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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원 품꾼 비유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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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종종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리라, 오른 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 ...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체험 저런 체험을 하다보면 “아하! 그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었구나~ ” 하고 깨닫게 됩니다. 결국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성경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얕은 생각과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열린 마음으로 겸손히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말씀 속에 담겨진 오묘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인간의 상식을 너머서는 놀라운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하나하나 깨달으면서 우리 인간의 얕은 생각을 하나님의 높은 생각에 맞춰가면서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포도원 품꾼 비유 : 주인과 품꾼, 하나님과 그의 백성

  본문은 예수님이 천국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비유는 영적 진리를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위치한 팔레스틴 지방의 포도 수확기는 9월 경입니다. 9월의 어느 이른 아침 그 주인은 품꾼을 구하러 나갑니다. 여기서 이른 아침은 해가 뜨는 오전 6시를 가리킵니다. 주인은 일당으로 1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품꾼들을 고용합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로마 화폐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 후 제3시가 되어 또 나갑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낮 시간을 일출(오전6시)에서 일몰 시간(오후6시)까지로 잡습니다. 그 사이 시간을 12등분해서 제1시, 제2시, ... 이런 식으로 시간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제3시는 오전 9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정확하게 품삯을 약속하지 않고 품꾼들을 고용합니다. 그 후에 또 제6시 즉 정오에, 제9시 즉 오후 3시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제11시, 일몰 1시간 전에도 나가서 품꾼을 구해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일손이 딸려서 라기 보다 놀고 있는 사람들을 차마 보지 못해서 품꾼으로 고용해 주려는 인상이 농후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많은 품꾼들이 포도원에 들어갔고, 마침내 해가 저물었습니다. 품꾼들이 줄을 서서 품삯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중 온 사람들부터 줍니다. 맨 마지막 제11시에 온 사람들에게 1 데나리온씩 줍니다. 아마 그들은 매우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1시간 앞두고 고용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예상치 않게 하루 품삯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들보다 일찍 들어온 사람들은 내심 더 많은 품삯을 받으리라 기대하고 부푼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런데 웬걸 일찍 온 사람들도 모두 다 1데나리온씩 줍니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주인을 원망하고 난리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불평하는 그들을 책망합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품꾼은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에 관한 몇 가지 진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2] 포도원 품꾼 비유에 담긴 진리 : 은혜의 법칙, 보상의 법칙

  ① 은혜의 법칙 :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보통 상식과 맞지 않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맨 처음에 온 사람들은 무려 12시간이나 포도원에서 일했습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겨우 1시간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1데나리온씩 주느냐 이 말입니다. 너무 불공평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평합니다. 12절.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상식적으로 시간 수대로 쳐서 삯을 줘야 하지 않습니까?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하며 볼멘소리를 하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도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그랬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인은 정색을 하며 뭐라고 말합니까? 13절~15절.

