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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답과 아비후의 사망 (레 9:22 - 레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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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9장은 아론이 첫 번째 제사를 드린 장입니다. 22절에 보면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나와 있습니다. 아론이 처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23절에 보니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24절에 보니까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모세와 아론이 번제단 위에 짐승의 각을 떠서 기름을 올려놓으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 제물을 태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합해서 850명과 대결을 할 때에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제물과 나무를 다 태웠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9장에서는 아론이 첫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불이 나타났으며, 백성에게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10장으로 가면서 나답과 아비후 두 아들이 죽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망과 슬픔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만사는 이와 같습니다.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평화가 지나면 전쟁이 오는 것이고, 긍휼이 지나면 심판이 오고, 단 맛이 지나면 쓴 맛도 오고,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태양이 뜨면 태양이 지는 날도 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밤이 지나면 낮도 오는 것이고, 쓴 맛이 지나면 단맛도 오는 것이고, 고통이 지나면 기쁨도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교차함으로 우리 인생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대제사장 아론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습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레위기 10장에서 죄 가운데 사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업무는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답과 아비후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아버지는 아론이고 이들의 삼촌은 모세입니다. 마치 삼촌이 대통령이고 아버지가 대법원장인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얼마나 높은 사람들입니까? 또 하나님께서 이들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9절을 보면 이들은 장로 70인과 함께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보고 그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였습니다. 이들은 아론이 첫 제사를 드릴 때에 아론의 제사를 수종들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보다 높은 사람은 이스라엘에
는 오로지 모세와 아론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존귀한 제사장들이 레위기 10장에 가서 비참한 사망을 한 것입니다. 이 사망의 사건은 너무나 놀랍고 비참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예고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론 사람은 급작스럽게 죽을 수가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죽음은 두 종류 입니다. 하나는 의인의 급작스러운 죽음이고 또 하나는 악인의 급작스러운 죽음입니다. 의인의 죽음은 건강하게 살다가 잠깐 앓고 죽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행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랜 고통을 당하지 않고 자손들에게도 오랜 고통을 주지 않고 건강히 살다가 갑작스럽게 천국의 영광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이 땅에 오래오래 사시다가 건강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가 120살에 죽을 때에도 눈이 쇠하지 아니하고 기력이 약해지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건강하다가 갑작스럽게 천국의 영광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복된 것이요, 이 땅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이 부르셔서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이 갑작스럽게 순간의 경고도 없이 죽었다는 것은 그가 갑작스럽게 멸망해서 영영한 지옥불로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까? 시편 73편 18절과 19절에도 보면 아삽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악인이 갑작스럽게 죽는 것은 졸지에 황폐하는 것이고, 놀람으로 전멸하는 것이고, 회개할 기회도 놓치고 지옥불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척 하다가 사단이 마음속에 가득해서 성령을 속이고 헌금으로 사기를 쳤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둘 다 갑작스럽게 죽었습니다. 여기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은 구약적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죽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모두 다 죄로 인한 결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욥도 고난을 당했지만 욥이 죄가 있어 당했던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3장 4절에도 예수님이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명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어서 그렇게 망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죽는 것도 꼭 죄로 인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사망이 온 것은 죄가 원인이지만 특정한 구체적인 죄로 인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 나답과 아비후의 죄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는 분명히 죄 가운데 죽은 것입니다. 이들의 죽음은 악인의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나답과 아비후는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은 한 가지 죄 지었다고 그때마다 때리는 분은 아니십니다. 이들의 죄는 복합적인 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쌓이고 쌓이다가 심판이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추론할 수 있는 죄히고 다른 하나는  명백한 죄입니다.  10장 8절에 보면 추론할 수 있는 죄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나답과 아비후가 죽고 난 직후에 하나님이 아론에게 말씀하신 것이 제사장들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 취한 상태에서 제사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답과 아비후도 그래서 사망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노아가 홍수 이후에 포도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먹고 취했습니다. 