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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망자 요나 (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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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인들의 삶을 잘 표현한 드라마 중에 리차드 킴벌이 주연한 "도망자"라는 외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방영된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외과의사였던 주인공이 아내 살해의 누명을 쓰고 정처없이 도망다니는 그런 내용의 드라마였습니다. 낯선 곳에 가서 열심히 일하여 자리를 잡을만 하면 추적하는 형사들이 들이닥치고, 또 정처없이 도망자의 길을 떠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때때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이런 모습과 같지 않는가 느껴봅니다.

오늘 말씀은 "도망자 요나"라고 하는 꽤 자극적인 제목으로 준비하였습니다. "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들어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1절에서는 아밋대의 아들 요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으로, 2절에서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쳐서 외치라는 사명을 말씀으로 주시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전수에 대한 각오라든지, 결단으로 이어지지않고 오히려 역방향으로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고 하는 3절의 시작은 전혀 주님의 요청과는 동떨어진 행동과 생각을 요나가 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라고 하는 순접 접속사였으면 좋을 뻔 했는데, "그러나" 라고 하는 역접 접속사로 시작 함으로써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뜻과 동일선상에 있지 않고 뭔가 어그러져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고집과 불순종의 접속사 "그러나"를 통하여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불순종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 주신 사명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머뭇거리거나 뭉개지 말고 떨쳐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사명자들을 환영하는 곳이든 대적하는 곳이든 가리지 말고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고백하는 찬송가사에도 보면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세째는 외치라는 것입니다. 불의를 보면서 외면하거나 벙어리되지 말고 담대하게 외치라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외치는 것이 증인의 사명인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도시 니느웨로 가서 외쳐야 할 이유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선포와 다름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들의 죄악이 상달되었으니 반드시 심판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복된 전달자로써,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써의 역할을 요나보고 감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싫다는 것입니다. 할례받지 못한 앗수르의 이방인들이 왜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입어야 하느냐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었습니다.

세계선교를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가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등지는 호응과 협력이 좋은 반면, 유독 반감을 가지는 지역이 있는데 바로 일본입니다. 유독 일본선교를 하자고 하면 얼굴이 경색되어 편안하지 못한 언사가 나오기 일수입니다."왜 일본을 선교합니까? 그 일본놈들은 망해야 마땅하지요...." 이런 반응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외국의 어느 학자가 우리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 내용을 보고 기겁을 했어요. 특히 근대사를 가르치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정도를 넘게 가르쳐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세계화시대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이런 모습들이 요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이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얼마든지 받아도 좋지만, 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죽어야 마땅하고 유황불로 심판받아야 마땅한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려고 그러시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요나 자신의 뜻과 하나님 당신의 뜻이 틀린다고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요나라는 이름은 대단히 부드러운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비둘기"라는 뜻을 가진 이름은 그의 부친 아밋대가 '아멘'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것과 같은 맥락의 신앙고백적인 이름이었습니다.

그 신앙고백적인 이름을 가진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비둘기 같이 순전한 의미의 삶을 기대하며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소나 양을 드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새를 드리게 하였는데, 그 새 중에 유일한 제물이 바로 비둘기였습니다. 비둘기의 의미는 순전하고 순종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을 드리기에 합당한 것으로 선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의 이름을 요나라고 지었을 때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가라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비둘기라는 의미가 부정적으로 쓰여진 적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비둘기 같이 어리석은 백성들"이라거나 "완악하고 고집센 백성"이라고 할 때도 비둘기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아밋대는 아들의 이름을 후자의 의미를 가지고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의 처신을 보면, 분명 후자의 의미가 그에게 더욱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만 구원해도 충분할 터인데, 왜 이방인을 구원하려고 그러시는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왜 하필이면 나보고 가라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투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 사명까지 받았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요, 얼마나 행복한 가정입니까? 우리 많은 동역자 중에서 저를 부러워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 부모님이 목회를 하셨던, 존경받는 목회자였던 것을 굉장히 부러워합니다.

이번에는 입법총회를 갔는데, 제가 전혀 모르는 분하고 이야기 중에 ‘아, 아버님이 황용진목사님이군요. 그 분은 성자시죠.’ 저는 그 성자의 아들이니까 도매급으로 점수를 따는 거예요. ‘아휴, 아드님목사님이 어련하시겠어요?’ 저는 색깔이 있는 목사인데, 믿음의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플러스인지 모릅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들을 위해서, 아들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 우리 김경원장로님, 박정자권사님, 우리 민웅, 민경, 영승, 그 장로님 가정 부부와 아이들 이름까지 줄줄이 외워서 기도하시는 분이 아버님이예요,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세요? 아들의 교회의 장로님가정이니까 우리교회의 목회 수첩을 펴 놓고서 그저 새벽이면 일어나서 교회 장로님으로부터 가족들 이름을 기도하시다 보니까 이름을 다 외우셨어요.

