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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다 은혜를 받지 아니하였느냐?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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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일곱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간 어느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이웃집 부인은 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는데 아이는“고맙습니다.”는 인사도 없이 얼른 받았습니다.“얘야”아이의 어머니가 무섭게 불렀습니다.“다른 분이 사과를 줄 때는 뭐라고 해야 되지?”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껍질을 벗겨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타인의 사랑과 고마움에 대해서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일곱 살 난 이 아이뿐이 아닙니다. 이 아이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타인이 베풀어준 친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침묵한 채 더 많은 친절을 베풀어주기만을 바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지 않을 때는 원망하고 돌아섭니다. 사과 껍질을 벗겨주지 않으면 사과를 준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감사하지 않습니다.

감사 결핍의 원인 중 하나가 우리 사회의 지나친 교육열임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십대들이 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타인의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부모님이 몇 번이나 깨워야 하고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학교에 등교할 때까지 끊임없이 부모님께 요구하고 더 많은 것을 챙겨주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습관화 될 경우, 타인이 자신을 위해 베푸는 친절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은혜에 익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은혜에 익숙해지면 그는 버릇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규태씨의 글에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마음의 병은“감사결핍증”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서 돌아설 때 감사하다는 말 대신에“또 오십시오”라는 이기적인 인사를 하고,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면“고맙습니다.”라는 말 대신“야! 신난다.”라는 말이 앞서고, 택시 정류장에서 바빠 야단하는 젊은이에게 양보하면 고맙다는 말을 듣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고치신 기사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감사의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문둥병은 질병가운데 가장 무서운 병중의 하나입니다. 치료도 어렵지만 일반인들과 함께 있을 수 없고 멀리 격리 수용을 당해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 씨가 이러한 시를 남겼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 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 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또 이러한 시를 썼습니다.

전라도 길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이것이 나환자의 처지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은 문둥병자들을 가까이 하면 부정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리밖에 기거해야만 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그 근처를 지나가게 되면 “우리는 부정하다. 우리는 부정하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처참한 질병에 걸려 절망의 상태에 있었던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눈섭이 빠지고, 코와 귀가 썩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썩어 떨어지며 이러한 가운데 죽을 날만 기다리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은혜에 감사한 사람이 열 명 가운데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모두 다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의 예의를 표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아홉 명은 그냥 기뻐 뛰며 자기들의 갈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누가복음 17:17-18)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척 서운해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적으냐?”라는 의미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은혜를 아는 예의 바른 사람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올해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전쟁이 없었던 것 하나님의 은혜요, 맑은 물, 맑은 공기 풍성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굶주리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은혜요, 헐벗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을 지켜 주셨으니 더 큰 은혜입니다.

지금 세계도처에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 지구촌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25억이나 된다고 합니다. 가까운 우리들의 동족 북한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굶주림을 면하고자 생사를 건 탈출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먹지 않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를 환산하면 년간 10조 원어치나 된다고 합니다. 이토록 넉넉한 가운데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함은 잊고 도리어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았던 때가 많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없어서 입니까? 갖지 못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더 갖지 못한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욕심은 감사한 마음을 빼앗습니다. 욕심은 고마운 마음을 없이합니다. 욕심은 은혜를 망각하게 합니다.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받아 누리는 것이 많은데 부족한 것만 바라보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바른 마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Ⅰ. 한 사람의 감사가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1. 복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적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아홉 명의 나환자 모두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건강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듣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음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1860년 9월 8일, 당시 게렛 신학교 학생이었던 에드워드 스펜서(Edward Spencer)는 한밤중에 친구의 고함소리를 듣고 눈을 떴습니다. 가까운 미시간 호수에서 큰 연락선이 조난되었던 것입니다. 스펜서는 생각할 것도 없이 미시간 호수까지 달려갔습니다. 385명을 태운 여객선이 암초에 부딪쳐 침몰해서 287명이나 익사한 큰 사고였습니다.
스펜서는 고등학교 시절 수영 선수였기 때문에 수영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호수로 뛰어들어가 심한 바람과 높은 물결을 뚫고 한 사람씩 구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열여섯 명을 쉬지 않고 육지로 끌어냈습니다.
그는 최후의 힘마저 다 소비하여 너무 지친 나머지 육지에 쓰러졌습니다. 그 때 곁에서 한 사람이 파도 속에 허우적거리는 또 한 명의 조난자가 보인다고 소리쳤습니다. 스펜서는 정신없이 일어나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날의 무리가 화근이 되어 병상에 눕게 되었고, 7년 후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신문 기자의 방문을 받고 그 날의 소감을 질문 받았을 때 그는 힘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그 날 밤 내가 생명을 살려준 사람은 17명인데 나에게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한 명의 소녀뿐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지금까지 7년 동안 크리스마스 때마다 감사의 카드를 보내왔습니다. 나는 감사할 줄 모르는 16명보다 이 한 명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다 감사드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느낄 수 없는 은혜는 더욱 크고 많습니다.

