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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문 앞 부흥회 (느 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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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부터 가을 대 성회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부흥이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하십니까? 부흥은 하나님의 소원이자 모든 교회의 소원입니다. 믿음이 있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라면,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심령들이 부흥되어야 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성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부흥되면 교회가 부흥 될 것입니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잘 느낄 수 없으나 우리의 신체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병들어 보면 몸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 몸에 병원균이 침입해 들어오면 온 몸은 사력을 다해 병균과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 회복되는 과정을 우리는 ‘부흥(Reviva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부흥도 이와 같습니다. ‘부흥’이란 하나님의 백성의 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자던 신앙이 깨어 일어나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역동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을 충전하는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차를 구입했습니다. 날마다 먼지를 닦아내고 왁스칠을 해서 차가 빛났습니다. 차를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나게 타고 다니던 어느날 차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길에 서고 말았습니다.
차에 엔진 오일을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엔진에 기름이 공급되지 않아 타고 만 것입니다. 자동차에 엔진 오일을 주기적으로 교환하지 않으면 엔진이 고장 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성령님의 정기적인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고장나고, 병들게 됩니다. 이번 성회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으신 분. 예배 시간에 감격이 없고 졸리기만 하신 분. 좋은 점을 보지 못하고 자꾸 부정적인 것이 보이시는 분. 입술에 찬송이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이 많은 분. 이번 부흥회를 통하여 우리교회 온 성도들이 다 은혜를 받고 힘을 회복하시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흥회는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모여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고 풍악이 있어도 잔치 집에 사람이 적으면 썰렁하게 됩니다. 많이 모일 수 있도록 힘을 다해야 합니다. 전도도 하고 동원도 합시다.

오늘 본문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지 70년이 지나 페르시아라는 신흥 강국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바벨론은 망하고 새로 들어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자국민의 종교와 풍습,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보호한다’는 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포로로 끌려온 유대민족은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고 고국에 무너진 성전 건축의 재건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스룹바벨은 제사장 예수아와 함께 유대인들을 인솔하여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됩니다. 70년만에 고국에 돌아온 사람들의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일 먼저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물론 방해꾼들로 인하여 성전 재건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70년만에 고국에 돌아온 그들의 열심과 뜨거운 신앙으로 성전을 재건하고 봉헌하였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본국에 돌아온 유대인들의 마음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1차 귀환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이 대부분 죽고, 유다에 귀환하여 살던 사람들과 그 이후에 태어난 자손들은 성전 재건 당시의 열정적인 신앙이 식어졌고, 백성들은 하나님이 금하는 이방인과의 잡혼이 흥행하고,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이 부패하여 죄악가운데 살고 있다는 소식이 페르시아에 사는 에스라에게 들려왔습니다.

에스라는 대 제사장 아론의 16대손으로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스라야의 아들로 바벨론에서 출생한 자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율법)에 익숙한 서기관이었습니다. 고국의 죄악상을 들은 그는 1,750명 가량의 남자를 이끌고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방인과의 혼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에스라의 강력한 결단의 촉구에 백성들은 탄식하며 회개하였으며 이미 이루어진 결혼은 취소하고, 이방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함으로 그 문제를 종결지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약 13년쯤 지난 후에 페르시아의 왕궁에서 아닥사스다 1세의 술 따르는 일을 맡고 있던 느헤미야가 고국 예루살렘 큰 환난이 생겨서 예루살렘의 성이 훼파되고 그 문들이 불에 타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왕에게 간청 하여 왕으로부터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받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고국에 돌아옵니다.(3차 포로 귀환) 산발랏고 도비야 일당의 방해를 무릎쓰고 52일만에 성벽 재건을 이룹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보다 14년 전에 먼저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운 사람이라면 에스라는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성을 다시 세운 사람입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7:10).
먼저 귀환한 제사장 에스라와 함께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합니다.
성전 건축과 성벽 재건이라는 외형적인 큰 역사를 이루었지만 예루살렘 내부의 영적 성벽은 그대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율법, 즉 말씀 앞에 온전히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학사 에스라가 주도한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의 놀라운 부흥성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부흥성회는 말씀의 역사가 놀랍게 임한 ‘말씀 부흥성회’입니다. 온 백성들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모였고, 말씀 듣고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심령이 새로워지고 그야말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공사를 완공한 후에 일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수문 앞 광장으로 모였습니다. 무너져 있던 성벽은 다 세웠지만 영적으로 무너져 있는 자신의 마음은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텅 비어있는 자신의 마음을 말씀으로 다시 채우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1. 진정한 부흥은 말씀 사모함에서 시작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자 사모하는 열린 심령입니다. 받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 크신 하나님의 역사가 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이 들어가야 합니다. 미국의 농담에 ‘거북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있답니다. 새는 9일간 먹지 않고 살 수 있고, 사람은 12일간, 개는 20일 간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500일 동안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참다운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는 신자를 ‘거북이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말씀의 기준을 놓아버리면 바로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말씀이 없을 때 사단이 우리를 마구 짓밟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주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향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건물 벽을 쌓을 때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잣대입니다. 도로에는 중앙선이나 차선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운전함에 기준이 됩니다.

