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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가족이 된 여인 (눅 8:42b-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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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말씀이 들어있는 누가복음 8장에는 많은 사건들과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악귀들을 쫓아내시고, 많은 병을 고치신 이야기(8:1-3)부터 시작해서, 그 유명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뿌리는 비유(8:4-8)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8:9-15)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등불은 등경 위에 켜서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교훈(8:16-19)과, 누가 진정 예수님의 가족인가를 말씀하신 내용(8:19-21),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한 놀라운 이야기(8:22-25), 그리고 그 유명한 거라사의 군대귀신 들린 사람의 이야기(8:26-39)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8:40-42, 49-56)에는 죽은 자를 살리신 엄청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 그리고 천지를 잔잔케 하신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은 자를 살리신 놀라운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는 누가복음 8장의 말씀 속에, 한 작디 작은 이야기가 끼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는 본문의 중심에 서 있지도 않고, 긴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늘 누가복음 8장의 이야기에서 이 여인의 이야기는 겨우 본문에 끼어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보다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대한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 보다 대단한 이야기인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의 중간에, 겨우 끼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이야기의 흐름 속에 겨우 끼어들어 온 그녀의 이야기의 바로 앞부분에는(40-42a), 당시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회당장이 자신의 병든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끼어든 그녀의 이야기 뒷부분에서 회당장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고, 그 놀라운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을 봅니다(49-56절).

  이렇게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에 대한 대단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들고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사람의 짧은 이야기가 대단하고 중요한 이야기의 틈바구니 속에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본문이 속해있는 누가복음 8장 전체를 읽고 묵상하다가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왜 그녀의 이야기가 대단한 이야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엄청난 이야기를 뚫고 들어와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초라한 여인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 대단한 이야기의 맥을 끊고 들어와 있는가?”
“복음서의 기자는 왜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이야기를 단숨에 끝내지 않고, 초라하고 무기력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 속에 삽입하고 있는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질문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2. 고통 받는 한 여인의 이야기

  이런 질문을 가지고 이제 이 여인에게 우리의 관심을 한번 기울여 봅시다. 이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이 여인은 비참한 사람이었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 축에도 낄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이 여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여인은 크나큰 중병에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병으로 인하여 심한 고통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난 12년 동안 계속해서 혈루증을 앓아 왔습니다(43절). 혈루증은 지속적으로 하혈을 하는 증세는 보이는 부인병의 일종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양의 피를 쏟아내면서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또한 혈루증은 율법(레위기 15:25-37)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정죄되었고, 그 병을 앓는 사람과 접촉을 한 사람까지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마도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환자는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싸매고 있어야 했고, 역겨운 냄새를 감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여인은 “많은 의원들로부터 치료를 받으면서 많이 견디어야”(막 5:26) 했습니다. 그녀는 병을 고치려고 모든 노력을 다 쏟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하고 여러 병원에 수많은 치료비들만 갖다 바쳐야 했습니다. 엊그제 뉴스를 통해서 군인병원에서 위궤양이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한 군인이 제대하자마자 위암으로 죽은 사건이 벌어져, 군 의료기관이 발칵 뒤집힌 소식을 우리가 들었듯이, 과학과 의학이 엄청나게 발달한 오늘날에도 이렇게 종종 오진이나 의료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는 데, 예수님 당시는 잘못된 진단, 비과학적인 진료, 또한 터무니없는 비싼 치료비의 요구 등으로 인해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들이 더욱 많았을 것은 충분히 상상을 하고도 남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많은 의사들로부터 수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가진 것을 병을 고치는 일에 다 쏟아 붓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막 5:26). 가진 모든 것을 병 고치는 데 다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제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인데, 오히려 병은 더 심각해저만 갔습니다(막 5:26)
  그렇게 그녀는 건강도 잃어버리고, 돈도, 희망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체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피를 흘리며,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육체적인 고통,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사회적 고통,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버린 종교적 고통, 그렇게 그녀는 많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3. 고통가운데서 예수님을 만진 여인의 이야기

  그런데 그러던 그녀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실의와 좌절 가운데 빠져 있는 그녀에게 어느 날 모든 병을 고치시며, 악귀들을 쫓아내며, 놀라운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달하고, 말씀으로 광풍을 잠잠케 하시며,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는 분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녀는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지막 희망을 붙들게 됩니다. “내가 만일 그 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만 하면 내 병이 나을 수 있을텐데...”

