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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안과 건강의 축복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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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식 주례를 하다보니 신랑과 신부를 가까이서 보게 됩니다. 식장에서는 신랑도 땀을 뻘뻘 흘리고 신부도 땀을 뻘뻘 흘립니다. '여름에 결혼을 해서 더워서 그런가보다', '아마도 비디오 카메라의 불빛이 너무 강렬해서 저런가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겨울에 결혼하는 사람들도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기대감도 크지만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도 한몫 자리하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신랑과 신부 못지 않게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려움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믿고 살면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하여 가던 도중에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치신 일에 대하여 기록한 내용입니다. 혈루증이란 한없이 피를 흘리거나 하혈처럼 정기적으로 피를 유출함으로써 혈액부족의 결과를 초래하여 마지막엔 목숨까지 앗아가고 마는 만성병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은 부정한 질병이어서 병자는 물론 병자가 만진 것도 다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하였습니다(레15:25-30). 그래서 병자는 병의 고통과 함께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격리 당하는 몸과 마음과 정신적으로 총체적인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여인은 이렇게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운 혈루증을 12년 간이나 앓으면서 그동안 모든 재산을 다 탕진했지만 그래도 고치지 못하고 지내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즉각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피눈물을 한없이 흘리고 있는 우리 모두도 예수님을 만남으로 깨끗하고 완전하게 회복되고 축복 받는 새로운 축복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이 여인의 신앙은 과연 어떤 신앙인가요?

1. 겸손한 신앙

  본문 27절"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 여인이 무리 가운데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야이로가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부터 예수님을 만났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경우 다른 병자였다면 틀림없이 야이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예수님께 애걸하며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 병이 몹시 중했으면서도 결코 서둘거나 경망하게 굴지 않고 조용히 기회를 찾다가 아무도 몰래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을 만졌습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누구도 모를 정도로 은밀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이 가진 겸손한 신앙입니다. 예수님까지도 모르게 하려고 했던 것은 겸손한 신앙의 발로였습니다. 오만하고 교만한 신앙은 상처와 문제의 원인이 됩니다. 어거스틴은 가장 큰 죄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교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단의 부하들이 어느 날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우리의 활동이 무척 저조하다. 이 말세의 때에 우리가 한 사람이라도 더 미혹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그 방법에 대해 논의하기로 하겠다."
  대장인 듯한 사단이 모임을 갖는 이유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한 후, 주위를 둘러 보았습니다. 한 사단이 일어섰습니다.
  "이런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장 사단이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야! 이 멍청한 놈아! 있는 걸 없다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
  저쪽에 앉아 아까부터 대장의 눈치만 살피던 한 사단이 일어섰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계시되 예수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대장 사단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그게 그 소리지. 아들이 분명한데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겠냐? 좀 그럴듯한 계략이 없나? 내가 너희들을 믿고 있는 게 잘못이지. 어이! 자네 한 번 말해 보게."
  그는 맨 끝에 앉아 있는 사단을 지적했습니다. 지적 받은 사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무겁게 입을 떼었습니다.
  "대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엄연한 사실을 아니라고 얘기해 봤자 우리 말에 걸려 넘어질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가 그의 아들인 사실에 대해서는 손대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다 알겠으나 차차 믿겠습니다'라고 미혹하여 영영 기회를 잃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장 사단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번져 올랐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맞았어! 바로 그거야."

  우리는 사탄의 작전에 속아 '차차 믿겠습니다'라는 마음을 버리고 '지금 믿겠습니다'라고 결단을 해야 합니다. 믿기로 결심하고 결단할 때 성령이 임하시고 천사가 호위하며 하나님께서 한없이 기뻐하시며 하늘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결코 미루지 맙시다. 우리의 생명이 언제까지 연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한과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기회를 선용하고 잡아야 합니다. 믿음의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축복의 기회도  잡아야 합니다. 이 시간 혈루증 여인처럼 겸손하게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를 바랍니다. 살짝 만지고 고백하여도 예수님은 다 아시고 고쳐주시고 축복하십니다. 겸손하게 예수님을 믿고 섬김으로 평안과 건강의 축복을 늘 누리며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절대적 신앙

