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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라 (약 5: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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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년을 앞두고 본당수리가 지난 주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교회가 아홉 분의 위원회를 선정하여 장로님 세분, 안수집사님 세분, 서리집사 세분, 그래서 그 분들이 건축업자와 협의를 해 가면서 수리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울산교회에 발을 디디긴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거든요. 물론 오늘도 많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습니다마는 2부 예배는 지금 숫자 보다 더 많이 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교회 한번 왔다가 잠적한 백성들을 따지면 오늘 교회 나왔던 사람 못지않게 숫자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리 하는 일은 선정된 위원들과 건축업자에게 맡기고 우리는 분당 수리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가오는 50주년 희년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도록 주위를 살피는 것입니다. 1956년부터 지금까지 울산교회를 통해 진리를 들었던 사람들을 회복시켜서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하고 하늘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일 그것이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일이 되는가 안 되는가 기웃거리고 하면 공사가 안 됩니다. 아홉 분에게 맡기고 우리가 할 일은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감사했던 것은 낙찰을 한 업체가 선정 되었을 때 위원 아홉 분이 모두 다 기뻐했어요. 참 좋은 업체가 선정되었다고 하면서. 기도하면서 후원 하면 되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예배실이 아름답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이 아름답게 되고 우리의 분위기가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그동안 야고보서를 살펴왔습니다. 계속해서 살피지 못했지만 오늘 마침내 대 장정의 마지막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총 5장으로 108절의 성경입니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다른 서신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요즘 우리 잠언서를 묵상하고 있는데 비슷한 느낌입니다. 욥, 시편, 잠언, 전도, 아가서 다섯 권은 구약의 지혜서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신약의 지혜서라고 말할 수 있는 책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필요한 신앙인의 지혜가 구구절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우리 자신에게서나 우리 이웃의 삶에서 지혜를 측정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예를 들면 1장 1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지혜로운 자는 듣기는 속히 하지만 말하기는 더디 하는 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매사에 즉각적인 대답을 하려고 덤비지 않습니다. 당면한 문제를 주님께 아뢸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듣는 시간을 먼저 갖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라고 하는 것은 사람 사이에서 처신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엉뚱한 대답을 해서 무안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말씀은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속히 들으라는 것입니다. 말씀 하시면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지혜를 측정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1장 19-20절에는 말합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

왜 성이 나지요? 어떤 때는 내 말이 맞는데 저 사람이 내 말에 귀를 안 기울일 때입니다. 그러면 화가 나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도 없는데 내 말을 안 듣는다고 생각하면 화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는데 저 사람이 내 말에 귀를 안 기울여주면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여러분의 생각이 옳아도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쉽게 성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성숙한 사람입니까? 쉽게 성내는 사람과 사귀는 것은 성숙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공의를 내세운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과거사 바로잡기, 바로 잡아야 되지요. 오십년 전에 사실 했어야 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증오와 분노가 있어서는 절대 일들이 바로 될 수가 없습니다. 또 한번 바로잡기를 해서 엎어야 될 것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이 다시금 들려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와 증오가 판치는 곳에 하나님의 지혜는 쉬 종적을 감추고 맙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네게 남아 있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야고보 1장 21절의 충고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입을 통해서 넘쳐납니다. 그건 어떻게 나타납니까?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는 현장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자리하지 않습니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대신에 자기 뜻에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 맞추기만 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같이 하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와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 선생은 어렵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너희 모두 똑똑하고 잘났으면 너희 선행으로 말미암아 행동에서 나타내 보이라’고 말합니다.

신앙공동체 내에서 상호 복종은 지혜의 또 하나의 증표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미혹한 길로 떠난 형제를 바로 잡는 일이 선한 일이면 그 충고를 받아들여서 돌아서는 일도 선한 일입니다. 진리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상호 복종이 필요합니다.

