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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사명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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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사명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주제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소금이라 너희는 빛이라"는 이 말씀은 교회사명을 원론적으로 말씀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원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교회사명을 원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소개를 하면 마태복음 4장23절에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들을 고치시더라"고 했습니다.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더라 이것이 교회가 땅 위에서 위임받은 사명입니다.

  마태복음 28장18절 이하에는 "만민에게 가라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라, 그래서 제자를 삼으라. 이것이 예수님의 선교명령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교회의 사명, 사도 바울이 가르친 교회의 사명을 묶어 보면 세 가지 형식으로서 삼각형의 모형이 됩니다.

  교회의 세 가지 구조

  우선 교회라 하면 수직성이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영천교회를 세우려 하면 안됩니다. 영천교회는 표준교회가 아닙니다. 영천교회는 하늘나라에 없습니다. 우리가 의도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영천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하나님이 바라는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형에 하나님을 향한 수직성이 바로 형성이 안되면 교회가 안 됩니다. 수직성이 바로 형성되어야만 예배가 바로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고백하는 예배, 그것이 수직성의 교회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고백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라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내향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으로 교회가 많이 투자를 해야 되는 것이 교육입니다. 교회는 안으로 교육이 필요합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며" 라고 했는데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교육이 안으로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외향성이 있습니다. 바깥으로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고 봉사로 이 세상을 섬기는 그런 모형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교회성장을 논하는 입장에서 교회는 세 가지 건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배실과 교육관과 복지관입니다. 예배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사장적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관이 필요하고 세상을 향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복지관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사회관계에 있어 세상을 섬기는 일에 조금 빈약했습니다. 기도원을 세우는 것, 수련원을 세우는 것도 좋은데 그것만큼 복지관도 세워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한 봉사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전도는 교육관을 짖는 것만큼 복지관을 지어야 하며 거기에서 불신자들을 만날 수 있고 불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다는 복지전도이론이 교회성장에 많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당과 교육관은 한 건물 안에서 일반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사실상 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올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복지사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 청소년, 주부, 어린아이들 모든 분야에 복지적 교육, 사업, 봉사가 교회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해할 때 한쪽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또 한쪽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다듬어져야 되는 우리 안의 문제, 그리고 한쪽은 세상을 향하여 불신자들을 만나고 섬기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예수님이 말씀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비판받는 현실교회

  한국교회가 비판받는 것 중의 하나는 기복주의 믿음입니다. 실제로 기복주의 신앙은 비판을 받아야 됩니다. 이단사이비를 보면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단 사이비는 시한부 종말론을 강조합니다. 형태는 달라도 그들 나름대로 시한부 종말론이 있습니다.

  이단사이비는 기복적 신앙이 그 안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원성취 하려다가 거기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사이비 운동의 또 하나는 신비주의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귀신론과 많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복주의 신앙은 우리가 경계하고 비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함부로 매도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비판해야 될 것은 샤머니즘적 기복성을 비판하는 것이지 성경이 얼마나 많은 복을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이 축복을 샤머니즘적 기복성에 연결해서 함부로 기독교가 기복적이라고 비판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샤머니즘적 기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사람 치고 샤머니즘적 신성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샤머니즘적 신성은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현실성입니다. 무당이나 역술가들은 전부 현세적인 복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잘 된다, 현실적인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기복적입니다. 기복적이라는 말은 철저하게 댓가를 지불하는 조건부를 말합니다.

  둘째는 의존적입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는 자기들을 의지하도록 합니다. 이 세상 것을 추구하고 개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인 복인데 거기에다가 기복적인 조건부, 다시 말하면 행운을 산다는 것입니다. 역술을 따라 가다가 망신을 당합니다. 맹신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기복성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우리가 이런 의미의 복을 추구한다면 우리 믿음은 기복주의 믿음으로서 비판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샤머니즘적 신성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곳곳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당도 큰 무당이 있고 새끼 무당이 있습니다. 새끼 무당은 백 명이 있어도 별 것이 아니데 큰 무당은 왕 같은 존재입니다. 큰 무당의 말 한마디에 절대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 종교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스님의 말 한마디는 절대적입니다. 이것이 샤머니즘적 종교형태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추구하는 복은 샤머니즘적 형태와는 정 반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복은 댓가를 지불하여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을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조건부로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받는 그런 공덕주의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의존적이 아닙니다. 순종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되는 것이지 사람에게 얽매여 가지고 행동 하나도 물어 보아야 되고 그 사람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 것도 못하는 그런 의존적 형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샤머니즘적인 복을 추구하는 형태로 교회를 섬기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제사장직과 선지자직과 왕직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 내 믿음으로 내가 기도하고 내가 섬기고 내 사명 앞에 내가 헌신하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신앙고백은 대행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신앙고백을 내게 요구하시지 내 신앙고백을 고해성사 식으로 다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은 금하고 있습니다.

  요즘 '중보기도' 라는 용어가 논란이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지금 한국의 큰 교단이라고 하는 측에서 중보기도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래서 중보기도 보다는 '합심기도' 혹은 '도움을 구하는 기도' 이런 형태로 용어를 바꾸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뜻이 있다고 보지만 이와 같은 논란이 나오는 것은 샤머니즘적 요소를 배제하자는 의견이 있습니다.