“ ...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그렇게 하는 것은 주인의 ‘주권적 뜻’이라는 겁니다. 주인이 자기 것을 갖고 자기 뜻대로 할지라도 무슨 문제냐 이겁니다. 맨 처음에 오전 6시부터 일한 사람은 1 데나리온을 약속했고, 다른 사람들은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맨 처음에 온 사람들도 할 말이 없고, 다른 사람들은 더더욱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당시 상황으로 보건대 일찍 온 사람들이나 늦게 온 사람들이나 사실 주인이 품꾼으로 고용해 준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당시는 너무 가난하던 시절입니다. 우리나라도 과거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옛날 서울역에 지게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누군가 일을 시켜주면 감지덕지입니다. 아무도 일을 시켜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공을 치기 일쑤였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주인이 그들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공을 치고 처자식을 굶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주인이 그들 모두에게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1 데나리온은 삯이라기보다는 주인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당시에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은 ‘공로 구원 교리’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선행을 하고, 무언가 공적을 세워야 구원을 받을 줄로 알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한국인들도, 아니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사상입니다. 불교도 유교도 세상의 모든 종교가 사실은 그런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인간은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제아무리 선을 행하려 해도 그것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끼리 비교하면 크고 작고, 선하고 악하고 구분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게 그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죠.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100점이라고 수치로 표현해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본래 의로운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그 의에 미치지 못하는 죄인이 된 겁니다. 물론 개인차가 있어서 어떤 사람은 90점짜리입니다. 그 정도면 굉장하죠. 그러나 의로운 자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80점, 70점, 60점, ... 모두 다 죄인입니다. 인간끼리 비교하면 누가 낫고 누가 못하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다 ‘그게 그거’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입학시험에 커트라인이 있는데, 거기에 미달되면 점수가 높든 낮든 그게 그겁니다. 어떤 분은 그래요. 차점으로 떨어졌다고. 말하자면 수석으로 불합격했다는 겁니다. 그래도 어쨌든 불합격입니다. 불합격은 수석이나 꼴등이나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가 없으면 절대로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조건이나 공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곧 ‘은혜의 법칙’입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의 법칙 때문에 우리 인간이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믿음’입니다. 그래서 요6:29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런 은혜의 법칙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성경에 나오죠.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생 죄만 짓다가 마지막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됩니까? 눅23:42~43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지막 순간 믿었지만 예수님의 육성으로 직접 구원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는 분명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구원입니다! 마감시간 직전에 천국에 들어간 케이스입니다. 정말 너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 강도가 천국에 들어가서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가슴을 얼마나 쓸어내렸을까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네~” 하면서 말입니다.

  목회하면서 이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평생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믿음을 영접하고 숨을 거두는 경우를 봅니다. 옆에서 보는 입장에서도 정말 짜릿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 믿었다고 해서 나 자신의 공로가 있는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평생 믿고 수고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이미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 당연한 행위일 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찍 믿으나 늦게 믿으나 구원 받기는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죽기 직전에 믿는 게 낫잖아?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게 경제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죠. 영생은 죽어서 천국에 가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서부터 우리 영혼 속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신령한 기쁨과 평안이 부어집니다. 그것을 놓치고 세상에서 방황하면서 세속적인 3류 쾌락을 따라다는 게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만일 늦게 믿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3류 인생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또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습니다. 믿음의 기회가 중요합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게 아닙니다. 인생의 마감시간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언제 마지막이 될지 자기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간은 항상 ‘지금’입니다.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면 영영 놓칠 수도 있는 겁니다.

  유명한 여배우 마를린 먼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죽기 얼마 전 빌리 그래함 목사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서로 시간이 없어서 만나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살해서 죽은 겁니다. 그 현장에 가서 본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죽기 직전 어디엔가 전화를 하려고 했었는지 수화기가 내려져 대롱대롱 달려 있더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빌리 그래함 목사가 얼마나 통탄을 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아직 마감 시간이 되지 않았을 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족과 이웃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이미 믿게 된 것을 날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공로 없으므로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구원의 감격의 식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믿은 지 오래될수록 자칫 잘못하면 감격이 상실될 수도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② 보상의 법칙 : 충성한 자에게 주시는 또 다른 은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믿은 이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과 교회, 복음을 위해 충성하면 보상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구원의 은혜가 너무 커서 평생 수고하고 헌신해도 갚을 길이 없는데  말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평생 수고하고 헌신한다 해도 그것만으로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턱도 없죠.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고도, 우리의 적은 헌신을 보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 세상 살 동안 축복해 주시고, 이 세상 떠날 때 하늘 의 상급을 주신다는 겁니다. 말이 보상이지, 사실은 이것 또한 은혜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상급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화를 하나 소개해 드리죠. 옛날 신대륙 개척시대에 아일랜드 출신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대륙으로 가서 성공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겨우 노자를 마련해서 런던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뉴욕까지 갈 배 삯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선장에게 통사정을 합니다. 나중에 꼭 갚겠으니 제발 태워 달라고. 어쩐지 그 청년이 마음에 들어 선장은 승선을 허락합니다. 말은 안 했지만, 받을 생각은 아예 접고 공짜로 태워준 겁니다. 청년은 선장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자진해서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선원들의 일을 도왔습니다. 수개월 후 뉴욕 항에 도착합니다. 청년은 내리면서 선장에게 다시 확인합니다. 다음에 찾아와서 배 삯을 꼭 갚겠노라고. 그러자 선장은 자기 호의였으니 갚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봉투를 하나 내놓았습니다. 배 안에서 그동안 일한 대가라며 ... 청년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아무리 일을 했다 해도 배 삯에 미칠 수 없는데, 배 삯은 공짜로 해 주고 게다가 용돈까지 주다니!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감격 때문에 감사하며 수고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인데, 가외로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시고 보상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또한 기가 막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과연 그 보상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주인이 불평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참고하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씀은 부름 받은 순서대로 보상이 주어지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역전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 믿는 사람보다 뒤처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먼저 믿은 사람이 초지일관 계속 잘 하면 계속 앞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믿든 나중 믿든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i) 늦게 믿은 사람의 이점 - 늦게 믿은 게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점이 있습니다. 늦게 믿은 게 너무 안타까워서 남은 시간 더 열심히 충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에 나온 사람 중 제11시에 온 사람들 중 그런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너무 황송하고 고마워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충성을 다했다면 주인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톨스토이가 그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년이 넘어 뒤늦게 진정한 회심을 체험합니다. 그러고 나니까 지난 세월이 후회막심한 겁니다. 그래서 참회록을 쓰고 마지막 순간까지 충성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게 그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주여!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께 헌신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나중 믿었어도 이렇게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이 보상해 주십니다.   

