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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위에 은혜 (요 1: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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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이후의 세 사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땅 위에 계시면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하루는 그 병 고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한 번 방문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앉은뱅이 거지로 있다가 나음을 받은 한 남자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는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아, 왜 이렇게 사는가?" "주님, 내가 주님 앞에 큰 은혜를 입어 앉은뱅이에서 고침을 받고  새 사람으로 바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마음대로 안됐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 안 되고 먹고살기도 힘들었습니다. 내가 앉은뱅이로 구걸할 때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먹는 것은 해결이 되었는데 성한 몸으로 살려니 더 고달파서 술을 한 잔씩 마시다 보니 이렇게 중독이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창기로 있다가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된 여인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창기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자여, 왜 이렇게 사느냐?" "주님, 죄송합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서 새 사람이 되었는데 바로 살아보려고 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창기 출신이라고 상대도 해 주지 않고 나를 멸시하는 것이 계속 되다보니 내가 오히려 창기로 사는 것이 자유로워서 이렇게 몹쓸 짓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소경으로 있다가 눈을 뜬 청년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 젊은이가 불량배가 돼 있었습니다. "청년이여, 왜 이렇게 사는가?"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본래 장님이 아니었습니까? 눈을 떠서 세상을 살아보니 너무도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사람 중에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갈등을 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불량배로 사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을 만나보니 그 지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앉은뱅이가 걷는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은혜입니다. 창기가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된 것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은혜 받은 후에 감당을 하지 못했습니다. 은혜 받은 후에 일어나는 인생살이를 소화해 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은 것, 세례를 받은 것, 집사가 된 것, 장로가 된 것, 목사가 된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은혜를 대신 하는 은혜

  본문 16절의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중심말씀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우리말 문자로 보면 은혜 위에 중복해서 받는 은혜, 거듭 받는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헬라 원어로 보아야 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이 말을 '안티'라는 말로 썼습니다. 안티라는 말은 영어에 대신한다(instead of)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위한 은혜'라는 의미가 됩니다. 문자적으로 그런 뜻이지만 의미상으로 좀더 해석을 붙여야 합니다.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가 무슨 뜻입니까? 과연 은혜를 대신할 것이 있는가? 은혜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물을 대신할 다른 선물이 있는가? 의미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 은혜의 뜻입니다. 은혜가 아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 되게 하여 최종적으로 은혜가 승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더 쉬운 말로 풀이하면 은혜 받은 후에 은혜롭지 못한 일들을 은혜롭게 하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은혜로운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나면 갈등이 오고 장애물이 오고 시험이 옵니다. 은혜를 받았는데도 은혜를 역행하는 온갖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도저히 은혜가 되지 않는 그런 일들이 발생이 됩니다. 그와 같은 것들을 '은혜 되게 하는 은혜'가 바로 은혜 위에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오랫동안 투병을 하는 성도가 계십니다. 이 분은 수 년 동안 교회출입을 하지 못하고 병상에 계십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이 방문을 했습니다. 그날 따라 성도가 이런 말씀을 합니다. "목사님, 제게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수 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데 정말 힘듭니다. 제가 제 발로 걸어서 주일예배를 한 번만 드리고 하늘나라로 갔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여러분, 병을 앓고 투병을 해 보면 내가 건강을 회복하는 이 은혜만 입으면 만사가 아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건강을 막상 얻고 보면 은혜 되지 못한 일들이 또 일어납니다. 이 성도의 소원을 가만히 새겨보면 오늘 우리가 몸소 걸어서 예배당에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은혜 되지 못한 것들을 붙잡고 불평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세히 보면 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고시를 준비하는 한 젊은이를 압니다. 수만 명의 국가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합격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 싶어도 합격 이 후에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개업을 하시는 분들,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하시는 여러분들, 내가 돈만 벌면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막상 돈을 벌고 보면 거기서 또 다른 인생의 장애물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은혜 되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다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은혜를 말합니다.

  충만한데서 받은 은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데서 받는다. 그러므로 은혜 위에 은혜라고 했습니다. '충만'이라는 말은 채워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의미로 채워집니다.

  첫째는 공간적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컵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은 공간적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교인들이 가득 앉아있는 것은 공간적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시간적인 충만이 있습니다. 때가 다 되었다, 결혼할 때가 되었다, 군대에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은 시간의 충만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면 취학연령이 오게 되는 시간적인 충만이 있습니다.