어느 교회 권사님 하면 그 남편과 아이들이름이 저보다 더 빨리 나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기도하고 계시다라는 말입니다. 그런 기도하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이고, 행복한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역자 중에는 자신이 1대 신앙의 가정이요, 1대 목회자가 되어서 모든 신앙의 삶을 개척하면서 해야 하는 그런 분들은 너무너무 힘들어합니다. 자기 친구도 믿음의 친구가 없습니다. 자기 일가친척도 믿음의 가정이 없습니다. 자기 주변이 어떠한 배경도 믿음의 배경이 아니라 어떤 공동체 가도 그는 힘들어 합니다. 집안이 모여도 힘들고, 동창회 가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친구도 믿음의 친구요, 집안들도 믿음의 집안입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그것을 감사하다고 느끼고 감사하며 산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감사인 줄 믿습니다.

요나는 사실상 감사가 넘쳐야 할 사람인데, 지금 불평으로 불만으로, 얼굴이 뚱뚱 부어져 있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하는 일을 자기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라. 가서 외쳐라. 그랬더니 요나가 벌떡 일어났어요.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일어났어요.

아이들 자는 것 깨워서 ‘얘, 너 오늘 시험이라며, 아침에 7시까지 출발해야 된다며.’ 그러면 막 일어나가지고 화가 나서 확 나가 버리는 거예요. 저녁이면 ‘얘, 내일 시험이니까 일어나서 공부 좀 해야지.’ 그러며 확 일어나서 옷 입고 나가버립니다. 일어나서 공부하는게 아니라 일어나서 나가버립니다.

지금 요나가 일어나서 사명을 감당하려고 사명의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튀어가는 거예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요나가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낯이라고 하는 표현은 굉장히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대한다고 하는 말은 곧 주의 제단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낯을 대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주의 제단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원합니다라는 의미가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여호와의 낯을 피한다고 하는 말을 봉사의 자리에서, 섬김의 자리에서 도망치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요나는 이 귀한 사명을 외면하고,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행동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지역적으로, 혈통적으로 자기의 생각의 한계 속에 하나님을 두었습니다. 이스라엘만 떠나면, 이 자리만 떠나면 해방되겠지. 과거의 기도하시는 분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문구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요즘은 그렇게 기도하면 사람들이 졸지요. 저 틀에 박힌 기도소리 안 들을 수 없을까?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지요.

기도를 맡은 분들은 늘 기도에 대해서 개발해야 됩니다. 신선한 언어로, 현재적인 상황에 맞는 표현으로 늘 고민해야 합니다. 주일낮예배를 기도하는 분들은 일주일동안 쓰면서 이번 한 주간동안 이번 기도의 최고의 제목이 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다른 분들에게 이번주 기도인데, 우리교회 최고의 우선적인 기도의 제목이 무얼까 물어보면서 대통령 만나는 대표가 여론을 조사해서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이슈가 무엇인가를 알아서 만나는 것처럼 내가 기도인데, 내가 도대체 어떤 기도를 해야 동감이 되고, 아멘이 될까를 고민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맨날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찬양대부터 교회학교, 유치부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그 소리 맨날 녹음된 것 들어보면 한 소리, 그런 기도는 이제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좀 써 서 하라는 거예요. 그래야 발전이 있잖아요. 발전이 있기 위해서는 써야 합니다. 그것은 창피한 것 아니거든요. 장로보고 써서 하라고 그런다고 하는 그런 장로님이 계시다면 우리 교회 장로님으로 자격이 없어요.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이 요나가 자기 생각에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다고 하는 이런 생각보다는 이 가나안 땅, 이 팔레스틴만 떠나면 이 사명에서 행방되겠지란 생각, 요나는 자기의 고집 때문에 영적인 판단이 어두워 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전제한 대로 요나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고, 말씀으로 양육 받았어요. 그 아버지께서 요나에게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은 전능한 분이야. 어디나 계신 분이고, 무엇이든지 아시는 분이야. 그렇게 교육을 받았을 것 아닙니까? 요나가 형상적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하는 하나님의 개념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예요, 어디나 계시고, 무엇이든지 알고 계시고, 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런데 왜 엉뚱한 이 가나안 땅, 이 팔레스틴 땅을 벗어나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이것이 안타까운 문제입니다.