충고할 때에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은 신앙공동체의 특징입니다. 바른 말이 수긍이 되고 그 말을 따라서 결정 될 수 있는 것이 신앙공동체의 특징입니다. 뭐든지 지적하면 듣고, 옳으면 ‘그렇네’하고 인정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지혜의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합니다. 한번 자기가 말 잘못 뱉어놓은 것을 끝까지 우기려고 들면 사람 답답해집니다. 그렇죠? 그냥 한마디로 “미안하다. 생각 잘못했다.”“나는 그렇게 생각 했는데 네 말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네” 그러면 세상이 훨씬 더 아름답게 되어지는데 말씀이죠.

우린 물론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하면 내가 무엇이든지 순종할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평범한 형제자매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형제자매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못 들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겁니다. 신앙 가운데 충고하는 형제자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간절히 권면하는 자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상호 복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지혜가 자리합니다. 에베소서 마지막 부분에서 골로새서 마지막 부분에서 늘 성경은 말할 때, 특별히 에베소에서 그렇게 말하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리고 서로 복종하라고 말하고 나서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복종하라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의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교 다닐 때에 어느 겨울에 잠언서를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구절이 나오면 골라서 31개 추려가지고 종이도 귀한 시절이었지만 접어서 썼어요. 아는 사람 압니다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제 필체가 그렇게 아름답지는 못합니다. 써서 한 장씩 넘겨가면서 하루에 하나씩 넘기며 읽었어요.

잠언서를 읽으면서 보니까 지혜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미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지혜로운 사람 이야기는 제 이야기 같고 미련한 사람 이야기는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신학공부 다 마치고 유학 가서 몇 년째 공부를 하다가 어느 날 말씀을 매일 매일 묵상하는 자리에 들어갔는데 말씀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니까 그 게으른 사람이 바로 나더라고요.

나는 중학생 때 잠언서 읽으면서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게으른 사람을 봤거든요. 손을 떡 그릇에 갖다놓고는 떡을 입에 가져가는 것을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대책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 때 그 사람이 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데 그것을 경험 하면서도 어떤 때는 “오늘은 넘어가자”이러고 QT를 안하더라고요. 이것은 손을 떡 그릇에 놓고도 입에까지 가져가는 것을 괴로워하는 게으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만 그러면 다행인데 혹시 여러분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까? 일년에 여섯 번 제가 “복있는 사람 나왔습니다. 할인된 가격으로 사무실에서 구입 하십시오” 하지만 줄기차게 3,000원을 아끼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11월 12월호 나왔습니다. 이제는 왜 저렇게 하는지 투자를 해 보시죠.  3,000원 투자해서 파산하면 제가 책임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우매자에 대한 기록은 남의 이야기처럼 들으려고 하지 맙시다. 아무 근거도 없이 지혜로운 사람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야고보는 지혜가 없는 분명한 증표를 몇 가지로 또한 제시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 그 자체라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혀에서 나오는 불이 생의 바퀴를 불살라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한마디 잘 못 내뱉는 말 때문에 삶 전체가 끝장이 날 때도 많이 있습니다. 화가 나서 자식을 향해서 한마디 뱉는 더러운 말, 저주의 말이 그 아이의 평생을 족쇄를 채우게 될 수도 있고요. 부부사이에서도 화나서 내뱉는 한마디 말 때문에 요즘은 10층 높이를 무서워하지 않고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생을 끝장을 냅니다.