시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37:31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준은 언제나 말씀이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혼연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들을 때 계급장 떼고 들어야 합니다. 겸손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할 때 그 말씀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부흥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해야 합니다. 자갈밭은 안됩니다. 길가밭도 안됩니다. 가시밭도 안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옥토라야 합니다. 그 때 그 말씀이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를 바꾸시는 것입니다.

영국 부흥을 주도했던 요한 웨슬리는 귀족들의 언어로 설교하지 않고 광부들의 천한 말로 설교했습니다. 그때 광부들이 주님 영접합니다.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왜입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들려 올 때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순종할 때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904년 영국의 남서부 지방 웨일즈의 위대한 영적 각성을 일으킨 한 젊은 광부이반 로버츠가 있었는데 그는 웅변의 기술도 없었고 폭 넓은 독서를 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던 유일한 책은 성경이었으며, 그의 가슴은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불탔습니다.

수년 동안 이반 로버츠는 복음을 선포할 기회를 갈망했습니다. 1904년의 어느날 로버츠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그가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계시 해 주셨습니다.
이 비전을 품고 로버츠는 설교할 기회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담임목사에게 설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지나치게 열성적인 이 광부의 요청에 목사님은 당황하여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계속 간청하는 바람에 목사님은 마음이 약해져서 허락합니다. “수요일 밤 예배 후에 설교를 해보도록 하게. 만약 누군가 듣기를 원한다면 말이야” 17명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이 젊은 전도자는 대담하게 그가 하나님께 들은 내용을 선포했습니다. 그 내용은
(1)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2) 우리의 삶 안에 있는 의심스러운 삶의 습관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
(3)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에 대해 순종해야 한다.
(4)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공공연히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버츠의 설교는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와 열일곱 명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불타는 듯한 손길을 체험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날 밤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설교자의 말을 듣기위해 왔고 불길은 다른 교회들로까지 급격히 번져갔습니다. 이후 30일 동안, 37,000명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자와 주로 영접했습니다. 5개월 안에 전국에 있는 10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삶을 드리는 역사가 있었으며, 그 후 약 2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웨일즈의 부흥으로 1904년 영국의 웨일즈에서는 판사들이 자신들의 흰 장갑을 반납했는데, 이는 별로 재판할 사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근로자들이 말씀듣고 변화. 술집안가고 쇼 안보고...술집과 극장이 모두 폐쇄되었습니다. 강간 사건도 없었고, 횡령이나 착복도 없었으며, 강도와 살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근로자들이 훔쳐갔던 쇳덩이, 부속품을 공장에 갖다 놓았습니다. 괴팍스럽던 성품도 변했습니다. 당나귀 학대도 중지되었습니다. 수많은 광부들이 변화를 받아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자 조랑말들이 그들의 지시를 못 알아들을 정도였습니다. ‘인간들이 왜 이래?’ 당나귀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으로 변화되면 성품도 바뀌어집니다. 음주가 반으로 줄었고, 사생아 출산률도 44%로 하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이런 부흥이 필요한 때입니다. 방천국! 피시방, 노래방, 안마방, 찜질방, 비디오방, 휴게방, 다방. . . . . 부흥이 시급한 때입니다.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면 이런 것들이 줄어듭니다. 술집들이 줄고, 살인사건, 성범죄들이 줄게 되고 판사들이 할 일이 없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 사경회가 일어나 말씀으로 변화되니까 주일성수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성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10%의 교인들이 상점문을 닫아 버리니까 평양경제가 마비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에는 불신자들도 아예 주일날 문을 닫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영적이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시대에 이런 부흥이 이 땅을 강타하기를 강타하길 바랍니다.