  그녀는 이제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필사적으로 최후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녀의 필사적인 이런 행동은 그녀의 마음 속 깊이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수 많은 군중들 속에서 능력의 예수님을 만지기 위하여 손을 내밉니다. 필사적으로 손을 뻗칩니다. 예수님을 만지려는 그녀의 노력은 필사적인 희망의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그녀는, 이제 마지막 소망을 향하여 온 힘을 다하여 손을 내 뻗습니다. 정맥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손으로 양로원에 가끔씩 찾아오는 자녀들을 만지기 위해 손을 내미는 노인의 손과 같이 손을 내뻗습니다. 그녀의 앞으로 내뻗은 연약하고 창백한 손은 예수님의 권능을 만지는 “고통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그 창백한 손을 뻗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그 만짐은 도시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스쳐 지나가듯이 슬쩍 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명성이 있는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부수고, 도저히 만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 예수님을 필사적으로 만지는 그런 만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 그녀가 그토록 소망했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만졌고, 그 즉시로 피가 멈추고 그녀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는 “즉시” “즉각적으로” “일순간에”라는 뜻을 가진 “파라크레마”(παραχρημα)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정말로 즉시로 피가 멈추었고, 그녀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4. 전능하신 주님과 대면한 여인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즉시로” 자신에서 권능이 빠져나갔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누가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되었는지, 누가 이렇게 거룩한 권능이 흘러가도록 한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짤막하게 물었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아마도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녀를 찾아보아라”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을 살짝 만진 것이 대수이겠는가 싶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진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가 밀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서 만진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제자들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에 온통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마치 제일 소중한 친구보다도 더 특별하게 생각하듯이, 자신을 만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놀라운 드라마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이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나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시며, 주님의 겉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그러한 믿음의 여인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시며, 그녀를 돌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위의 군중을 둘러보았습니다. 군중 속에 있는 그 믿음의 사람이 누구인지 계속해서 찾고 계십니다.

  이 때 마침내 그 여인이 자발적으로 나섭니다. 이제 고침 받고 새롭게 되었으며, 질병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맛보면서 그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 사실을 복음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모든 사실을 아뢰었다”(47절)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녀는 자신이 부적절하게 예수님을 만진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곳에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남들 같으면 그렇게 권능의 주님을 만질 수 없는 순간에 몰래 예수님을 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두려움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전에 평생 동안 짊어지고 있어야 했던 고통과, 이제 자신의 생명을 살린 예수님의 권능에 관한 사실들,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새롭게 된 사실에 대해서 털어놓습니다. 주님 몰래 행한 일들에 대해서 고백합니다.

  그녀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그녀가 부정한 몸을 가지고 주님을 만진 것은 적절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무안을 당하고,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병들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사람들한테 학대받았고, 의사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했고, 심지어 종교지도자들에게서조차도 그녀의 병든 몸은 언제나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 놀라운 역사를 이끌어 낸 믿음을 가진 그녀를 마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꾸짖거나 창피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비난하거나 학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함부로 한 것에 대해서 야단치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자신을 만짐으로써 자신의 체면이 상하거나, 자신의 성결함이 더렵혀지거나, 또는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지 않을까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 오직 그녀와 그녀의 미래에 대해서 온 관심을 기울이실 뿐이었습니다.

5. 예수님의 가족이 된 여인의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예수님은 지금 그녀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딸아”(뒤가테르)라는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과의 관계를 묘사하며 사용했던 “딸”이라는 단어를 예수님께서도 지금 이 여인을 향하여 사용하고 계십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정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 속에는 한없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 44절에서 이 여인이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옷가”라고 하는 단어는 “크라스페두 투 히마티우”인데, “크라스페두”는 ‘망토’ 또는 ‘외투의 가장자리에 달린 부속물’, 즉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술”을 말하는 것이며, “히마티우”는 ‘외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이 말을 “fringe of His Cloak”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 새번역도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눅 8:44). 즉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 끝에 달려 있는 술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이 겉옷에 달린 술은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 달린 옷은 그 당시 제사장 같은 권위와 위엄이 있는 이들이 입었는데, 그러므로 이 술은 아무나 만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옷에 달린 술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만지도록 허락을 받았거나, 혹은 오직 가족들만이 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지금, 도저히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을 만졌습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몸은 부정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이 여인과 접촉이라도 하게 되면, 그도 부정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권위를 상징하며, 가족들만이 만질 수 있는 옷가의 술을 만졌습니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엄청난 책망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고 두려워 떨고 있는 그녀에게 예수님은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야이로가 죽어가는 외동 딸을 향해서 한없는 사랑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부르고 있는 “딸”(뒤가테르)이라는 그 단어, 그 딸을 잃는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요, 아픔이기에 회당장 체면도 다 팽게 치고, 한 시골의 젊은 청년 랍비에게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바로 그 심정으로 부르는 “딸”(뒤가테르)이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부정했던 여인에게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냥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 이름을 모르니까 일반적으로 부르는 딸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은 실제로 아버지가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부녀지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첫 마디에서 벌써 예수님은 그녀의 불손한 행동을 용서하시고, 네가 나를 만질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너를 이미 나를 언제라도 만질 수 있는 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한 마디, “딸아”라는 이 한 마디 속에서 이 소외된 여인을 향한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계속해서 칭찬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음성과 함께 그녀를 보내고 계십니다.