  본문 28-29절"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낫겠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여자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순간 믿음대로 즉시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믿음대로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병고침을 통해서 믿음이 눈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믿음입니다. 이런 절대적인 신앙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사회생활에 상당히 제한받는 여자의 신분으로서 모든 환경적인 총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님 뒤로 가서 옷을 만졌습니다. 예수님의 옷만 만지면 낫겠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어디에도 길이 없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고 생명이라는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간이 고칠 수 없었던 혈루증을 깨끗하게 고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들이 예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소유해야 합니다. 양보나 타협하지 아니하는 절대적 신앙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이 절대적 신앙이 아니고 때와 시간과 사람과 장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신앙은 아닌지 점검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상대적 신앙은 편하기는 하지만 아무런 능력과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즉, 바울도 그냥 바울이 아니라 티테디오스 바울로, 요한도 요한이라고만 부르지 않고 티테디오스 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티테디오스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인들이 자기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고 붙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이방 세계에 증거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근심에서 해방된 자들이라는 것을 세상 가운데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반응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가령 재수하는 사람과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일반적으로 재수하는 사람은 슬퍼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은 기뻐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록 재수를 하게 되더라도 그 속에 기쁨이 있어서 예수 믿는 것을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가난할지라도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감사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소록도에 가보면 손가락 없는 나환자가 감격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감격을 가지고 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런 성도의 모습을 볼 때 믿지 않는 사람이 묻습니다.
  "도대체 너에게 그런 기쁨과 감격을 갖게 해주는 비결이 무엇이냐?"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이것을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에 자기 이름 앞에 디테디오스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심령 가운데 믿음의 자리와 근심의 자리가 같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100퍼센트라고 할 때, 믿음이 100퍼센트 꽉 차 있으면 근심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5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면 나머지 50퍼센트는 근심이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만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근심을 쫓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심령이 믿음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믿음이 100% 충만한 절대적인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라면 반드시 고치시고 강건하게 하신다는 초월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바뀌고 흔들리던 상대적 신앙에서 반석과 같은 절대적인 신앙의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절대적인 신앙이 병을 고치고 사탄을 쫓아내게 됩니다. 절대적인 신앙은 강력한 승리의 무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 마음, 언어, 행동, 삶 전체가 절대 신앙화 되도록 합시다. 조금도 의심치 않는 성도, 결코 염려하지 않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은 절대 신앙인을 기뻐하시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봅시다. 모세, 다니엘, 바울, 많은 순교와 전도자들의 신앙은 누구나 무엇과도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는 절대적 신앙의 소유자들입니다. 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절대적 신앙으로 평안과 건강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선포적 신앙

  본문 33-34절"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보면서 입을 여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꾸하였습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네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 여인은 도저히 자기를 감출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서 자기가 만졌다는 것을 고백하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청하실 때 서슴지 않고 나아가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은 아름답고 훌륭한 신앙입니다. 구원은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백하고 선포하는 이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더 이상 병자가 아닌 영육이 건강한 사람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원과 건강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입을 열어 받은 은혜를 고백하고 선포할 때 기적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셨는지를 담대하게 고백하고 간증하고 선포해야 우리의 믿음도 더 책임적인 믿음이 되고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입을 다물고 받은 은혜와 축복을 간직하고만 있다면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는 중단될 것입니다.

  복음 선포와 관련해서 잊혀지지 않는 스토리가 하나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도원장이 햇병아리 수도사들에게 설교연습을 시킵니다. 그 중에 어떤 한 수도사에게 설교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수도사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무척 당황하여 얼떨결에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를 할지 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알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수도사가 "나도 모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이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그 다음날 한번 더 설교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이 수도사가 설교하러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 수도사가 전날과 똑같이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어떤 설교를 할지 아십니까?"
  어제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예, 압니다."
  그러자 그 수도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알면 됐습니다. 다 아는데 무엇하러 설교합니까?"
  그러고는 다시 내려왔습니다. 수도원장은 노발대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한 번만 더 해봐라."
  셋째날일 되었습니다. 그 수도사는 다시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를 할지 아십니까?"
  그러자 이제는 청중들이 절반은 알고 절반은 모른다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도사가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주십시오."
  그러고는 내려왔습니다.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이 수도원장이 박수를 치며 칭찬하기를 "이제까지 우리 수도원에게 행했던 설교 중에 가장 뛰어난 명설교입니다."하며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도사가 말한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가 그 수도원의 표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식인종이 아파트를 보았습니다. "야! 종합선물세트다." 모든 것을 먹는 것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삽시다. 누구에게나 문제와 질병과 아픔이 있습니다. 이 혈루증을 앓는 여인처럼 겸손과 절대적 그리고 선포적 신앙으로 세상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평안과 건강의 축복을 오늘 감동의 날에 오신 모든 분들과 수고하고 충성한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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