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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옥합을 깨뜨리고 (막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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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때 군인인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픔을 딛고 교회에 나온 부부는 하나님께 거액의 헌금을 바쳤습니다. "좋은 아들을 이십 년 동안 우리 곁에 두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혼을 받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것을 보고 다른 집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도 저 분들처럼 감사헌금 합시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니 우리 애는 아직 살아 있지 않아요!" "바로 그것 때문에 하자는 거요." 평범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열 살이 되면 대략 6천 개의 단어를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부모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말이 "감사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성인이 되면 평균 2만 5천 단어를 알게 되는 데,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단어 역시 "감사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쿨리지는 "가장 축복 받은 사람이 되려면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깨닫는 사람만이 행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 시기입니다. 베다니의 시몬은 예수님께 문둥병을 고침 받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초대하여 대접을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마치시고 식사하는 중에 한 여인이 들어와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3절에 보니 "순전한 나드 한 옥합"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그 속에 담긴 향유를 예수님께 아낌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옥합의 뚜껑을 열어 향유를 붓고 다시 향유를 넣어 계속 사용하는데 이 여인은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전통에 의하면 하나의 목적을 위할 때만이 옥합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오직 주님만을 위한 목적으로 순전한 향유를 준비하여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지극한 감사를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의하면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로 밝혀집니다. 그녀는 자신과 오라비를 살려주신 예수님을 향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그 속의 향유를 아낌없이 쏟아 부은 것입니다.

감사절을 앞두고 어떠한 감사를 하십니까? 옥합을 깨뜨리는 감사이십니까? 옥합에 담긴 향유의 적은 부분만을 드리는 감사이십니까? 본문의 여인은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모았던 향유를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다 드린 것입니다. 그녀는 단순히 옥합의 향유만을 드린 것이 아니라 그의 전부를 드린 감사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감사가 동일하게 이루어질 때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감사가 될 줄로 믿습니다.

다같이 찬양합니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가 그 발 위에 입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험한 산길 오르신 주님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위에 입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위에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주님 다시 이땅위에 임하실 그 때 주의 크신 사랑으로 날 받아주소서". 마리아처럼 여러분의 옥합을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최고로 여기며 그에게 합당한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옥합을 깨뜨린 감사는,

첫째로 사랑이 있는 감사입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되었을 때입니다. 길을 가는데 앞쪽에서 문둥병 환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기도해주고 싶은데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병자를 지나친 것이 잘못입니까?" "너는 왜 그냥 지나쳤느냐?" "더럽게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그래? 너는 그 사람보다 나은 게 있는 줄 아느냐? 너는 그 병자보다 더 더럽고 추한 냄새나는 죄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받아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프란체스코는 즉시 그 병자에게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었던가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자신의 인생이 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시는 시몬의 집을 찾아가 가장 귀한 향유를 드리고 자신의 사랑을 눈물로 고백하며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크면 감동과 감사가 큰 법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주님만 생각해도 이 여인처럼 죄사함과 구원의 감격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납니까? 나의 가장 귀한 것 아니 생명까지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가장 좋은 것을 드림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으면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수없이 고백했을 것입니다. 감사에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이 있는 감사만이 참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이 감사를 완성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면 많이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깊이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크게 사랑하면 크게 감사합니다. 사랑은 감사를 통한 큰 기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만 있어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향한 계속적인 사랑이 계속적인 감사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감사 드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정성이 있는 감사입니다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미국 선교사가 갠지스 강가로 나갔습니다.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강둑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잘 생겼고, 다른 한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자였습니다. 선교사는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 여자가 두 아이들을 갠지스강에 빠뜨려 신에게 제사하려고 하는구나" 생각되어 부리나케 달려가서 그 부인을 붙들고 "제발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마시오. 그건 쓸데없는 일입니다. 왜 아이를 희생시키려고 합니까?" 하고 간곡히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한참 후에 멀리 갔던 여인이 다시 걸어옵니다. 그런데 두 아이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생기고 정상적인 아이는 없어지고 시각 장애아를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너무 놀라서 "아니, 신에게 바치려면 눈이 멀어 인생을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 아이를 바칠 것이지, 왜 성한 아이를 바치셨나요?" 라고 안타깝게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여인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 인도에서 섬기는 신은 우리가 최선의 것을 정성으로 드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아이를 드려야지, 어떻게 불구의 몸을 가진 아이를 드리겠습니까?" 그 순간 선교사는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리지 못했던 자신의 지난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감사의 본질적 요소는 정성입니다. 마리아에게는 누구도 따르기 힘든 정성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정성은 귀한 향유를 드린 것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깁니다. 그리고 온갖 비난에도 묵묵히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닦습니다. 3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한번에 예수님을 위해 바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정성이 담긴 감사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도 그녀에게 축복하십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기념될 만한 감사는 정성이 담긴 감사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옥합을 깨뜨리며 정성이 담긴 예물로 주님께 감사할 때 주님은 기뻐 받아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헌신이 있는 감사입니다
밴스 해브너(Vance Havner)라는 설교가가 '전적인 헌신' 이라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 매우 지적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가능하지도 않은 전적인 헌신을 설교하시나요? 전적인 헌신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합니까? 목사님, 그냥 80, 90%만 헌신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맞는 것이 아닙니까?" 이때 밴스 해브너는 이런 반문을 던졌습니다. "부인, 만약 남편이 부인에게 90%만 헌신하고 나머지 10%는 다른 여성에게 헌신해도 만족하시겠습니까?" 이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헌신이 전적인 헌신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헌신이 아닙니다." 일정 부분만 주님께 헌신하고 나머지 부분은 세상을 향하는 이중적인 헌신은 헌신이 아닙니다. 100%의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감사함이 헌신이 있는 감사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3백 데나리온의 거금에 해당하는 향유를 드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감사는 물질 뿐 아니라 몸과 마음 심지어 목숨까지 전체를 바칠 수 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이 있는 감사만이 참된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깨어지지 않은 옥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전적인 헌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옥합을 깨뜨려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옥합이 오랜 세월을 흘러오면서 단단하게 굳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강팍해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하고 강팍한 옥합이라 할지라도 옥합은 반드시 깨뜨려져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내 믿음과 마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더욱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런데 깨뜨려진 옥합은 향기를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깨뜨리는 고통 뒤에 따르는 은혜입니다. 나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위해 헌신할 때 믿음의 향기는 진동합니다.
해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이때 우리의 감사가 본질과 다른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감사에 국한된 것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표시요,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옥합을 깨뜨리며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감사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감사입니다. 사랑이 있는 감사입니다. 정성이 있는 감사입니다. 헌신이 있는 감사입니다. 부디 금번 추수감사절에 주님께 옥합을 깨뜨리는 감사를 통하여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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