노아는 술 취하면 약간 주사가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옷을 다 벗으니까 그 아들 함이 아비가 옷을 벗었다고 흉을 보게 되었고 결국 함과 그 자손은 노아로 말미암아 영영한 저주를 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음주의 역사는 저주의 역사인 것입니다. 멸망과 슬픔과 질병과 다툼의 역사와 음주의 역사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인류는 지진, 홍수, 기근, 페스트, 독재, 전쟁과 같은 갖가지 파괴적인 피해를 겪어왔습니다만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독주의 피해라고 생각합니다. 노아의 때부터 벌써 술에 취했으니 시대에도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술의 피해는 대륙도 뛰어넘습니다. 아시아도 유럽, 아메리카에도 만연합니다. 국가도 상관없고 성별에도 상관없이 이 독주의 피해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특별히, 음주운전의 피해는 아마 6.25의 피해보다도 더 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남자와 여자가 운전 중에 정면추돌을 했습니다. 차가 박살나고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이 하나도 다치지 않고 나올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다 찌그러진 차에서 나와서 남자가 여자를 보니 예쁘게 생겼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보니 참 잘생겼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정면추돌을 했는데 하나도 안 다치고 살아난 것을 보니 당신과 나는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우리가 평생 같이 평안히 살면 어떻겠습니까?” 남자가 생각해보니 사고가 난 것은 불행이지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자 여자가 또 말을 합니다. “당신과 내가 이처럼 사고에서 살아나고 건강하고 평생 연분의 연도 맺게 되었는데 마침 여기 포도주 한 병이 깨지지 않고 있으니 포도주를 같이 한잔하고 축배를 듭시다.” 그리고 여자가 포도주를 한 컵 따라서 남자에게 줍니다. 그 남자가 속으로 ‘내가 차도 망가지고 사고를 당했지만 그래도 수지를 맞았구나.’ 생각하고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도 한잔 마시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그 포도주 뚜껑을 닫더니 갑자기 돌변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경찰을 불렀으니 조금 있다가 경찰이 올 것이요.” 남자에게 음주운전으로 덮어씌우려고 여자가 일을 꾸민 것이었습니다. 술은 인간에게 피해만 줍니다.

술 취한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제단에서 분향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한 것입니다. 술 취한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분향하겠다고 했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관이었겠습니까? 성도들이여 술을 조심합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술 취한 채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에 취하여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두 번째 죄는 명백한 죄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이들의 죄는 세 가지 입니다. 첫째로는 다른 불을 분향한 것입니다. 제사에 쓰는 모든 불은 거룩한 불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레위기 9장 24절에서 아론이 첫 제사를 드릴 때에 단위에 기름과 제물을 살랐던 바로 그 불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심시키신 것은 레위기 6장 8절에서 13절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단 위에 불은 하나님이 한번 내려주시면 꺼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불은 끊이지 않고 단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불을 꺼뜨리지 말고, 제사와 분향은 그 불을 가지고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이 말씀을 무시하고 보통 불로 분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즉각적인 진노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제사장으로 위임되어서 존귀한 자들이라고 했는데 술 취한 채로 하나님의 명령도 거역하고 다른 불로 제사를 지냈으니 그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준 불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은 불인 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심령에 제대로 들어오면 죄도 태워버리고 귀신도 태워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령이 불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열심도 주시고, 절망 가운데 위로도 주시고, 피곤할 때 힘도 주십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열렬한 마음으로 섬길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이 우리 안에 타오를 때에 그렇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 말씀과 성령, 이 두 가지로 예배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령은 성령이요 진정은 진리 아닙니까? 말씀의 진리와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의 제단에서 계속 타오르고 끊어지지 않도록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의 연료, 기도의 연료를 계속 부어서 마음의 제단에서 성령의 불이 계속 타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타오르지 않는 사람은 예배드릴 때에도 자꾸 졸고 제대로 드리지 못합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의 제단에서 타올라야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불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연료를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가 막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이 풍로 피울 때에도 재를 치우고 연료를 넣어야 하지 않습니까? 재는 우리 삶의 죄입니다. 죄가 가로막게 되면 성령의 불도 소멸되는 것이고 말씀의 불도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는 가져다가 진 밖에 치워 버리시고 우리 마음속에 말씀과 기도의 성령의 연료를 집어넣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우리 심령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 심령이 자꾸 새로워집니다. 그러면 성령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에 삶도 생기가 돌게 되고, 신앙에도 능력이 생기게 되고, 교회도 더 부흥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신학교 졸업을 하고 2년을 목회를 하니까 지쳐버렸습니다. 부흥도 안 되고 헌금도 안 나오고 먹고 살기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사모님께 목회를 그만 두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목회를 그만 두고 나가서 무엇을 할꼬?’ 