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참으로 신뢰한다는 것 (마 4:5-7)

  • 잡초 잡초
  • 340
  • 0

첨부 1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은 두 번째 시험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패배한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5-6) 첫 시험에서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을 인용해서 마귀를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마귀도 이제 말씀을 이용해서 시험합니다. 마귀가 인용한 말씀은 시편 91:11-12절입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원래 이 말씀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길에서 지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네 모든 길에”라는 말을 빼버림으로 말씀의 본래 의미를 왜곡했습니다.

이를 보면 마귀도 때에 따라 적절하게 인용할 만큼 말씀을 잘 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는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이용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그 말씀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은 무시하고 필요한 부분만 편집해서 사용합니다. 이단들의 성경 사용도 이렇습니다. 겉보기에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존중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편집해서 이용할 뿐입니다. 성경 구절을 많이 아는 것보다도 바르게 알고 있어야 미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서 전반적인 이해가 있어야 말씀을 잘못 해석하지 않게 됩니다. 말씀을 대충 알고만 있으면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아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바탕이 됩니다.

사단이 두 번째 시험에서 노린 것이 무엇인지는 역시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그 핵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7) 예수님은 사단이 제시한 대로 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꼴이 된다는 것을 간파하셨습니다. 사단의 제안이 참으로 교묘한 것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시험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사단의 제안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될까요? 예수님은 사단이 인용한 말씀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지 않고 “또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보호해 주신다는 약속은 신뢰하시면서  ‘또’ 생각해야 할 것이 있음을 덧붙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고 해서 무작정 위험에 뛰어드는 것은 그 분을 신뢰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작정 위험으로 뛰어들면서 정말 보호해주시는지 실험해보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때로 신앙인의 길에는 믿음으로 모험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용기와 만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지만, 노예 백성들이 건넌다면 우리도 건널 수 있다며 그 뒤를 따라 추격했던 애굽 군사들은 모두 수장되었습니다. 똑같은 모험적인 행동이지만, 히브리서 11장 29절은 하나는 하나님을 신뢰한 일로,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시험한 일로 평가합니다. 신뢰와 시험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는지 자의적인 행동이었는지의 차이였습니다. 홍해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그렇게 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역시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일은 무조건 들어주셔야 할까요? 불신자들과의 경쟁관계에서 무조건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편이 되어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 길을 가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꼭 지원해 주셔야만 됩니다. 한번 지켜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사단의 제안이 예수님께는 어떤 시험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죄인들을 섬기고 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십자가 말고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기드론 골짜기에서 성전꼭대기까지의 높이는 대략 140 미터인데,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하면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한번만 과시하면, 많은 추종자들이 생길 것이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훨씬 쉽고 편하면서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빵의 메시야가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는 메시야로 살되 그 방법만 좀 바꿔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죄인을 섬긴다는 것, 그들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한다는 것은 낭만적인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에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의 잔을 옮겨주시도록 자신의 소원을 아뢰셨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당당하게 독배를 받아마셨는데, 우리 주님은 왜 그처럼 죽음을 담담히 대처하지 못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그냥 죽으시는 것이 아니고 인류의 모든 죄 값을 담당하여 죽으셔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전에 불구로 태어난 자식이 고생하며 사는 것이 안타까워서 죽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자식을 위한답시고 행한 일이지만, 막심한 후회와 죄책감에 자수하여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출감한 후에도 죄책감을 지울 길이 없어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죄의 무게라는 것은 당사자 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이전에 있었고, 앞으로 있을 모든 인류의 모든 죄책을 모두 담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책을 감당하시느라 심장이 파열되어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심장 근육은 아주 튼튼해서 파열되는 일이 좀처럼 없습니다. 교통사고와 같은 강한 외부적인 충격이 있어야 파열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책을 홀로 담당하시느라 그 심장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명을 감당하셔야 할 방법이 이러한 십자가였음을 생각한다면, 사단의 제안이 얼마나 달콤하고 매혹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씩 섬겨서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 번 화려하게 등장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 신속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가장 온전하며, 가장 지혜로운 방법임을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딴 방법을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수많은 병자들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기적을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기적은 메시야 됨을 효과적으로 전시하려는 수단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기적 때문에 몰려드는 무리들을 피하여 다른 마을들에 전도하러 가셨고(막 1:32-38), 나음 받은 병자들에게 잠잠하도록 일렀습니다. 기적들은 단지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타났을 뿐, 대중들의 마음을 이끄는 심리적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능력을 효과적으로 전시해서 군중들의 심리를 한곳으로 결집시키고 일을 도모했던 것은 인류의 모든 영웅들이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마귀는 그런 방법을 예수님께도 제시했던 것이고,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로 여기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언제나 비효과적으로 일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중의 환호를 받으면 안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제시해주신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것을 참으로 믿기에, 그 방법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거나,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으로 말할지 않고,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나 목적을 위한 수단과 방법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나타내 보여주실 수도 있고, 대중으로 환호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것을 과시해서 사람들을 동원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첫 번째 시험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원칙에 충실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사는 방법도 말씀에 의해 제한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을 너무 거창한 영웅적 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름대로 큰 뜻과 계획을 품어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위해 큰 뜻을 품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뜻에 순종해야 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내 뜻에 굴복하게 하려고 떼를 쓰는 기도는 바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중히 여기며,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고 말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나름의 방법’은 아무리 효과가 있어도 사단이 제시한 방법이며, 참된 신뢰는 방법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답게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지, 효과나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요동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