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유 있는 기쁨 (빌 1:15-21)

  • 잡초 잡초
  • 304
  • 0

첨부 1


지미 핸드릭스라는 록 음악의 기타 연주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 무대 위에서나 밖에서 난폭하게 행동하며 문란한 삶을 살았습니다. 1970년 어느 공연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자기의 기타를 부숴버렸습니다
로버트 맥기와 도날드 사포가 쏜 [평안을 찾아서]라는 글에 의하면,
어느 날 지미 핸드릭스의 공연이 마치자 관중들은 소리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열광하던 박수갈채가 갑자기 그쳤습니다. 지미 핸드릭스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고요한 정적을 깨며 그는 관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누구 참된 평안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무대 뒤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갑작스런 초청에 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약물과용으로 죽었습니다.
로마서 5: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께서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있을 때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배경, 사도행전 16장. 사도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 들어가서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 여인과 그 집 식구들 다 세례를 주고 그 집에서부터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한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 주었다가, 그것이 그만 귀신들린 여인의 주인에 의한 고소거리가 되어,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옥에서 함께 갇힌 실라와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는 놀라운 일을 경험합니다. 잠자던 간수가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 하자 그를 만류하고, 결국 그 간수와 간수의 온 집에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이 빌립보를 향한 편지를 쓸 때도, 그는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서, 빌립보 교회를 생각해도 군중과 폭동 그리고 관원들에 의한 체포와 채찍에 맞음, 간수, 차꼬, 감옥 등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의 확신은,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빌립보에 갔는데, 복음전도 대신 군중들의 폭동에 부딪쳤으며, 감옥에 갇혔고, 발에는 차꼬가 채워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매도 맞아야 했습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빌립보로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 복음전하는 것을 막으셨고, 밤중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들이 건너와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어, 그래서 마게도냐로 온 것이,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사도 바울의 뜻이 아니라, 성령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순조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순조롭기는커녕 고통만 더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움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확신하며 고백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처럼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중에는 간수와 그 권속이 모두 세례를 받고, 빌립보에서는 최초의 회심자가 되는 역사가 나타났으며, 그 간수는 그날 밤 자기와 자기의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갇혀 있었는데, 어려움당하고 고통당하였는데, 그것이 복음이 전파되는데 더 진전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그 순간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1:13,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비록 손에 고랑이 채워지고 감옥에 갇혔으나 오히려 날마다 교대로 그를 지키는 시위병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4장 4절에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빌립보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우리 자신이나 주위 환경에서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어쩌다 한두 번, 그것도 잠시 잠깐 기뻐할 수는 있지만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기뻐하라”, “기쁨”, “평강”, “만족”, 혹은 그와 유사한 다른 단어들은 적어도 20번 정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입니까?
빌립보서의 최고 개념은 ‘이득’(gain)이라는 개념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사도바울의 열렬한 사랑이 그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의 사도 바울의 기쁨은 그냥 기쁨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할 일이 뭐 있나? 불평한다고 원망한다고 감옥에서 나갈 것도 아니고, 그러니 마음이나 편하게 갖자”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기뻐하는 이유는 분명한 이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득의 기쁨은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희생함으로서 얻어지는 기쁨이었습니다.

1.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갇혀있다는 사실에도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쇠사슬에 얽어매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그를 지킨 시위대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또 다음날 아침에는 교대한 다른 시위대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복음을 곳곳마다 전하는 중요한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군인들, 이들은 한 곳에 머물지 않았고 또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 중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주변의 군인들에게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더욱이,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반대와 저항에 직면해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는 확신과 담대함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안에서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운 기쁨의 열매가 있었습니다.

2. 사도 바울은 어떻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됨에 기뻐했습니다.
빌립보서 1:15-18,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을 생각하고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 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사도 바울은 자기를 좋아서 하든, 자기를 싫어서 하든,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것으로 기뻐하였습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라도, 나와 뜻이 맞지 않는 자라도,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한다면,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이 구원 받는다면 그것으로 바울은 기뻐하였습니다.

3. 사도 바울은 그의 고난당함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게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는 죽든지 살든지 그것에는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는 것에만 간심을 쏟았습니다.

