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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의 사람 (벧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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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사변 이후, 북한에는 교회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들키는 날이면 당장에 끌려가서 어떤 형을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가족들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58년도에 북한에서 총선거가 있었습니다.
독재정권에서의 투표라는 것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개표를 하면 100% 만장일치로 당선되는 것이 북한 실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들이 2천명이나 되었습니다.
무려 2천명이 투표에 참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비밀경찰 300명을 급파했습니다.
샅샅히 조사해 본 결과 그들은 3-5명씩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드렸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삼삼오오 소그룹으로 모여서 숨을 죽여 가며 하나님께 예배드린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후, 기독교인들에 대한 감시와 핍박이 극심해졌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또한 박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명 찬송가 사건입니다.
학교에서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국어와 수학을 가르치다가 찬송가를 가르쳤습니다.
이 사건으로 교사직에서 파면 당하게 되고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됩니다.
학생들도 큰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열망과 정렬이 그의 가슴에서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이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정열, 그 정열은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목숨을 걸면서, 자신의 인생이 추락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찬송가를 가르친 것일까요?

베드로서를 기록할 때 그 당시의 교회는 핍박으로 많은 고난을 받던 때입니다.
베드로전서 제작 시기는 네로 시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로가 로마 대 화재 사건을 일으키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극도에 도달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과 베드로가 이 시대에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에 의해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 교회는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고, 그들은 숨어서 예배하고 피해서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마구 잡아서 처형하던 그런 시대에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성도들은 땅 속에 숨어 들어가 살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타콤입니다.

이런 핍박 속에 있는 교회를 향해 베드로사도는 편지를통해 소망을 가질 것에 대해 독려합니다.

초대 교회는 이러한 격려를 통해서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오히려 더 생명력 있는 힘을 가지고 성장했고, 세상에 영향력을 뻗쳐 나갔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이 시대에 어려움을 겪고, 고난당하는 우리에게 또한 소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부활의 소망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것일까요?
공산당 독재정권 앞에서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다가 변을 당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 공부나 가르치고 월급 받고 편히 살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찬송가를 가르치다가 파면당하고 변을 당해야 만 한 것일까요?

아니, 변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한 까닭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 땅에서 끝나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같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3절)

“산 소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곧 생명력 있는 소망이라는 말씀인데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소망, 우리의 부활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이나 장차 의 고난을 믿음으로 싸워 이겨나갈 수 있었고 싸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섬천 사건이 있습니다.
어떤 늙은이가 이 동네에 와서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횡설수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아하니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어떤 때에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남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뭔가 수상쩍은 것이 있다고 하여 비밀경찰이 뒷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전에 교회가 있을 때에 그는 천주교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사라지고 종교의 자유도 없어지자 그는 미친 사람의 흉내를 낸 것입니다.
종교 탄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미친 사람 흉내를 낸 것입니다.
종교 탄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자 미친 사람으로 가장을 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복음이 도대체 무엇 이길래, 복음 안에 무엇이 숨어 있길 래 미친 짓을 해 가면서 까지 사람들에게 전해야 했던 것입니까?
결국 그 신부님은 총살 대에서 사형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친 짓을 해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러다가 들키는 날에는 사형에 처해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왜 미친 사람이 된 것일까요?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어떤 시련이 있어도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잇고, 천국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네로 황제의 잔인한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여러분의 심령에도 하늘의 소망으로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위대한 기업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소망이 있으니 기업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기업을 주십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기업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회사를 의미하는 말로 혹은 가정의 한 산업으로서 이러한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원하지 못합니다.
요즘 기업의 총수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서 받는 기업은 영원한 기업입니다.
흔들리거나 기울어짐이 없는 기업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4절)

보세요.
하나님 나라의 기업, 유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첫 번째로 썩지 않는 유업입니다
부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썩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썩어짐으로 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썩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럽지 않은 것입니다.
더럽지 않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죄로 인해 오염되었습니다.
의인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은 깨끗하고 정결합니다.

또한 쇠하지 않는 유업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쇠합니다.
꽃은 시들고 풀은 마릅니다.
사람들도 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예비 된 성도들의 기업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으며 쇠하지도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상급입니다

지금까지 믿음의 신앙인들이 핍박 속에서 신앙을 지켜내고 목숨을 버려가면서 믿음을 지킨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업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 어느 장로님이 임종하시기 전에 목사님과 교인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더랍니다.
“이제 나는 먼저 갑니다.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더 수고하셔야겠군요. 슬픔도 없고 한 숨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질병도 없는 저 천국이 보입니다. 저는 먼저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죽어서도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믿음입니다.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느냐 만큼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 올바른 삶을 가져야 합니다.

