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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하는 교회는 ... ?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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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월 30일 우주의 공간을 가로질러 달에 도착하여 소위 월면차(Moon Buggy)를 이용하여 달 표면을 시속 11km로 9,6km을 주행하고 돌아온 아폴로 15호 우주 비행사 제임스 어윈은 "나는 우주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달을 주행하며 우주 모든 곳에 가득찬 그분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우주선이 지구로 가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을 때 이 황홀한 작고 아름다운 지구를 바라보며 성경의 유명한 한 구절을 반복하여 묵상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3:16)
  이 우주여행이 계기가 되어 그는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 온지 얼마 안 되어 복음 전도자가 되어 . 199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전도본부를 두고 전 세계를 다니며 이 우주 속에 던져진 연약한 인생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선교사로서 살아가는 20년의 여생을 바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동아프리카 선교정탐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가는 날 오는 날 합하여 11박 12일 동안 9인승 승합차로 2,300여 km를 여행하여 두 나라 콩고와 우간다의 각 중요 지역을 방문하였습니다.
  거의 하루에 10시간 정도를 차를 타고 이동하는 여행을 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고백하며 로마 선교를 가슴에 품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는 지난 00 월에 동 아프리카 우간다로 최정호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시작된 아프리카 선교의 비젼이 이번 방문을 통해서 더 새롭게 되고 확실아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는 선호도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납니다. 그것은 일단 거리가 멀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 항공편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어도 그래도 약 20시간 정도를 가야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동남아 지역보다 한국 선교사의 수가 적습니다. 이번에 방문한 콩고 동부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인구 26백만 명에 남북한 4배의 넓이를 갖는 우간다에도 한국 선교사 15 가정이 전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당시 초대 교회의 모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에 비하면 크기도 작고 연대기적으로도 나중에 설립되었지만 세계선교를 위해 주께서 결정적으로 사용하신 공동체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안디옥 교회처럼 이 시대를 밝히는 선교 공동체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1. 넓은 가슴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선교사를 정의하며 "선교사란 세상을 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선교사가 되려면 가슴이 넓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하는 교회는 가슴이 넓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선교하면서 선교 대상자들을 품을 수 없다면 선교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 교회는 구성인원 그 자체가 글로벌한 선교적 교회 곧 가슴 넓은 교회였습니다.
  1절에 나타난 지도자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다양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우선 인종의 다양성입니다.
  여기 지도자들 가운데는 흑인들도 있었습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출현하는데 여기 니게르가 니그로와 같은 말 곧 흑인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구레네 지역이 북 아프리카이어서 아마도 이 사람도 흑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흑인 백인 아세아인이 함께 어울려 교회를 섬기는 포용력이 넓은 공동체였습니다.

  그 다음은, 신분의 다양성입니다.
  여기 안디옥 교회 지도자가운데는 헤롯의 젓동생 마나엔이라는 사람이 포함되고 있었습니다. 여기 헤롯은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 베뢰아 지역을 통치한 헤롯 안디바스였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젖을 먹고 자란 왕실의 귀족도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다른 평범한 서민 출신의 지도자와 나란히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종 교회 나오면서도 사람의 신분을 따져 사귀는 가슴이 좁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주께서 사랑하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섬길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은사의 다양성입니다. 
  1절의 시작에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으니 ... .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은사를 가진 이 들이 함께 모여 주를 섬기며 주님의 미션 즉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 교회 공동체에게 세계 선교를 맡길만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안디옥 교회의 다양성을 한마디로 가슴이 넓은 교회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하려면 가슴이 넓은 사람, 가슴이 넓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2.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사는 가슴이 발달해야 할뿐 아니라, 귀가 또한 발달해야 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듣는 귀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말합니다.
  선교사는 주님의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는 무엇보다 그가 시키시는 음성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훈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민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교회사의 거목들은 모두 이런 주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목사 님 같은 분들은 다른사람들이 모두 신사참배가 국가 의례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할 때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갖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사람의 말보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어느 날 하나님을 예배하다가 성령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성령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언제 성령의 소리가 들렸습니까?

  1) 예배할 때 들렸습니다.
  본문에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본래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표준 새 번역은 이 부분을 바로잡아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할때에 .." 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2) 금식하며 기도할 때 들렸습니다.
  예배하면 예배했지 왜 금식까지 했을까요? 이것은 금식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하고 매달리는 간절한 기도의 표현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을 예배 중에 주님의 음성 듣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때 드디어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 ...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다시 말하면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에 헌신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3) 선교지는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전쟁터에 임하는 병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상관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음성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휘관과 병사사이에 커뮤니 케이숀이 두절되면 그 싸움은 결과가 뻔한 것입니다.
  선교는 미션입니다. 명령 그 차체입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불러 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혹은 전장의 병사가 그 날 그날 주께서 불러 명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를 통해 어떻게 미션이 수행될 수 있겠습니까?
  지휘관의 작전지시는 전장의 상황에 따라 매우 가변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병사는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깨어 그의 지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소 아세아를 향하여 선교 여행을 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답답해 하던 밤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가 진행하는 방향과 반대쪽인 유럽 마케도니아(그리스)사람의 환상이 나타나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발걸음을 바꾼 것이 기독교의 유럽 선교의 놀라운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그때 바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선교를 하다보면 그 때 그 때 돌발적인 여러 상황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기 위해 우리는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열린 귀를 갖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3.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발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넓은 가슴, 열린 귀에다가 순종하는 발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귀를 열어 놓고, 주의 음성을 들어도 그 음성에 순종치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안디옥 교인들은 이 음성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했습니다. 이내 바나바와 바울은 순종의 발걸음으로 세계선교의 현장으로 떠나갑니다.
  이 발걸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발이었는지요. 복음을 위해 순종하는 발걸음이 아름다운 발걸음인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존재의 복과 소유의 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유의 복은 땅에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무엇인가 갖고, 누리고, 소유하는 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존재의 복은 내면적인 복인데 이것은 인격적 복이라고 말합니다.
  삶의 보람, 의미, 가치,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이런 것을 추구합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복을 추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적이고, 영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복입니다.
  내가 아무리 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원치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셨다면 이것은 내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시는 복에 대하여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자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은 인간의 복과 저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28:2절).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면 모든 복을 다 받는데 무슨 복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다 받는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곧 내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3-5절을 보겠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3-5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이것은 그가 어디에 있든지 다 자기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자녀들도 복을 받고, 그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농작물도 복을 받고, 더 나아가서 모든 축산물이 복 받고, 이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식탁에 먹는 것이 다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내 삶 전체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모시는 최고의 신앙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므로 복을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장래에 기업으로 받을 땅에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나아갔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요셉을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도 복을 주셨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면 나 때문에 다른 사람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복 없는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도 복이 없습니다.
  복 없는 남편 만나면 가족들이 복이 없습니다. 복없는 사람과 동업하면 함께 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있는 사람과 같이 다녀야 됩니다.
  가장 복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감옥에 가면 감옥이 복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죽음도 복이 됩니다. 다시 부활하니까요.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복을 다 상실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복을 주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바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발을 가지고 복을 받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그랫습니다. 우리 양정교회가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박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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