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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 영광을 보는 사람들 (시 97:6~7, 행 7: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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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어느 화공이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가 천하제일의 화공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이런 소문을 듣고 하루는 임금이 그를 불렀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무엇이 그리기가 가장 쉬운고?” “용입니다”. “어찌하여 용이 쉬운고?” 일반적으로 용은 그리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에 물어보았습니다. 화공은 용을 설명합니다. 눈은 이렇게 생겼고, 머리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용의 수염은 이만하며, 용의 발은 저만 합니다. 그리고 발은 어쩌구 발톱은 저쩌구 합니다. 임금은 “됐다, 그렇다면 그리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이냐?” “개나 소입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농을 하는고?” “용은 본 사람이 없어 아무렇게나 그려도 되지만 개나 소는 항상 보고 있기에 잘못 그리면 금방 압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이 그의 뜻에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눈으로는 본적도 없고, 그리기도 어렵습니다. 성화에는 고작 표현한다는 것이 후광입니다. 후광(halo)이란 ‘nimbus’라고도 합니다. 거룩한 존재의 머리에 두르는 원형으로 광채, 빛과 같은 상징을 통해 영적 품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주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주의 영광을 보고 싶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보아야 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로마인이 랍비에게 하나님이 있는 곳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내 눈앞에 나타나면 나도 그 하나님 믿겠다”고 합니다. 랍비는 로마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합니다. 로마인은 그 곳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로 들었는지 어디 한번 보자는 식으로 눈을 쳐들고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그만 눈이 부시어 도무지 쳐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볼 맨 소리로 “여보시오 세상에 누가 저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단 말이요?”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만일 하나님이 지으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인 태양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한 눈에 보겠다는 거요?” 사실 그렇습니다. 태양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 자연 속에 지극히 적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양도 볼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도 봅니다.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사제는 “인간은 온전하게 눈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모름지기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23:1에 시편의 기자는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고 합니다. 주님을 보면 세상이 보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세상을 바라보면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키엘케골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만 볼 수 있다면 그 눈이 복된 것입니다. 그 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되셨습니다. 변화산의 영광스런 예수님을 상상해 보세요. 희게 변한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났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더 희게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모세도, 엘리야도 다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보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예수님만 그들에게 보였습니다.

  로버트 몰간은 ‘홍해의 법칙’이란 책에서 다음에 당신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거든 “어떻게 하면 여기서 빠져나갈까” 질문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황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질문하도록 노력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의 영광을 위해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영광을 압니다. 영광을 보는 사람들은 만물을 보고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의 모습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요한도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11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고 합니다. 시편 19:1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라고 합니다. 만물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가 어떠한 자인지 스데반을 통하여 보시고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령이 충만한 자가 하늘 영광을 봅니다.

  사도행전 7:55에는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성령충만은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성령충만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성령충만해야 하늘의 영을 봅니다. 성령충만하여 하늘영광을 보세요. 하늘 문이 열리고 찬란한 영광이 비췰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자는 하늘 문도 엽니다. 그리고 하늘 문에서 비취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은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를 선택할 때에 자격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하늘 영광을 봅니다. 그들은 성령이 충만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늘이 열리면 성령이 강림하고 충만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영광을 봅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에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무덤에서 영광을 보셨습니다. 더러움에서 영광을 발견했습니다. 죽음에서 영광을 발견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세상에서 영광을 보고, 죄악에서 영광을 보고, 더러움에서 영광을 봅니다.

  우주 전체 피조물 가운데 단 두 가지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타락한 천사인 악마와 우리들과 같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신 사람이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타락한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영광을 돌리려면 거듭나야 하고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본회퍼는 “눈을 불순한 도구로 삼는 자는 그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눈이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중독이 다 그렇지만 특히 포르노 중독은 영을 흐리게 합니다. 치유하기가 힘듭니다. 우리의 눈이 영의 눈이 될 때에 비로소 완전히 치유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성령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는 영성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 지식, 정보, 기술로 사는 시대가 영성 시대입니다. 이런 역설 속에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는 과학으로 살 것이 아닙니다. 정보가 최고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를 사는 비결은 영입니다. 영성으로 삽니다. 우리 시대정신은 분명히 거룩한 정신이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정신은 분명히 성령이어야 합니다.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하늘의 영광을 보며 살 것입니다.

둘째, 하늘을 우러러 보는 자가 하늘 영광을 봅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보면 영광이 보입니다. 우리의 눈이 하늘을 향해야 영광이 보입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않습니까?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하늘의 것에 관심을 가지고,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하늘의 것을 소망하는 이런 사람이 하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우러러 본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라고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예수님 닮아가는 거룩한 자의 자세입니다. 스데반이 바로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를 보세요. 그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합니다. 죄가 있는 자는 우러러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늘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 사람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존경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반대말은 ‘내려 보다’, ‘깔보다’일 것입니다. 존경하지 않으면 내려보거나 깔볼 것입니다. 존경하지 않으면 우러러 보지는 못합니다.

  시편 86:4에는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세입니다. 하늘에서 밝은 빛을 본 사울은 그 빛을 보고 쓰러졌습니다. 너무나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아를 통하여 눈이 떠집니다. 새 눈으로 영광을 보고 노래하였습니다. 창세기 28장에는 야곱의 신비한 경험이 나옵니다. 야곱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비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문을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므로 하늘을 우러러보면 하나님과 그 영광 봅니다.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내립니다. 영광이 보입니다. 영광이 가득하게 됩니다. 어디에나 하늘을 우러러 보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됩니다.

  매튜 헨리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설치하신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장애물들을 제거하셔서 영광을 받고, 그 백성들이 장애물을 제거하도록 도우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고 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길을 가다가 목장에서 소가 울타리에 기대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소가 고개를 들고 있습니까?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기에 고개를 듭니다. 고개를 들면 하나님의 영광이 보입니다. 장애는 영광을 보게 합니다. 울타리는 고개를 들게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보여주시는 방법입니다.

  이집트의 신화에는 하늘의 신 호루스가 등장합니다. 호루스가 경쟁관계에 있던 신과 싸우다 한쪽 눈을 찔렸지만 나중에 회복됩니다. 치유된 눈은 생명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눈이 치유되고, 눈을 들어 우러러 보는 것은 승리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늘의 영광은 보입니다.

  속담에는 “소경이 하늘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늘이 덜 푸른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러러 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영광스런 존재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러러 보면 영광을 받으십니다. 서양의 속담에도 “눈은 입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눈은 많은 의미를 가집니다. 우러러 보면 하늘의 영광이 보입니다.
  시편 97:6에는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고 합니다. 눈을 우러러 보면 영광이 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에도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늘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그 영광은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결론

  어떤 사람이 골프를 치다가 번개에 맞아 죽었습니다. 시체를 보니 웃고 있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번쩍이니까 사진 찍는 줄 알고 웃었답니다. 모세는 하나님 영광의 광채를 보았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너무 빛이나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죽지 않고 내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

  하나님이 만들게 하신 성막을 보세요. 출애굽기 40:34-35입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건축하게 하신 성전을 보세요. 역대하 7:2-3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입니다. 지금 이 자리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함으로, 하늘을 우러러 봄으로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3에는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합니다. 훗날 하나님 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령충만함으로 하늘의 영광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영광을 보고, 장래 영광이 가득한 나라에 사는 소망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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