교만하지 않으며, 시어머니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사랑은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와도 참으며, 가사가 힘겨울지라도 끝까지 견딥니다.

  삼상16:7에 이스라엘의 2대 왕을 뽑을 때에, 하나님이 보시던 기준이 나와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사람의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과 사람이 보는 기준이 달랐다.

  사람은 겉만 보고 평가하기에, 실수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로 인정하고, 거짓말을 해도 진짜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안팎을 다 보시고 평가하시기에, 하나님의 평가는 정확하다. 사람다운 사람, 성도다운 성도는, 그 중심이 바로 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일꾼이 필요하셨다. 그때 글 잘 쓰는 문필가를 찾지 않으셨다. 수단 방법이 좋고, 말 잘하는 정치가를 부르지도 않으셨다. 정직하고 우직하고 진실함을 가졌던, 베드로 같은 어부를 불러다가 예수님의 수제자로 삼으셨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순수한 사람, 거짓이 없는 사람, 잔꾀가 없는 사람들을 찾으셨다. 주님의 뜻이라면 죽을 수 있는, 어리석을 정도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으셨다.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중요하듯이, 사람의 마음도 보이지 않지만, 마음이 바로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나의 상태도 정확히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실 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3. 자신의 잘못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49).

복음을 들으면서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병이 있다. 바로 선입관이라는 병이다. 나사렛이 이방인과 교제하며, 사투리를 쓰는 지역이기에, 메시아가 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선입관은 예수님을 똑바로 좇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49절에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눈이 열렸다.

  사람들이 잘못을 깨달았을 때, 회개하고 삶을 고치든지, 아니면 잘못을 지적한 사람을 죽이든지, 둘 중에 하나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내가 죽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죽이든지, 반드시 죽음의 현상이 나타난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는 무리가, 교회에서 제일 무서운 세력이요 무리다.

  회개하지 않고 지나가게 되면, 반드시 핍박하는 무리가 된다. 죄는 죄를 낳기 때문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기 범죄를 감추려고, 우리아를 데려다가 밧세바와 동침케 했다. 하지만 충성스런 우리아는 병사들이 저렇게 고생하는데, 나는 집에 가서 발뻗고 잘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병사들과 함께 지냈다. 다윗은 할 수 없어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 전쟁의 명분으로 죽여버린다. 그리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탈취한다. 죄가 죄를 계속해서 낳게 되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죄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죄는 생산성이 있다. 죄가 죄를 낳는다.

  자기가 죽지 않는 자는, 마귀를 위해 계속 일할 뿐이다. 따라서 내가 죽지 않으면, 예수님을 죽게 만들고, 결국에 죄악의 열매를 맺는 사탄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잘못된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을 바꾸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마음을 바꾼다는 말이 회개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제일먼저 생각을 바꾸는 회개가 있다. 회개는 세계관을 바꾼다는 뜻이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왕으로 받아들였다. 회개를 진짜 했다는 말이다.

  자신의 잘못을 버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하는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앞으로 주님이 행하실 큰 비전을 보리라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꿈과 비전, 소망을 주셨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면, 세로운 세계가 열린다.

  나다나엘은 의심하면서 예수님께 나왔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잘못을 끄집어 내지 않고, 그의 장점을 드러내 주셨다. 그도 분명히 잘못한 점이 있었을 텐데,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칭찬해 주셨다.

  결론이다.

우리는 노아를 생각하면, 포도주 마시고 자녀들 앞에서 옷 벗고 주책없이 굴었던 일을 생각하지만, 히11:7을 보면, 노아에 대한 평가가 나오는데,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셨으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허물이 있고, 실수가 있어도,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믿음만 보신다. 우리의 실수와 허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다 가려주시고, 우리의 믿음만 보신다.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실한 믿음으로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란다. (이건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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