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서” 기뻐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마음.’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으로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빌립보서 2:6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사도 바울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스스로를 드린바 되었기에 기뻐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재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제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희생제물이고, 이때 제단 사이를 오가고 성소의 거룩한 기물들 사이를 오가는 제사장의 활동이 봉사로 알려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불신자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는 중에도 기뻐하였습니다.

6. 사도 바울의 또 다른 기쁨의 요소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지식”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8-11,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지식, 자랑거리 등등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그것들 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지식은 아무리 많이 알아도 역시 세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갖게 합니다.

그 모든 사도 바울의 기쁨의 요소를 하나로 정리 한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도 바울, 그는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신이야 어떻게 되던,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되고,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고,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 받으신다면 그것이 곧 그의 기쁨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도바울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고, 그 삶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였습니다. 자신은 비록 육체적으로 고통당하지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 되고, 존귀케 되고, 영광 받으신다는 사실이 곧 그에게 이득이 되어 기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득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이득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일까? 왜 어떤 그리스도인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서도 신앙이 또는 교회가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안 된다고 불평하는 걸까?

1. 자기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혹은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불평 안 합니다. 봉사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오히려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봉사하지 아니하는 사람, 희생할 줄 모르는 사람은 늘 불평합니다. “왜 나한테 뭘 안 해주느냐?” “왜 나한테 관심이 없느냐?” 그럽니다.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황금률이라고 말하는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교인들 역시 사람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주면 다른 사람도 내게 관심을 가져 줍니다.

2. 불평의 원인은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주로 청소년 대상에 관심이 있을 때, 기타 잘 치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인간관계 훈련이나 레크리에이션을 하려면 기타를 쳐야 했으니까요. 지금도 피아노 잘 치는 목회자 보면 부럽습니다.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스스로를 낮추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가보니 다른 부부 또는 가족들이 매우 화목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침에 다투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뭐냐?” 그러면서 그 원망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다른 화목한 가정에 갑니다. “난 힘들어 죽겠는데 자기들은 뭐가 좋아서” 그래서 교회의 다른 성도들이 보기 싫어졌고 결국 교회조차 나가기 싫어집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삶에는 도무지 장래가 없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자신들을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들에 대해 기분 좋게 느끼려고 한다면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고린도후서 10:12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의 가치와 뜻은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고후 10:17.18)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 하시는 자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하느냐 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불평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립 낸시는 그의 책 [은혜가 그토록 놀라운 이유]라는 책에서 “이 세상은 은혜에 목말라 있으면서도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평 그러나 그 원인은 영적기갈에 있는 것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영적인 존재가 곧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기갈을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서 채우려고 합니다.
필립 낸시는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가 만들어진지 200년이 지나서도 인기곡 10위 안에 들어간 것도 신기한 일이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송시를 쓴 존 뉴턴은, 한 때 예수님을 믿지 않던 노예 상이었으나 그러면서도 은혜에 목말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 후 그 은혜에 대해 감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쓴 찬송 시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그의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은혜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은혜의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 들을 에베소서 2:7에서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요약 하였습니다.
왜 기쁨이 없고 불평과 불만만 있는가? 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이 비뚤게만 보일까?
그것은 내게 이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게 이 풍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빌립보서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으니, 내게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 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환경에서 기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환경에서 기쁨을 찾았다면 기뻐하기는커녕 불평만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감사노래(하박국 3:17-18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환경은 만족하지 않지만, 오히려 불평할 여지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환경에서 오는 고통을 부인하는 것 아닙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아픔을 부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어서 자신의 힘과 능력이 되어 주실 것이라는 진리에 근거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 진정한 기쁨은 환경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욕심을 친구는 만족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 그의 환경은 엉망이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요, 평화요, 치료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31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그들에게는 먹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만나입니다. 아마도 처음 그것을 받은 백성들은 엄숙하였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날마다 먹는 똑같은 음식에 싫증이 났습니다.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민 11:6)
불평하는 그리스도인들.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복에 무감각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저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공기가 오염되었어요. 그렇다고 코 막고, 입 막으면 죽습니다. 공기 속에 있는 산소를 우리는 계속 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믿는 바울은 다른 것 다 잃어 버려도 바로 그분 하나님,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모와 남편과 아내, 아이들 그리고 여러분의 이웃들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과 언제나 함께 하시길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기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