  그런데 늦게 믿고도 대충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지난 세월이 아까운데 말입니다. 벧전4:2~3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 혹시 늦게 믿어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제부터라도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면 앞서 축복을 누리고 하늘의 상급을 얻는 일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 먼저 믿은 사람의 이점 - 일찍 믿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모태 신앙인이 제일 부럽습니다. 오래 동안 믿은 사람은 더욱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더욱 주의 일에 충성할 기회가 많은 겁니다. 오래 믿고, 오래 충성하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렇게만 되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런 분을 소개해 드리죠. 박요한 목사님이라고, 지금 90세인 어르신입니다. 대전남부교회 원로목사님으로 총회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지난 9월 총회 때 정정한 모습으로 설교하시는 모습을 뵙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한 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은퇴 후 사모님과 사별하셨는데,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혼자 사시면서 계속 복음 전도에 헌신하셨습니다. 현직에 계실 때도 충성했는데, 은퇴 하신 후 섬 선교를 위해 무려 23년 동안 헌신하신 겁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섬을 다니셨습니다. 숨질 때까지 계속 그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일평생 그렇게 사셨으니 얼마나 좋은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너무 부럽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먼저 믿었는데 오히려 잘못하는 경우도 이따금 봅니다. 교만하고 자랑합니다. 되지도 못하고 된 줄 압니다. 별 것도 안 하고 많이 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면 안 되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들이므로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평생 수고하고 헌신한다 하더라도 당연한 것입니다. 결코 일찍 믿었다고 교만하거나 태만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일찍 믿었으면 일찍 믿은 대로, 늦게 믿었으면 늦게 믿은 대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숨지는 그 순간까지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1등만 쳐 주지만 하나님은 최선을 다한 사람을 최고로 알아주십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의 일입니다. 폐회식을 위해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모인 수많은 관중들이 한 마라톤 주자를 위해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금메달리스트가 아닙니다. 꼴찌였습니다. 탄자니아 ‘아크와리’ 선수입니다. 그는 도중에 넘어졌습니다.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흘렀고, 통증도 굉장했습니다. 나중에는 눈의 초점이 풀릴 정도로 정신까지 혼미해졌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그는 골라인을 통과한 후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곧 깨어나자 기자들이 달려들어 질문합니다. “어차피 꼴찌인데 왜 끝까지 피를 흘리며 달렸습니까?” 사실  마라톤 경기가 맨 마지막이므로 그 선수 때문에 폐막식 시간까지 늦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이 나를 머나먼 이곳까지 보냈습니다. 비록 조국에 금메달을 안겨주지 못하지만, 기권해서 나의 조국에 불명예를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게 곧 올림픽 정신이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추구할 인생의 원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평생 뜨거운 감격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감시간이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 끝까지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복을 누리고, 이 세상 떠날 때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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