생각하니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여보, 그러지 말고 한달만 우리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그 때 결정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한 달을 기도했는데 성도가 한명 왔습니다. 또 한달을 더 기도 했더니 성도가 더 왔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목회에 재미가 붙고 열심이 생겨서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심령에 불이 타오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왜 인생에 재미가 없고 신앙에도 재미가 없는가?’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불이 꺼져서 그런 것입니다. 불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의 연료를 부으시고 죄는 진 밖으로 내어 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역사에 보면 다른 불로 드린 예배가 얼마나 많습니까? 초대교회 시절에도 영지주의와 유대주의, 온갖 이단들이 횡횡했습니다. 중세시대에도 로마 카톨릭은 거짓된 교리와 갖가지 잘못된 성례전을 통해서 사람들을 오도했습니다. 많은 신령주의자들은 성령이 아닌 악령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다른 불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인생에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사회주의 사상으로 열심을 냅니다. 그런 것은 다른 불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아닙니다. 그런 사상으로 모여서 아무리 열심을 낸다고 해도 그것은 사망으로 가는 불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뜨거워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이들의 죄는 하나님의 정한 시기와 상관없이 아무 때나 들어가서 분향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술 취해서 자신들이 제사장이라는 자만심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방자하게 행한 것입니다. 또 이들의 죄는 분향이라고 하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인데 둘이 향로를 가지고 들어가서 둘이 한꺼번에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법에 없는 것입니다. 술 취한 김에 동무삼아서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사람이 떼를 지어도 옳은 일로 지어야 합니다. 당을 짓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당을 짓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옳은 일을 위해서 당을 지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옳고 바른 일을 위해서 당을 지어야지 나쁜 일을 위해서 당을 짓는다면 그 사람은 나답과 아비후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의 결과로 죽었습니다. 그것도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죽음을 직접 지휘하셨고 보셨습니다. 또 그들은 죽되 여호와 앞에서 나
온 불로 죽었습니다. 그들이 무시했던 불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몸소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장가도 가보지 못하고 자식도 없이 죽었습니다. 민수기 3장 4절에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었고 무자하였고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 아비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장가도 못 가보고 죽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3. 아론의 잠잠함

그런데 이 본문 말씀에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은 3절 후반입니다. “아론이 잠잠하니” 아론이 잠잠할 수 있습니까? 아론은 마음의 평화를 유지했다(held his peace)고 했습니다. 아니 아들이 갑자기 죽었는데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잠잠할 수 있습니까? 아론은 이 두 아들이 죽었을 때에 단 한마디 애도의 말도 하지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 탄식의 말 한마디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은 인간이 슬픔과 고통을 느낄 여유도 없도록 완전히 압도해 버렸기 때문에 아론은 잠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내 부모님을 전도하지 못했구나. 내가 내 형제를 전도하지 못했구나, 내 친구 중에 지옥 가는 사람이 있겠구나.’ 그런데 천국에 가서도 ‘내 부모님은 지옥에 가셨는데, 내 형제는 지옥에 갔는데’ 하고 생각한다면 천국이 기쁨의 장소가 될 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고통의 장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인간은 이런 슬픔에 빠질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압도되기 때문에 이런 세상의 일들로 슬퍼할 여유가 없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슬픔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나타나셔서 우리의 슬픔을 압도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슬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3절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이것은 모세가 아론을 위로하는 말입니다. “두 아들을 잃었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이 거룩하다 함을 받으셨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말 속에 우리 성도들이 받아야할 교훈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는 하나님이 멀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가까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면 온갖 좋은 것이 다 그 안에 있습니다. 치료와 축복과 위로와 평안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지금 심령으로 하나님을 멀게 느끼는 사람은 다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두 가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군번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창조주 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거룩한 자세로 예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처럼 술취해서 분향하고, 다른 불로 분향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서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겨서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람이 예배에서 영광을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면 그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멀리한 사람은 다시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사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나답과 아비후의 노선을 따라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론의 남은 두 아들 엘리아살과 이다말처럼 하나님께 계속 쓰임 받는 제사장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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