통제되지 않는 혀는 하나님의 지혜가 결여된 확실한 표입니다. 말하는데 전혀 절제하지 않는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입술은 하나님의 지혜가 거기 없다는 증거입니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 .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마음을 보면 알잖아요. 지금 내가 한마디 말하는 게 사랑 때문에 하는 말인지, 안 그러면 은근히 다른 사람을 허는 말인지.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하나님의 진리가 자리한 곳에서는 성결과 화평이 있습니다. 관용과 양선이 있습니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맺힙니다. 편백과 위선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세상과 벗된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세상과 짝하는 사람일까? 세상과 짝을 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해도 우리 생각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 이야기야. 난 아니야”그것은 한 사람이 무엇을 끔찍이 아끼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인지, 하나님의 뜻입니까? 끔찍이 아끼고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선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이것만은 내가 내어줄 수 없다고 잡고 있는 그게 무어냐 하는 것입니다. 그걸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세상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를 범하는 것이니라.” 뭐가 착한건지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를 범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때 그 친구 어려운 처지에 있어서 내가 돕고 싶었다.’ 그건 선을 행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을 하더라고요. 자기가 도울 마음이 있었던 것을 가지고 자기가 착한 사람인 것처럼. 그건 도울 마음까지 하나님이 주셨는데도 거부하고 욕망대로 산 사람 이예요. 그런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예요. 착각하지 마세요. 도울 마음을 주었으면 도와야 착한 것이지 마음은 있었는데 지나갔어요? 그건 착한 게 아닙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고도 죄를 짓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자리하지 않습니다. 이런 숱한 지혜들을 야고보 선생은 지금까지 말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집중적으로 살펴봅시다. 본문은 야고보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대개의 신약 서신서를 보면 그 끝 부분은 마지막 인사가 나오든지 혹은 “성부, 성자, 성령이 너희와 함께할 찌어다.”이런 축복의 기도가 나오는데 반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일반적인 규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그러고 끝납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세련된 마지막 손질이 결여된 서신처럼 보입니다. 어디에 기준을 두고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바울 서신들하고 비교를 해서 바울 서신을 표준으로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야고보서는 상당히 흐름이 매끄럽지도 못하고 끝나는 것도 갑작스럽게 끝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바울이 아닙니다. 야고보에게서 바울처럼 행동 할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야고보는 야고보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야고보가 쓴 편지를 읽으면서 “끝이 매끄럽지 못하네”이렇게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서신처럼 닮지 않았다고 불평하면 그런 사람들은 불평이 끝이 나지 않을 겁니다.

항상 있는 대로 받아 주면됩니다. 첫째 아들은 첫째 아들대로 받아주면 되고 둘째는 둘째대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서신서를 읽을 때는 야고보 선생은 왜 이렇게 끝맺음을 했는지 이해해 보려고 하면 됩니다.

사람마다 생긴 것이 다른 것만큼이나 성격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상냥하게 인사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이 없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세련되게 인사를 하는 사람만큼 정이 없다 판단하면 실수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만에 만났을 때 손을 붙잡고 있기도 합니다. 씩씩하게 인사할 줄은 몰라도 깊은 강이 소리 없이 흐르는 것처럼 깊은 정이 흐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같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적어도, 최소한 이래야 된다는 기준을 없애야 됩니다. 친구면 적어도 이 선은 지켜야 된다. 그런 기준을 없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부부간에는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된다. 자식은 이렇게 되어야 된다. 기준을 갖고 있으면 그와 맞지 않을 때 여러분이 고달파집니다. 기준을 갖지 말고 차라리 눈앞에 있는 그 사람의 행동 그대로를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 만나 보십시오. 그냥 툭 부딪혀도 ‘미안합니다.’가 툭 튀어 나옵니다. 이건 완전히 자동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용감해서 그런 말을 안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평할 때 당돌하다고 느껴집니다. 좋게 말해서 그런거고 무례하다고 느낍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미안 합니다”란 말만 잘 하는 게 아니고 “감사 합니다”라는 말도 잘 해요. 어떤 사람은 서양 문명이 굴러가는 두개의 수레바퀴는 “감사합니다"와 “미안합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정말 마음에서 그러는지 훈련에 의해서 그런지 누가 압니까? 그러나 배울 만 합니다.

