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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욕하고 심문하고 (눅 22:6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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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도 내가 하면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남을 향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다가도 자신을 향해서는 아주 관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잣대와 기준이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합니다. 내 위주가 아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그 기준이 주님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나를 정말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내가 먼저 상처를 입고 내가 먼저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것이 그렇기에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무엇이 참 사랑인지 이 사랑의 잣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모욕하고 때리며 심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때리면서 모욕을 합니다. 또 그들은 예수의 눈을 가리고 말합니다.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그들은 그밖에도 온갖 말로 예수를 모욕하면서, 예수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모욕당하고 얻어맞고 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왜 또 예수님을 공의회에 세우고 심문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이 베푸셨던 많은 이적과 역사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 모든 역사들을 부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들의 생각으로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란 시골뜨기에 불과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리스도라면 예수님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모욕하고 때리며 회롱하면서도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대가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해주시오.” 하면서도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믿지 않을 것이요 내가 물어보아도, 여러분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부터 인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오.” 하니까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라고 여러분이 말하고 있소.” 할 때 “그렇군요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셨군요” 하고 그 앞에 엎드린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언이 더 필요하겠소? 우리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직접 들었으니 말이오” 하고 예수님은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이요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또한 제사장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제사장의 집을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믿음에 관해서는 앞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인정할 수가 없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인정하지 않으니 당연히 예수는 죽어야 마땅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모욕하고 때리고 희롱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심문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우리들이 저지르고 있는 모습도 이에서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애써 작은 자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섬김을 받을만한 사람만 섬기려고 합니다. 있는 사람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섬겨야 되겠죠.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내 생각에 맞는 사람이라면 좋아하며 같이 어울립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더군다나 내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작은 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 아니던가요? 말썽만 부리는 사람, 도무지 사람 같지 않은 사람, 도무지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습니까? 아니 내게 상처를 주고 내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또 어떻습니까? 그래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세상적인 모습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자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나를 귀찮게만 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라면 나도 마땅히 그를 대적하고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가 나에게 한만큼 나도 갚아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기에 철저히 배격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기에 철저히 외면합니다. 아니 심지어는 외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괴롭히고 못살게 굴기도 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아니다 싶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어떻게 합니까?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시고 또 그렇게 마지막까지 기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하나가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가 되지 않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서로 대적하고 원수를 대하듯이 할 때가 있지를 않습니까?

그럴 때 주님은 마치 자신이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시더란 말입니다. 주님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를 하나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를 낫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채찍에 맞으셨건만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고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누가 보다 더 귀여움을 받는다 싶으면 속상해 하지를 않습니까? 누가 나보다 앞서 간다 싶으면 딴지를 걸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럴 때 주님은 슬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썽꾸러기다 싶으면 더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밉게 느껴지거든 더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한번도 나를 향해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셨습니다. 한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슬픈 얼굴로 나를 보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나를 위해서 기도하실망정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우리들을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 잡아 주십니다. 그 주님처럼 우리도 손을 내밀어 잡아주어야 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도와줘도 안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끝까지 믿어주고 격려해주며 세워나간다면 아무리 연약하고 쓸모없을 것 같은 사람도 주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 섰던 사울이 귀한 전도자 바울이 되는 것을 보십시오. 아무 짝에도 쓸모없던 것 같았던 마가를 보십시오. 그가 전도자들의 사기를 얼마나 떨어뜨렸습니까? 오죽하면 바울이 화를 내며 돌아섰겠습니까? 그런데 그를 끊임없이 믿어주고 격려해주는 바나바가 있었기에 그가 베드로의 수제자가 되고 바울로부터도 나중에는 “그도 함께 데려오도록 하라 그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에 아흔 아홉이 실수투성이라고 해도 한 가지 가능성을 보아 주십시오. 내게 실망만 안겨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그도 주님 앞에 귀하게 쓰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항상 마음에 새기십시오. 아울러 앞서 수고하는 사람을 보면 함께 힘을 합쳐서 더 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고요.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려고 할 때 주님도 기뻐하시더란 말입니다. 달리는 말에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설사 이건 아니지 싶은 모습이 보일 때라도 더 격려해줌으로 그가 힘을 내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들이 다투고 갈라집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들이 그렇게 시끄럽습니까? 바로 나만이 잘 믿는 것이요 나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모양 저 모양의 사람들을 다 쓰십니다. 그들을 다 함께 모아 하나님의 전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나와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다 갖추어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다 온전한 사람이어야 한다고요? 당연히 그래야 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아직 온전히 갖추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함을 따라 온전한 성도의 모습으로 갖추어져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문제가 없다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죠?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우리 가운데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감싸 안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감싸 안으며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사랑의 사람들 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시오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였습니다. 모욕하고 때리고 심문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예수님이 말해도 그들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오른 쪽에 앉히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남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신 주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 대신 주님이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단 말입니다. 문제는 이를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주신 것을 믿을 때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신 것을 믿을 때 우리가 나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가 모든 질병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해야 될 고통을 주님이 대신 당하셨음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함의 찬양을 주님께 돌려 드리십시오.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럴 때 우리가 온전해 집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악한 마귀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죄의식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다 갚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으로부터 이제는 자유함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마땅히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었노라고 고백해야 마땅합니다. 내가 모든 죄의 굴레로부터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고백하십시오. 내가 모든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하다고 선언하십시오. 나는 더 이상 죄로 인해 고통당하지 않는다고 시인하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이 다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주님이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믿음의 고백을 듣기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이 믿음의 고백을 드리십시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대신 채찍에 맞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의 은혜로 내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이 믿음의 고백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며 이 믿음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온전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를 시험하고 괴롭히는 굴레가 있습니까? 그것이 죄이든 아니면 어떤 질병이든 아니면 삶의 왜곡된 모습이든지 간에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해결하여 주셨노라고 따라서 나는 이제부터는 그 어떤 것으로 인해서도 매이지 않는다고 고백하십시오. 우리를 다투게 하고 시험에 빠지게 만드는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이제는 벗어났노라고 믿고 고백하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있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하십시오. 누구는 안 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마음은 사단이 주는 마음일 뿐입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고 하는 마음에 속지 마십시오. 나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벗어날 수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이미 나를 죄와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미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마십시오. 우리가 매일 것이 있다면 오직 사랑의 굴레뿐입니다. 누가 밉게 여겨지십니까? 정말 치가 떨리도록 밉게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더욱 사랑해야 될 사람이라고 고백하십시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더 돌보아 주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할 사람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행해 사랑의 손길을 내미십시오.

또 그랬다고요?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붙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가고 마침내는 바다 속으로 내려가고 물고기 빗속으로 내려갔던 요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붙들어주시는 주님의 손길 아래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우뚝 서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불평을 터뜨리는 그를 끝까지 하나님이 다독거려 주시지를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나 스스로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안 된다는 생각에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상대방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도 될 수 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주님의 옷자락을 붙드십시오. 끝까지 사랑의 손길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세워나가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이를 위해 주님이 먼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 주님의 사랑을 들고 나가십시오.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던지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나를 강하게 세우는 도구라고 믿으십시오. 나를 더욱 좋은 하나님의 자녀되게 만드는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이런 믿음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사람들,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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