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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투는 생명을 해친다(삼상 1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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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생명을 해친다

  어떤 수도사가 허허벌판 사막에서, 영성수련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도 인격이 훌륭하고 경건해서, 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성자라고 불렀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악령들은, 그를 누가 먼저 유혹하는지 내기했다. 그래서 성적 유혹의 악령이, 그 수도사를 시험했다.

  먼저 예쁜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육체적으로 유혹했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돈과 명예의 악령이 유혹을 했지만, 그 수도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의연하게 기도를 하였다. 초초해진 악령들은 마지막 방법을 썼다. 수도사로 변장해서, 그 수도사에게 달려오면서 이렇게 소리 질렀다.

  “수도사님 당신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로 방금 선출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그렇게 평안하고 초연했던 수도사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질투가 끓어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악령은 질투의 유혹으로 성공했다.

  유대인 민담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천사가 한 여자에게 나타나,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어떤 축복을 받고 싶으냐? 또한 네가 원하는 친구 한사람에게도 축복을 해 주겠는데, 너에게 주는 축복보다 갑절의 축복을 주려한다. 그런 친구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 여자는, “아니! 나보다 갑절이나 더한 축복을 준다고?”하면서, 곰곰이 생각하던 여자는 갑자기 질투하고 있는 한 친구가 생각났다. 그래서 “천사님, 저에게 주실 축복을 친구에게 갑절이나 더 주신다는 말이 정말입니까? 그런 친구가 딱 한사람 있습니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천사는 ‘이 여인은 참으로 대단하다.’하면서, “그러면 내가 너에게, 어떤 축복을 주기 바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여자는 천사에게 “제 눈을 하나만 멀게 해 주세요?, 요즘 이 세상을 두 눈으로 보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니,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려고요”하면서,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 여자는 자신의 눈 하나를 잃는 한이 있어도, 질투하는 친구의 두 눈을 멀게 하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모든 죄악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감정을 가진 죄악은 바로 질투다. 이처럼 질투는 생명을 해친다. 그래서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라”(시14:30)고 했다.

  질투를 한문으로 풀어보면, 질투의 질(嫉)은 여자(女)에 병을 뜻하는 질(疾)이 붙어있다. 여자가 병들었다는 글자다. 시샘하는 투(妬)는 女와 石을 합한 글자로, 여자가 돌을 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여자가 병들어(미쳐서) 돌을 들었다는 뜻이다. 아주 좋지 않은 뜻이다.

  그런데 질투(嫉妬)라는 말에는, 여(女)자를 ‘2개’나 붙임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질투심이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보면, 이런 생각은 미신에 불과하다. 질투를 느끼고 괴로워하는 정도는,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개선장군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런데 이 개선행렬에 여인들이 나와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고 환영하였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어서, 비극이 시작된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8)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때부터 사울은 질투의 화신이 되었다. 그러면 질투는 어떤 피해를 가져오나요?
1. 인생을 망하게 만든다.
삼상9:2을 보면, “기스의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사울이 하나님께 부름 받는 장면인데, 사울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미남에다 키도 컸다. 다른 사람은 그의 어깨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키가 훤칠한 사람이었다. 또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렸을 때, 그 나귀를 찾아다니다가 찾지 못하자, 아버지를 생각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다.

  선견자로 불리는 선지자를 만나서, 사울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아주 예의바르게,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히 여긴다. 또 사무엘이 사울을, 이 나라의 왕으로 세우겠다는 뜻을 보이자, 사울은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며, 베냐민 지파 가장 미약한 자라고 이야기 한다”

  사울은 자신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아주 겸손했던 사람이다. 왕이 되어 전쟁을 할 때도, 뛰어난 지략과 용맹성을 발휘하였다. 그는 지혜롭고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자,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상한 사람으로 변질되어 간다.

  아주 귀중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은 점점 망하는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질투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질투 때문에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미처 다 발휘하지 못하고 일생을 비극적으로 끝맺고 말았다. 질투는 자신을 망하게 만든다.

  헬라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의 자기 친한 친구가, 챔피언이 되어서, 축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축하받는 운동선수의 경쟁자였기에, 마음속에 질투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 챔피언을 기념하여 세운 동상이 보기 싫어서, ‘저 동상을 넘어뜨리고 말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매일 저녁,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는 어두운 때를 틈타, 동상의 기초를 팠다. 동상은 정말 넘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상을 넘어뜨리기 위해 땅을 팠던 사람은, 그만 이 동상에 깔려 죽고 말았다. 바로 질투가 자기 자신을 망하게 만들었다.

  이런 내용의 영화가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아마데우스’라는 작품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궁중 음악장인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참으로 훌륭한 음악가였다.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랐다.  신앙심도 깊고,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진 모차르트의 공연을 보고, 그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오만하고 방탕한 모차르트를 보면서, 왜 신은 성실한 자신을 두고, 모차르트에게 천재성을 부여했는지 괴로워하며, 신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강한 질투심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던 모차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던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는데 살리에리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환상에 시달리도록 교묘하게, 진혼곡 작곡을 의뢰하여,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자신은 모차르트가 죽은 후 32년간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다가, 자신도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하고 만다.

  만일 그가 모차르트를 질투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존경받고, 인기를 누리면서, 음악사에 귀한 업적을 남기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질투가 이 사람을 망쳤다. 만일 사울이 다윗을 격려하고 세워줬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울 왕의 역사는 정말 달랐을 것이다.
2. 질투는 인생을 마비시킨다.
질투는 질투하는 대상에게,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집중시키는, 아주 강력한 감정이다. 그래서 주야로 질투하는 사람만 생각난다. 주야로 그 사람만 묵상하게 된다. 밤에 잠을 자다가, 깨서 생각날 정도다.