거룩함을 가지고 가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샬롬과 함께 가라. 이제 더 이상 피흘림도 없이, 생명을 빼앗아 가는 더 이상의 혈루증도 없이, 더 이상 아무런 도움과 희망을 주지도 못하는 의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필요도 없고, 소중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궁해 질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평안과 함께 가라. 이제 충만하여, 건강하고, 기쁨에 넘치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가라. 이제 그녀는 온전하고, 그 모든 속박으로 완전하게 해방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6. 똑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이야기

  이렇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다시 좀 더 엄청나고 멋진 이야기인 회당장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영향력 있는 사람과 그의 딸에게도, 가련한 한 여인에게 행하셨던 것과 동일한 일을 행하십니다. 회당장의 딸에게 무엇을 더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 없는 무명의 여인은 회당장이 받았던 것과 똑같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다시 허락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안에서는 이 여인도 이제부터 영원토록 중심인물이 된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었고,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이 되었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의 영역 안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으로 초청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이 여인의 이야기가 그 엄청난 이야기, 죽은 자를 살리는 이야기의 맥을 끓고, 여기에 끼어 들어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여인의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들과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차라리 이 여인의 이야기는,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기에, 회당장의 딸이 죽어가고 있어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속에서도 멈추신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바로 여기에 끼어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야기는 보잘것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사실은 대단한 이야기들 사이에 끼어든 것도 아닙니다. 아니 차라리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 주님께는 그 큰 이야기들을 멈추게 할 정도로 중요한 주님의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이 주님의 마음을 알았던 누가는 죽은 자를 살리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다가, 이 여인의 이야기로 큰 이야기의 맥을 과감하게 끊고 있는 것입니다.

7. 우리들 가운데서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이야기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심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온 세상에서 나 하나만을 사랑하시듯,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지금도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서 진정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면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옹위하고 함께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옹위했다”는 헬라어 단어는 직역하면 “무리들이 그를 질식시키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무리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몰려들어 에워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옷을 스치거나 주님과 몸으로 부딪히는 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또 그들 가운데는 혈루증을 잃던 이 여인과 같이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병들고 문제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자가 어찌 이 여인뿐이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녀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그들 가운데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도 주님을 따라 갔을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의 옷을 스치며, 주님의 몸과 부딪히며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이 여인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녀만이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에워싸 밀고 밀리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교회로 밀려옵니다. 함께 찬송 부르고, 기도하며,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모두 우리가 주님께 손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 주님께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믿음으로 손을 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배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며 그가 주시는 구원과 치유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믿음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그리스도를 에워싸고 있는 교인들, 우리 주님과의 영적 접촉이 끊어져서 생명을 상실한 교회, 그곳에는 아무리 주님을 에워싸고 따른다 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해도 그 어떤 변화도, 치유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들 가운데서 믿음의 손으로 자신을 만지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자기와 참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시간 우리 가운데 말 못할 고민으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내 힘과 능력과 지식과 경험과 모든 것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뿐이어서 한숨 짖고 있는 분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일터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워하는 분이 있습니까? 가정의 문제와 사랑하는 이들의 병고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혹은 우리 가운데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두렵고 떨림 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들도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술을 잡으십시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술만 만졌는데도, 주님의 딸이 되어 12년 동안 앓던 난치병과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옷술을 만진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에서 흘리신 구원의 피를 믿음으로 먹고 마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은 옷깃을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자들이 아닙니까?
옷깃만 만졌어도 구원받았는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믿음으로 받아먹으며, 성령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한 몸이 된 우리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자락이 아니라, 주님의 손을 꽉 붙잡읍시다.
그리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에 이렇게 대답하십시다.
“주님, 제가 만졌습니다. 저의 병든 육체가 치유되기 원합니다. 제 마음의 상처를 고침받기 원합니다. 병들어 있는 제 영혼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제 마음의 죄악들을 씻음 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의 피 묻은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사랑하는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려올 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모든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문제에서 놓여 자유할 지어다” 
(주승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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