미 항공 우주센터(NASA)의 지구과학자인 제임스 레부룩은 말했습니다. 과학적으로 볼 때 이 지구에 사람은 물론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물이 살고 있는 것은 누군가가 이 우주와 지구를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증거로 산소의 농도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높아도 이 지구는 불을 켜는 순간 불바다가 되고, 조금만 더 낮으면 불을 켜도 불이 붙지 않으며 모든 생물이 질식하여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지구에는 나무에서 뿜어내는 산소와 자동차에서 뿜어내는 유독가스의 비율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잘 조절이 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레부룩은 누군가가 이를 조절하고 있다고 했는데 누구이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는 열 가지나 되지만 감사드리는 것은 하나밖에 되지 못한다는 뜻도 됩니다. 은혜는 대륙만큼 많이 받았는데 감사는 작은 섬만큼 밖에 드리지 못하는 감사에 대해 인색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기도하는 사람은 많으나 받은 응답에 감사하는 사람은 적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똑같이 예수님께 병을 고쳐 주시기를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눅17:12-13)라고 했습니다. 똑같이 간절했습니다. 똑같이 응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응답후의 모습은 크게 다릅니다. 한 사람만이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어려울 때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응답된 후 감사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간구하는 기도는 많으나 감사하는 기도는 적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가 감사의 기도를 담으려고 그릇을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온 천하를 다니며 담아보았지만 그릇에 얼마 담기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간구하는 기도를 담으려고 그릇을 들고 내려왔더니 온 천하는 고사하고 한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한 고을에서 가득 차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되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는 많이 하지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Ⅱ. 한 사람의 감사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1. 이 사람의 감사하는 모습은 열정적이었습니다.

15절 말씀에“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라고 했습니다. 마지못해 드리는 억지의 감사나 형식적인 감사가 아니라 솟구쳐 오르는 감격의 찬양을 드리며 감사했습니다. 아홉 사람이야 감사를 하건 하지 않건 상관하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장 크게 입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그토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까닭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성경곳곳에 넘치는 감사의 삶을 살고자 다짐했습니다.

시편 9:1에“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11:1에도“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38:1에도“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시편 116:12~14의 말씀에는“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은 다윗은 은혜에 빚진 마음으로“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짐하기를“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하나님께 약속했던 것을 꼭 실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은 성군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한국성결교회의 발전,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분 가운데 홍대실 권사라는 여성도가 있습니다. 이분은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을 때, 하나님께 서원하기를“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사히 자유의 나라 남한에 가도록 하신다면 열심히 일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그 재물로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지켰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결대학교 전신인 사직터널 근처 행촌동에 있는 성결신학교 건물을 단독으로 지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결신학교가 안양으로 이전할 때 학교 부지 수 만평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이 모두가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도 성결대학교정에는 홍대실권사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기념비에“잘 오셔서, 잘 사시고, 잘 가셨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받은 은혜에 열정적으로 감사하는 문둥이의 모습, 받은 은혜에 열정적으로 감사하는 다윗의 모습, 받은 은혜에 열정적으로 감사하는 홍대실 권사님의 아름다운 모습, 그 인간다운 삶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이 사람은 겸손히 감사했습니다.

15-16절 말씀에“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라고 했습니다.“죽은 생명 살려 주셨으니 이 은혜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다만 분부대로 하겠나이다.”하는 모습입니다.“주여! 이 천한 것이 왔습니다.”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였습니다.

미국의 흑백 갈등이 깊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기차에서 백인과 흑인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백인이 칼을 던져 흑인을 죽이려 할 때 옆에 있던 백인 목사가 손을 들어 칼을 막아주었습니다. 칼은 목사의 손에 꼽혔고 피가 펑펑 흘러내렸습니다. 싸움은 멈추어졌고 흑인은 목사의 희생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움을 느낀 흑인은 일생동안 그 목사의 곁에서 일을 돕기로 했습니다. 종종 일에 실증이 나면 흑인은 불평과 원망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는 칼 맞은 자신의 손을 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흑인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는데 그 손은 자신의 생명을 구원한 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있음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불평과 원망은 사라지고 감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녁에 유난히 피로를 느끼면 원인은 둘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낮에 일을 열심히 했거나 종일 화를 내고 불평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람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이 머물게 됩니다.
감사할 때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감사할 때 마음의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할 때 마음의 행복이 있습니다.
감사할 때 건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범사에 감사하라”하셨습니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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