  질투하기 시작하면, 주야로 질투의 대상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그래서 질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시기, 미움, 이런 감정의 늪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인생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일상적인 인생의 태도가, 무너져 버리고 만다. 삶이 마비가 된다. 사울 왕이 그렇게 되었다.

  9절을 보면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여기서 주목이라는 말은, 질투하는 눈으로 (계속) 쳐다보았다는 말이다. 그때만 아니라 계속해서, 질투하는 눈으로 보았기에, 자신은 질투의 늪에 빠져서, 영영 헤어나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사울왕의 생애는, 오로지 다윗에 대한 질투의 생애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삼상 24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전투가 약간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어떤 사람이 다윗이 가까운 ‘엔게디’에 있다고 보고한다(24:1).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전쟁하다 말고 사울 왕이 다윗을 잡으러 쫓아간다. 지금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판국에, 왕이라는 사람이 전쟁은 미뤄두고 다윗을 잡으러 간다. 그러니 나라꼴이 무엇이 되겠는가? 그만큼 질투는, 일상적인 삶을 마비시켜 버리고 만다.

  질투의 생리는 마치 게의 생리와 같다. 게를 담은 바구니에는 뚜껑이 필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게가 바구니 둘레로 기어오르면, 다른 게가 쫓아와서 반드시 끌어내린다. 그래서 게들은 영원히 바구니 바깥의 세계로 나올 수 없다.

  질투는 우리의 정상적인 생활을 다 빼앗아간다. 더 나아가, 결국 질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다윗을 질투 했던 사울의 최후는 어떻게 끝나는가? 사울 왕은 점점 능력을 잃어갔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왕이 되어간다.

  그는 마침내 전쟁에서 패배한 후, 마침내 적군 앞에 포로 될 처지가 되자, 가기 옆에 있던 병사의 칼에 엎드려서, 스스로 죽고 말아, 비극적인 죽음으로 자기 일생을 끝내고 만다.
이렇게 비극으로 끝맺게 하는 질투의 배후에는, 악령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10),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내렸다고 한다. 이 악신이 사울을 충동질 하면서, 다윗을 죽이도록 조정했다.

  성경은 모든 죄악, 그러나 특별히 질투의 감정 배후에는, 악한 영이 있음을 보여 준다. 신약에도,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약3:14-15)라고 했다. 질투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4대 비극 오셀로를 보면, 오셀로의 말을 잡고 다니는 기수 ‘이아고’가 나온다. ‘이아고’는 자기가 오셀로의 부관이 될 줄 알았는데, 자기가 부관이 안 되고, ‘카시오’가 되자, 화가 나서 자기 주인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어떻게 음모를 꾸밉니까?

  오셀로로 하여금 아내 ‘데스데모나’를, 계속 의심하게 만든다. 부관 카시오와 어떤 부정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자꾸 의심하게 만든다.
  계속 의심하던 오셀로는, 마침내 질투의 영이 활활 타오르자마자, 더 견디지 못하고 자기 아내를 찔러 버리고, 자신도 찌르고 죽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질투는 우리를 파멸시키고, 죽이는 죄악이다. 그 배후에는 사단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3. 그러면 어떻게 질투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1) 다른 사람이 되지 말고, 내 자신이 되라.
나는 갖지 못했는데, 남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질투가 생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남이 갖지 못하고, 없는 것을 나에게 주신 것이 있다. 이 달란트, 장점을 가지고 살면 된다.

  그런데 내 장점과 달란트를 개발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면 속상하게 된다. 질투심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비교의식의 반대인, 창조의식을 가지면 승리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나 같은 존재는, 하나 밖에 없다. 나와 똑같은 존재는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살면 된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어떤 면에서는 모자라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은 점이 있으니, 비교하지 말고, 장점을 가지고 인생을 부지런히 성실하게 살아가면 된다.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은 아니다. 탁월하면 좋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2등도 긴요하게 쓰임을 받을 수가 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해, 꼴찌도 사용하신다.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도 하신다. 쉽게 말하면, 아주 노래 잘하는 파바로티, 도밍고, 조수미가 크게 쓰임을 받지만, 1년에 몇 번 나가면 끝이다.

  그러나 별 볼 일 없는 성가대원들은, 주일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임을 받는다. 조수미가 누리지 못하는 특권이다. 조수미 같은 여자는, 일 년에 몇 번씩 밖에 쓰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쓰임 받을 수 있음에 만족하고 행복하면, 질투할 필요가 없다.

(2) 이웃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살리에리가 그렇게 질투한 모차르트는, 질투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모차르트도 어느 날, 훌륭한 후배 한 사람을 발견한다. 베토벤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질투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여기 탁월한 음악가 또 하나가 나타났다”고 베토벤을 세워주었다.
얼마나 당당한가? 베토벤의 음악과 모차르트의 음악은 엄연히 다르다. 사울이 다윗을 세워줬다면, 그를 축복해 주었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왕이 되었을 것이다.

(3) 성령님을 모셔라.
12절에,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질투하는 사울을 떠나셨다니, 얼마나 비극적인 말인가?

  그러나 다윗은 목숨의 위태함을 감수하면서, 사울을 깍듯이 왕으로 모셨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할 줄 알았기에 함께 하셨다(14).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섬기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주님은 많은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면서도, 그들을 용서하며 축복하셨다.

  우리들은 주님의 제자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오셨다. 따라서 자긍심을 가지고, 오히려 축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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