어릴 때부터 훈련이 되어 있으니까 여차하면 ‘미안합니다.’저는 얼마나 많이 당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실례를 했는데 저쪽에서 “Excuse me”하니까 8년 동안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오죽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한국 와서 사람들과 부딪히면 영어로 “Excuse me” 한다니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 스타일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야고보는 자기 스타일대로 이야기를 5장으로 끌어 나갔고 자기 스타일대로 끝나는 겁니다. 무슨 세련된 마지막 인사를 차려야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그 가슴 속에 뜨거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겁니다. 그 한마디 말을 하고 끝을 맺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인사를 붙이면 하려고 했던 마지막 말이 흐려진다고 느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뭡니까? 돌이키게 하라는 겁니다. “진리를 떠난 사람들을 돌이키게 하라.”

하여간 그래서 바울의 기준으로 야고보를 판단하지 말고 야고보는 야고보로서 이해해 줍시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정말 감사해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제 더 이상 박두욱 목사님의 기준으로 저를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감사한겁니다. 다르잖아요. 한 사람은 “박두욱”, 함자가 그랬고 한사람은 “정근두”인데 어떻게 같이 행동할거라고 기대합니까?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겁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여러분들이 참 힘드셨을 것 같아요. 박 목사님은 일주일 전에 새벽기도에 기도한 것 하고 일주일 뒤의 새벽기도가 거의 같습니다. 그런 분들은 불변하신 하나님을 닮은 겁니다. 저는 그쪽이 아닙니다. 저는 예배 시작할 때의 부름기도, 기원할 때 그 짧은 말도 같은 게 안 나오더라고요. 늘 달라요. 저 같은 사람은 다양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거고 그런건데 그걸 이사람 보고 이렇게 하라고 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하라고 하면 세상을 어렵게 사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마지막 문안이나 축복 기도 대신 간절한 호소로서 편지를 끝내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갑자기 “내 형제들아” 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앞에 하던 이야기와 어떻게 맥이 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에 무슨 이야기 했죠? 3년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다시 기도하니까 비가 내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나 야고보만큼 그런데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야고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야고보를 이해하는 편에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말다툼을 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상대방 말하는 것을 들어주면 이해가 되는건데 꼭 그걸 고쳐서 내 식으로 말할 때 까지 하려고 하면 밤새우는 거죠.

야고보만큼 뜨거운 가슴이 되면 흐름을 따라 잡을 수 있는데 우리가 야고보의 그 뜨거운 열정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왜 갑작스럽게 내 형제들아 하고 들어가는지 감이 안 잡힙니다. 앞에는 기도의 특권과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병든 자를 구원하는 기도의 위력을 말했습니다.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는 약속에 대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는 것만이 교회에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질병 역시 성도들 모두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느꼈던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데도 기도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영적인 질병을 고치는데도 기도의 뒷받침이 있어야 됩니다.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돌이키는 데는 거기도 기도가 붙어야 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기도 이야기를 하다 말고는 병 고치는 기도이야기를 하다 말고는 사람을 돌이키는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은 그런 흐름이 있는 것입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형제들을 한 통의 전화만 한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위한 간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내 목숨을 내어놓고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해야 사람들이 돌아섭니다. 누군가 다시금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신앙의 길에서 떠난 사람들을 다시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본문을 읽어보면 왜 기도 이야기를 하다 말고 돌이키게 하라고 강조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병 고치는 기도냐 영혼의 구원이냐 이걸 놓고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키는 동시에 의인의 간구는 미혹된 길에 헤매고 있는 자를 돌이키게 한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도로 병든 자를 일으키도록 권면한 그는 이제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을, 예배의 시간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를 돌이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돌이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고 마지막 유언처럼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야고보에게서는 “돌이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왜 나왔습니까? 울산고등학교 체육관 구경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예배 마치면 집에 가려고 온 건 아니겠지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에 따라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는 형제들에게 기도하도록 권면했습니다. 병중에 있는 형제들에게 장로들을 청해 기도하도록- 그리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 하도록 권면했습니다. 마지막 그의 호소는 신앙공동체의 교제에서 떨어지고 있는 형제를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한번 돌아봅시다. 함께 예배하던 형제자매 가운데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천 몇 백명이 참석하는 교회에서 여러분이 다 그 사람들을 살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역 소그룹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서 교제합니다. 연초에 다섯 명 시작했는데 한사람이 나오다가 안나와 버립니다. 한 사람은 놀기 좋아서 안나오고 한 사람은 먹고살기 바빠서 안나오고. 그러면 놀랍게도 한달 쯤 그렇게 지나보면 안나오기 시작한 사람들도 더 나와야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머지 남아있는 사람도 그 사람이 안 나올 거라고 간주하고 챙기지도 않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제는 남은 10월과 11월 두 달 동안에는 그런 사람들을 좀 챙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교회가 선출한 아홉 분의 위원들은 예배하는 공간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 해 주십시오. 그러나 거기 예배하는 사람의 성전을,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 교제하는 신앙공동체를 서로 돌아보는 이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 거기 가서 입을 대게 되면 공사가 안 됩니다. 지장이 많습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모두가 해야 될 일은 누가 우리 주위에서 지금 바깥으로 벗어났는지를 살펴야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적인 일 때문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그 마음속에는 믿음의 불씨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나오지 않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그는 점점 더 위험한 자리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유혹 때문에 그 유혹은 가진 사람은 가진 사람대로 받는 재리에 대한 유혹이 있고 갖지 못하면 뭘 먹고 살꼬, 입고 살꼬 하는 세상에 대한 염려 때문에 교회를 못나올 수도 있습니다. 주일날 ‘마우나 오션 리조트에 가서 골프나 하지’ 그러고 못나오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주일날 까지도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는 딱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라고 하면 그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 신경만 쓰면 될 수 있습니다.