  세번째는 제일 중요한 충만입니다. 내용의 충만, 가치의 충만입니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가치에 있어서 그 충만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충만을 받은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안 되는 것들까지도 은혜를 대신할 수 있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충만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얻으면 공간적으로 하늘나라를 얻습니다. 예수님을 얻으면 시간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면 지옥에 갈 죄인도 구원을 받습니다. 그 완전한 충만의 실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자는 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임종시에 말한 유명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지이다' 그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 말을 직접적으로 들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새겨보면 대단한 위인의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지입니다. 한 평생 살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 줄로 믿습니다. '주여, 내 인생은 거지였습니다. 그러나 내 일생 동안 내가 먹고 입고 누리고 오늘의 이 영광스러운 내 삶의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고백이 '인생은 거지'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주님, 나는 거지입니다'라는 빈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시고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뭐가 된 자처럼, 내가 무엇을 가진 자처럼 내 것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빈 마음에 거지와 같은 나의 손에 모든 것에 충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빈 마음의 충만한 그 은혜, '주여, 금년 7개월도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라는 마음으로 맥추감사절을 맞이하
시기 바랍니다.

  남미의 오지에 어떤 선교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 부유한 가정에 속하는 한 가정의 여인이 아이를 안고 선교사에게 왔습니다. "선교사님, 내 아이가 중병으로 지금 죽어갑니다.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만약 이 아이의 병이 낫는다면 우리 집에 있는 제일 귀한 보석을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이가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며칠 후에 그 어머니가 보석을 들고 왔습니다. 목사님 앞에 그 보석을 내어놓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습니다. "자매님, 감사합니다. 아들이 나았군요." "아닙니다. 목사님, 내 아이는 어제 죽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한 이후로 우리 아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 아들은 하늘나라에 간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기뻐서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 아들이 죽은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아들이 죽은 그 슬픔, 아들이 죽은 그 재앙, 아들이 죽은 은혜 아닌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한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은혜를 아는 자, 그에게는 은혜 아닌 것도 은혜로 받아들여지며 아멘하며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 은총을 입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 인생관

  이 땅 위의 인생은 세 가지 인생관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첫째는 운명론적 인생관입니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 이미 다 정해져 있다, 전생의 업보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운명을 초월할 수가 없다고 운명론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사주팔자는 운명입니다. 사주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변경시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사주팔자 이론이고 운명론입니다. 토정비결도 운명론입니다. 역술가들의 속임수가 무엇인줄 압니까? 당신의 사주는 도무지 손을 못 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운을 바꾸는 비법이 있다는 이것이 역술가들의 사기라는 것입니다. 사주팔자는 손 못 댄다고 해 놓고 자기는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속임을 당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많습니다.

  둘째는 인본주의 인생관입니다.
  사람이 다 한다는 것이고 사람이 중심입니다. 나치의 히틀러가 바로 그 표본입니다. 히틀러는 헤겔의 철학을 붙잡고 인간의 절대정신을 믿었습니다. 인간은 못 하는 것이 없다, 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놀라운 절대정신을 가진 민족이 게르만 민족이다 라고 해서 히틀러는 이 지구촌에 나치 왕국을 건설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의 사상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북쪽에 있는 김일성 주체사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김일성 주체사상이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와 자유를 준다는 이론입니다.

  세번째는 은혜론적 인생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10절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인생관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관입니다.
  시편 31편19절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이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커서 우주를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다니엘 10장19절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28절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멘입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까? 은혜 되지 못하는 것을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하나님 백성의 믿음입니다.

  예수 때문에

  어떤 집에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주일학교를 잘 다녔는데 아버지가 그 아이를 데리고 장년예배에 왔습니다. 그날따라 설교가 아이들이 듣기에는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를 옆에서 보니까 목사님을 주목하면서 설교를 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기특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동식아, 너 오늘 목사님의 설교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니?" "아니요, 하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를 끝까지 아주 잘 듣고 있던데?" "예,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 생각했어요."

  사실은 그 아이가 설교를 잘 들은 아이입니다. 여러분, 설교 들으면서 예수님 생각하십시오. 설교를 들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고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을 생각했다는 그 아이, 목사님의 설교 한 마디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강단 뒤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했다는 신앙고백은 우리가 새겨 둘만한 이야기입니다.

  금년을 살아오면서 은혜 되는 일만 있었습니까?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난을 보면 은혜 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멘 할 수 없습니다.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무거운 짐들을 금년 한 해에도 많이 겪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되지 못하는 그것을 은혜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위에 은혜라는 뜻입니다.

  아이가 대학입시에 응시를 했지만 낙방을 했습니다. 몇 개월 동안 작정기도 하며 틀림없이 된다고 믿었는데 아이가 낙방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어머니는 두둑한 감사헌금을 했습니다. 사연을 물어보니까 "목사님, 우리 아이는 낙방을 했는데 내가 기도를 하다보니 은혜를 받아서 기뻐서 감사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낙방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런데 딸을 위해서 기도를 하다보니 딸은 낙방을 해도 자기는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가 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살아야 됩니다. 이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맥추감사절은 그러한 신앙고백을 주님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무슨 예산이나 사업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여, 나는 금년에 거지입니다. 그러나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롭지 못한 고통도 있었지만 주님 지금 생각해 보니 다 은혜였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그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타나는 것이 절기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은혜 아닌 것을 은혜로 대신 할 줄 아는 이런 성도의 모습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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