분명히 그 집사님 같은 분이, 그 권사님 같으면, 그런 판단, 그런 말을 안 할 텐데, 어떤 시점에서 어떤 상황에서 기가 막힌 일이라고, 기가 막힌 행동을 한단 말이예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요나가 오늘 이렇게 행동한 것처럼 그의 신앙의 가정, 그의 신앙의 배경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자기의 고집과 자기의 편견 때문에 영적인 분별력이 꽉 막혀 있었어요. 영적으로 깜깜한 상태가 되었어요.

그리고 자기의 생각이 편협되어지고, 좁아져서 ‘그래, 이 자리만 피하면 될거야.’ 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였지만, 선지자의 사명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대하는 것이 거기가 자신의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도망치기 위해서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일어났다는 말은 결심했다는 말입니다. 결단했다는 말입니다. 그래 이렇게 해야지, 결심을 했는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망치기 위해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순종하기 위해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도망을 치다가 얼마나 일이 잘 풀리는지 도망치려고 욥바라고 하는 항구로 달려갔더니 거기에 배가 있습니다.

배가 떠나버렸습니다. 아니면 풍랑이 일어서 배가 떠날 수 없다고 그랬으면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보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배가 멀리 가는 다시스는 저 지중해 끝이거든요. 지금으로 말하면 큰 유람선이 있는 거예요. 배만 있으면 뭐합니까? 자리가 있어야 지요. 배편을 끊어보려고 하니까 자리도 좋은 자리가 남아 있어요. 이게 척척 들어 맞는 이야기입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습니다. 자리도 남아 있습니다. 내 생각, 내 계획이 척척 맞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지. 종종 내 생각대로 잘 되어지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자주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잘 안 되면 하나님이 막으시는가? 뜻대로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자기 뜻대로 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렇게 편리하게 생각하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있어요. 이런 신앙의 편리주의자들은 바로 이 자리에 없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사명의 자리 니느웨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사명의 자리를 포기하고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사명의 자리를 버리고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계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 두어야지. 교사 밖에서 볼 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가까이서 해 보니까 이거 너무 골치가 아픈거야.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에는 그만 두어야지. 거룩한 예복을 입고, 성전 모든 성도 앞에서 폼 잡는거 괜찮아 보였는데, 해 보니까 한 시간 먼저 와야지. 오후 세시까지 연습해야지.

보통 골치 아픈게 아니예요.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 해야지. 평안의교회 너무 일이 많아. 평안의교회, 앞서가는 교회에서 하려니까 골치가 아파. 올해까지만 하고 딴데로 가야지. 저도 딴 데로 가면 편하잖아요. 오라는 데도 많은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은 때때로 고난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길이 편안하거나 평탄할 수도 있는데, 그 길이 축복의 길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추구하는 삶은 이지라이프, 편안한 삶이 아니라, 샬롬라이프, 평안한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은 고난의 자리에서도 가능한 줄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에게 광야의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광야의 길이 평안한 길입니까? 광야의 길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광야의 길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감사해라. 얼마나 수준 높은 성도의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곧 편안한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한 길을 택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사명을 받았지만 그 사명을 우리의 생각대로, 마음대로 재단하고, 마음대로 판단해서, 그 사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원망을 하면서 자기의 생각과 방법으로 도망치던 요나, 순결한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로 쓰임받으라고 세워준 요나가 이제는 어리석고 고집불통인 이스라엘의 요나로 바뀌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시작하면서 제단에 신비한 보물처럼 그렇게 비둘기 같은 제물로 우리가 주님 앞에 시작한 우리가 이제는 고집불통이고, 이제는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앞서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평가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고집센 비둘기 같이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잠언 14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게 보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 지금 요나의 입장에서는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했던 계획이 얼마나 근사한 계획인지, 욥바로 갔더니 배도 있고, 배를 타려고 했더니 좌석도 있고, 얼마나 자기가 판단한 길이 잘 판단한 길이었는지 그는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필경 망하는 길이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언약하신 축복의 근원이 되는 말씀인데, 내가 다른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기는커녕,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 때문에 고통을 주고, 고난을 주는 그러한 주인공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순결한 비둘기의 삶, 순전한 제단의 산 제물이 되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어나야 합니다. 분명히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 일어남이 도망치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일어나야 하는 우리의 결단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귀한 말씀,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에게 2006년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지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말씀 안에서 자라며,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았던 요나였지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욕심이 분별력을 흐리게 하며 영적인 모든 부분들을 어둡게 함으로 고집과 편견과 불순종의 특징만이 남아있는 요나로 전락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옵소서. 주님 진정으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요청을 귀담아 경청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성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교회답기 위하여 우리가 어떠한 삶의 자리에 서야 하는가를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로 새롭게 새롭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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