건축업자들은 예배공간을 새롭게 하는 동안에 우리 모두는 예배할 사람들을 찾아내는 기회로 삼읍시다. 지금 예배의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이키게 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입시다. 몇 년 전 11월에 교인들을 함께 찾아서 예배하는 주일을 통해서 우리가 마음먹고 하니까 200명 늘었습니다. 그 때가 교회가 성큼성큼 나아가기 시작하는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보니까 아직도 뒤에 몇 백명 더 와도 앉겠지요? 위에까지 앉으면 얼마든지 더 앉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안 믿는 사람 전도해라 그 말은 아닙니다. 그 일은 우리가 해야 될 일이고 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이고 중요하게 여겨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곁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챙기라는 것입니다.

‘돌아서게 하라’는 말은 회심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그들이 이미 예수를 만난 형제요 자매입니다. 위험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위기에 몰립니다.

겨울밤에 길가에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지나가 버리면 추위에 얼어 죽을 수 있으니까 깨우려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신앙공동체 모두에게 영적으로 곁길로 간 사람들을 돌이키게 해야 될 우리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몇몇 지도자들에게 하는 충고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우선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내 형제들아” 라고 부른 것 보니까 신앙의 권속 모두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그 일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허다한 죄를 덮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남은 몇 달 동안 희년을 맞이하기 전에 모든 사람이 함께 회복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그 일에 우리가 관심을 쓰면 좋겠습니다. 여기 까지 나와서 예배하는 것은 공사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공사는 책임 맡긴 분들에게 다 맡기고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거기에 아름다운 현장에 함께 예배할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1월 1일이 딱 50년 전에 첫 예배를 드렸던 날입니다. 이번에도 주일이더라고요. 그 날은 누군가 손에 손을 맞잡고 그 동안에 우리 교회 발을 디뎠다가 탈락된 사람들을 챙겨서 함께 예배하는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앉을 자리가 없이 모여든 군중, 그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크신 하나님의 위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사를 위해서는 기도 해 주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찾는 겁니다.

지금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햇빛이 비치니까 겨울날씨가 따뜻한 봄 날씨 같네요 그렇죠? 봄 날씨는 노곤하면 눈을 감는 사람도 생기는데 설교 왜 듣는다고 그랬죠? 듣고 그대로 행동하기 위해서입니다. 행동하기 위해서는 내 주위에 내가 챙겨야 할 사람을 한번 생각 해 보십시오. 우리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한번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아멘.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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