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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만 그를 섬기라 (마 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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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면서 3번 모두 ‘기록된’ 말씀으로만 물리치셨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신명기 8:3절, 두 번째는 신명기 6:16절, 세 번째는 신명기 6:13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가만히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신명기를 기록했던 것과는 역순입니다. 모세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을 먼저 기록했는데, 사단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즉, 예배와 관련된 오늘의 시험이 최후의 시험이며, 가장 강력한 시험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첫 시험에서, 사람이 굶어죽을 상황에 처하면 먹고 사는 것이 가장 급하다는 것에 예수님이 동의하도록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뒷전으로 밀쳐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셨고, 사람이 육신의 필요에 이끌려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할 존재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빵의 메시야로 만드는데 실패한 사단은 좀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방법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간파하셨기에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고 이에 순종하여 사역하실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십자가의 길을 거절하고 영광의 방법을 취하도록 유혹하는데 또 실패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8).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 여기서 마귀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마귀는 언제나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합니다. 부지불식간에 한번만이라도 경배받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조건을 붙여서 시험해왔던 마귀는 여기서 그 구절은 몽땅 생략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경배 받으려는 속성을 교묘하게 숨겼습니다. 또한 마귀의 거짓된 본색도 드러나는데,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람한 제안을 하는 사단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10)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는’ 상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향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러한 목적으로 택하신 백성들을 예정하셨습니다. 아마도 완성된 천국은 10절처럼 사단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며 다만 그분을 섬기는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은혜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대적인 사단을 경배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절하는 것을 참람하게 여기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역시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한 순간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얻은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것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만한 것도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해마다 추수감사예배가 되면, 우리 교회는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세어보며 감사제목을 나눕니다. 어떤 분은 한 해 동안 많은 것들을 성취한 반면에, 어떤 분은 한 해 동안 별로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성취한 것이 적을지라도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겼다면, 그것이 가장 큰 감사제목이라 믿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로 예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수 있게 하신 것이 참으로 큰 감사제목입니다. 어떤 분은 예배에 빠지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힘든 부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매주 예배드리기 위해 금전적으로는 손해 보는 부서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직장업무와 겹쳐 어쩔 수 없이 빠져야 할 때면 늦게라도 참석했습니다. 예배를 참석하기 위해 명절에 미리 고향을 다녀와서 예배 후에 다시 고향을 찾는 번거로운 수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직장업무와 겹칠 때도 출근했다가 잠시 짬을 내서 예배를 보고 다시 출근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화려한 시설도 없고, 멋진 프로그램도 없지만, 바른 교회를 함께 꿈꾸며 좀 더 하나님 백성다운 태도를 나타내려고 힘쓰는 저의 감사제목이며 자랑이며 기쁨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만 섬긴다는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마귀는 자기에게 경배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귀가 미혹하는 경배의 한 가지 특징이 이처럼 예배를 드림으로서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얻어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미신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신에게 뭔가를 바치고 신의 기분을 적당히 맞춰줌으로써 인간의 힘으로 좀처럼 성취하기 힘든 욕망이 성취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도 결국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풍요와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우상을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고 바르게 섬기려면 먼저 이런 요소에 대한 점검이 있어야 합니다. 축복받고 잘되기 위해서 예배드린다면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사실 예배는 은혜받기 위해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무엇인가 얻어내기 위해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셈입니다. 무언가 얻어 내기 위해 몇 푼 헌금하고, 한 주 동안 쌓인 스트레스 풀기 위해서 찬양하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예배드리고 나면 하나님께 복 받는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이라면 미신을 믿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예배는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자세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저 복 받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예배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힘썼던 것이나, 구겨진 돈을 다리미로 다려서 헌금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찬양 후에 박수를 치지 않았던 것도, 근본적으로 찬양이 청중들이 은혜 받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르게 예배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능력을 베푸시면 그러한 은혜와 능력을 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예배’라는 말이 참 많이 사용됩니다.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도 ‘새벽 예배’ ‘금요 철야 예배’로 바뀌고 있습니다. 늘 예배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든지 더 강조되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일주일 모든 시간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보다 좋은 것은 없겠지요. 그런데 예배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는 만큼 예배에 대한 참된 의식도 증가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참되게 예배하고 참되게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그 사람의 전존재가 점차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아무리 효과적으로 보이는 자기 계획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을 더 신뢰하는 모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단지 흥얼거리지 않고, 가사를 마음에 담아 심령의 고백으로 드릴 것입니다.

기도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고집을 꺾어 자기 뜻에 복종하게 하려한다든지, 찬양을 드릴수록 자기의 기분에만 도취된다든지, 예배를 드릴수록 그 대가로 하나님께 어떤 것을 요구하는 심정이 많아진다면, 사단이 예수님에게 요구했던 경배를 드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예배와 기도가 천하를 얻게 해준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천하를 얻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길이 아니고, 그분을 바르게 섬기는 길이 아니라면 전혀 가치 있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나 자신이, 그리고 내 가정이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고 있습니까? 성경은 거분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전심’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a),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우리의 예배가 영혼의 무릎을 꿇어 그 분께 복종하며 찬양하는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예배시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그분께 전심으로 복종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사단을 물리치신 사건을 통해 시험에 들지 않고 바르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내가 가진 간절한 소원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단지 어떤 문제가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필요 때문이거나 지금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좀 더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서입니까? 두 번째는 그 소원을 이루는 ‘방법’이 정당한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른 방법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가르쳐주는 방법들을 따르고 있습니까? 하나님 백성답게 살려는 바른 목적과,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방법에 따라 하고 있다면, 마지막으로 점검해야 할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자세’가 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는 결과로 주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려는지 아니면, 아니면 그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거나 아니면 다른 능력에 의존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과 그분만을 섬기는 것을 세상의 어떤 성공과 성취보다도 귀한 것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적뿐만 아니라 수단에 있어서도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에 있어서도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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