2.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모인 것이 누구의 요청에 의해 모였습니까? 아닙니다. 마지못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갈망하여 모였습니다. 목사가 시켜서 억지로 마지 못해서 하면 거기에는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부흥하는 교회는 성도들 스스로가 함께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들이 부흥합니다. 자원하여 기도하기 위해 모이고, 자원하여 순종하고, 자원하여 헌신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2절 말씀에 남자와 여자 중에서 말씀을 알아 들을만한 사람들은 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아마 3만 - 5만명 쯤 모였을 것입니다.

3절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무려 6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큰 부흥의 특징은 말씀을 듣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원하여 듣고자 하는 곳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들었습니까? 3절 하반절 말씀을 읽어보면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이면서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졸지 않았습니다. 한눈 팔지 않았습니다. 결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입니다.

5절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시간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편하게 앉아서 들은 것이 아니라 모두 일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최대한으로 존귀히 여기면서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앰프 시설도 없었습니다. 3만 명이 넘는 사람이 그 말씀을 들을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한 말씀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모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으로 받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능력이 됩니다. 지혜롭게 하십니다. 형통케 하십니다.

9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면서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기억하면서 일제히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3. 말씀에 대한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전해질 때마다 “아멘, 아멘”하면서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6절) 그렇게 할 때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성회에 부흥을 경험하기 원하는 성도들은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하면 설교하는 사람도 힘이 납니다. 왜냐하면 아멘 한대로 복을 받아서 성도들이 형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꼭 부흥회 때에만 그래야 할까요?
그 부흥운동은 믿음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은 진정한 부흥운동이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멘만 하고 적용이 없다면 문제입니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나가서 아멘의 삶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진정한 부흥은 영적으로 더 깊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와 찬송이 뜨거워집니다. 죄에 대해 깊이 통회를 합니다. 수많은 불신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합니다. 부흥은 확실하고, 크고, 실제적입니다.
부흥은 내 신앙생활의 변화입니다. 기도, 회개, 예배, 전도하는 것이 강렬해집니다.
느헤미야와 레위 사람들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11-12) 지도자의 말에 모두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말씀 앞에 눈물을 쏟으며, 춤을 추고 감격하며 기뻐했다고 해도, 결단과 순종이 없다면 거짓 믿음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다면 결코 부흥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말씀을 듣고 깨닫기만 하기 위해서 설교 말씀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듣고 깨달은 말씀을 이제는 자신의 생활 속에 적용함으로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설교 듣는 것이 오늘 예배의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그들은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의지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초막을 지었습니다. 인격은 지정의의 결합체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앞에 그 인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적인 깨달음과 감정적인 반응, 그리고 더 나아가 순종의 삶이 수반될 때에 진정한 부흥은 일어납니다. 신앙이란? 이 어느 것 하나가 모자라도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알고 바로 느끼고 바로 행동하는 신앙은 그야말로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록 펠러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록 펠러에게 일생동안 살아야 할 신앙의 지침을 남기면서 지켜달라고 부탁한 말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정확하게 드려라! 예배드릴 때 자리는 꼭 앞자리에 앉아라! 설교 말씀은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라!” 그 말씀대로 살았더니 거부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놀라운 복을 받고 뉴욕 시민들의 모든 수도세를 그들이 부담해주고 있습니다.

이번 성회를 통해서 성도들 각자의 심령에, 교회에 이런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 올 때 우리를 부흥케 하십니다.
그 말씀을 경외하십시오. 그 말씀을 받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 앞에 서십시오.
그 말씀에 대해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곧 그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치유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회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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