  올바른 복의 인식

  우리가 담임목사의 기도를 받으면 어떤 면에서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기도의 본질상 담임목사의 기도나 부목사의 기도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내게 바라는 기도는 내 기도입니다. 나는 기도를 안 하고 남이 와서 내 기도를 해 줌으로써 기도의 효력이 있고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복된 자는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사람으로서 기도하고 내가 해야 될 내 몫의 십자가를 감당하기 위해서 내가 기도하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로님이나 일반 교인이 볼 때 장로님이 와서 구역예배 인도를 해 주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이 인도를 해야 더 은혜가 있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구역장님이 인도해도 무방합니다. 부목사가 열 번 심방해도 담임목사 한 번을 더 중요시하는 풍토는 바뀌어야 된다고 봅니다. 내 자신의 기도, 내 자신의 예배, 내가 여호와께 드릴 찬양과 감사 그것이 개인적인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구하는 그 기도가 영원성과 은혜의 개념과 순종의 의미로서 하나님 앞에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복을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선교대회에 가서도 그런 말을 많이 듣는데 알고 보면 한국 교회의 발전은 경제발전과 정비례합니다. 60년 대 중반에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견디기가 힘든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너무 경건하고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신학교의 근엄함 속에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드릴 때 박수를 치다가는 당장 치리를 받습니다. 그 때의 분위기는 박수를 치고 즐겁게 예배드릴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못 먹고 못 입는 시절이었습니다. 우스개로 어떤 분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한국교회 부흥의 최대 공로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합니다. 박 대통령의 잘 살아보자는 구호와 예수 믿고 복 받자는 구호는 똑같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어버이 수령은 인민과 영원히 한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침이 마르도록 선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정
일은 참 편안한 정치가입니다. 아버지 이름만으로 북한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영성과 도덕성을 갖추어야

  우리와 입장은 다르지만 우리가 교회를 섬길 때 교회의 영성을 놓치면 안 됩니다. 주일을 놓치면 안됩니다. 주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은 엿새 동안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흥은 엿새 동안의 세상 생활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주일날이 교회가 부흥되는 날이 아닙니다. 엿새 동안 우리가 어떻게 하고 사느냐에 따라 주일날이 달라지는 것이지, 주일날이 중요하다고 주일날만 붙잡고 주일만 잘 지키면 된다는 것은 예스만 하고 행동이 없는 맏아들의 유형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은 엿새 동안이 더 중요합니다. 주일날 하나님을 뵙고 엿새 동안은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성과 도덕성입니다. 주일은 영성을 무장하는 날이고 엿새 동안은 교회의 도덕성을 이 땅 위에 빛과 소금으로 보여주는 날입니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일은 위로 하나님을 상대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받고 성도들이 교제하고 서로 말씀 안에서 훈련을 받고 세상에 나아가서 외향적인 사명을 다하는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교회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중국선교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약 반세기 전에 미국의 침례교 선교사님이 중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굴지의 석유회사가 중국에 지사를 차리게 됐는데 그 때만 해도 중국어와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인재들이 별로 없어서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님이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그 회사에서 인재로 등용을 시키려고 초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임원이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일년에 얼마를 받고 일을 합니까?" "나는 연봉 600불을 받고 선교사업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1만 5천불을 연봉으로 드리겠소. 그러니까 우리 회사에 와서 일을 하시오"라는 것입니다. 연봉이 약 25배입니다. "그래요, 대단하군요. 도대체 내가 할 일이 뭐요?" "간단합니다. 중국에 석유를 파는 일을 도와주면 됩니다." 이 선교사님은 연봉은 내가 탐이 나지만 일거리가 내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내 일은 석유를 파는 그런 일 정도가 아닙니다. 나는 복음을 파는 장사입니다. 내가 파는 복음하고 당신들이 파는 석유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장사입니다. 나는 복음을 파는 장사로써 600불 짜리 선교사로 살 테니까 다시는 나한테 교섭을 하러 오지 마시오 라며 거부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성과 도덕성이라고 하는 이 양면을 지니고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 때문에 영적인 것을 팔아버리든지 거래를 하든지 타협을 해 버리면 안 됩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주일마다 거의 등산을 갑니다. 1부 예배에 나올 때도 있고 산에 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을 붙잡고 권면했습니다. "당신은 주일날 등산하는 것만 포기한다면 예배생활이 바로 되고 나아가 당신의 신앙생활에 기본자세가 잡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 됩니다. 평일 가까운 산에 가고 큰산에 가는 것은 포기하고 주일 날 예배를 드리고 믿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하고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그 사람의 인격과 삶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야 이 예수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

  내 힘으로 잠시 동안은 신앙생활을 해도 결코 한 평생은 하지 못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주님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내 힘으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분 안에는 예수님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원하기는 하는데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이 안됩니다. 1부 예배도 예배지만 그 사람에게는 1부 예배가 하나의 구색으로 나옵니다. 1부 예배를 나왔으면 오후예배도 나오고 주님을 위해서 주일을 뜻 있게 살려야 하는데 주일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주일을 지나면 월요일부터 포도원에 가야 됩니다. 포도원에 가서 주일날 하나님을 만난 영성을 가지고, 주일날 영적인 은사 받은 것을 가지고, 빛과 소금을 발휘하며 도덕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엿새 동안의 그 삶이 뒷받침 될 때 또 다른 주일로 우리 앞에 은혜로운 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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