이 소망을 가지십시오.
‘이후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믿음의 경륜이 더 쌓일 때 이 소망을 가지겠다’
‘이후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었을 때 믿음을 가지겠다.’가 아니라 항상 이 소망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 소망을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항상 가지고 있던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오직 전과 같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후에도 그렇고 항상 동일하게 이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준비입니다.
늘 마음에 생각하고 이러한 의식으로 살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고 골 세레머니를 합니다.
선수들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극서이 갑자기 나오냐 하면 아닙니다.
내가 골을 넣고 나서 이러한 세레머니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연습을 하고 기도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골을 넣고 나서 기도가 바로 됩니까?
늘 의식 가운데 ‘내가 골을 넣으면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려야겠다’는 의식으로 준비하고 그렇게 생활하기에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에 대해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 내가 살든지 묵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을 살아야지’라는 의식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이 한 경륜자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삶이 될 줄 믿습니다.

액속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을 준비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을 성실히 살고 오늘에 최선을 다합니다.

***** 은행나무의 다른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손수(公孫樹)입니다.
이러한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한자로 공(公)은 ‘너’를 뜻하는 존댓말이고, 손(孫)은 ‘손자’, 수(樹)는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곧 ‘네 손자나무’라는 말이 됩니다.
은행나무에 이런 이상한 이름이 붙게 된 까닭은 원래 이 나무의 성장이 더디어 심은 뒤 3대는 지나야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랍니다.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를 손자 대에서 열매를 따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손자 대에 희망을 두고 그것을 심는 것입니다.
후손은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중국의 한 재상이 길을 가다가 한 노인이 집 앞에 어린 감나무를 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노인이 나무 심는 것을 보고 하도 이상해서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보아하니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으신 것 같은데 언제 그 열매를 거두시려고 나무를 심습니까?”
노인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내가 먹기 위해서인가요, 내 손자 대에 열매가 맺힐 희망을 보면서 심는 것이지요.”

이게 소망 있는 사람의 삶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받는 상급, 기업은 무엇입니까?
그 유업은 하나님 그 분 자신입니다.
시 16: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 16:5)

예레미야애가 3:24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렘 3:24)
여호와가 나의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우리의 유업이요 유산이라는 말이 됩니다.
돈을 얻는 자는 돈을 소유하고, 명예를 얻는 자는 명예만을 소유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얻는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3. 금보다 더 귀한 것을 얻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고난 가운데서 우리로 인내하게 하고, 연단하게 함으로 금보다 더 귀한 것을 얻게 합니다.
곧 하나님나라의 기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7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7절)

금이란 가장 값진 것의 상징입니다.
고대 시대부터 금은 화폐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금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걸러서 반드시 정제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불에 넣어 정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을 많이 거치면 거칠수록 순금이 됩니다.
좋은 금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 삶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환난과 시험을 거치면 거칠수록 정금과 같은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욥의 고백을 보세요.
욥 23:10절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자신이 당한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더 아름다운 삶을 이루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시험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롬 5:3-4절에서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운 시간, 어려운 일로 인하여 위축되지 마십시오.
낙심으로 떨지 마십시오.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대인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사람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일들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그 수용소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수용소에 머물러 있었지만 자기의 의식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법을 훈련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수용소 안에서 고문당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자기의 그 현실과 달리 수용소로부터 풀려난 후 자신이 그곳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그 이후의 시간, 그 이후의 삶을 소망하며 그 안에서 자유 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 어려운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이기고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에서 나온 후 그는 자신의 경험과 그곳에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훌륭한 정신과 의사로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어떤 두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방에 있으면서 철창을 붙들고 밖을 내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며 시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쳐다보면서 주옥같은 싯귀를 만들었습니다.

또 한사람은 언제나 땅만을 바라보며 원망과 불평으로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비가 오며 진흙탕이 되는 땅을 보고 원망하고, 또 날이 개어도 항상 먼지 자욱하게 일어나는 땅을 바라보면서 자학하며 자신을 파괴하였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이 두 사람은 각각 출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쳐다보면서 아름다운 싯귀를 지은 사람은 한 권의 시집을 출간하는 생의 보람과 환희를 맛볼 수 있었고, 땅을 바라보며 자신을 학대하던 사람은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처참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지배를 받느냐 지배하느냐의 삶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소망이 있다면, 그래서 그 소망을 날마다 꿈꾸며 그 소망을 바라보며 나아간다면 우리의 고단하고 힘든 일도 휴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이 소망 안에서 이기십시다.
이 소망 안에서 웃음을 되찾으십시다.
이 소망 안에서 희망을 말하십시다.
그래서 소망으로 내가 살 뿐만 아니라, 서로 격려하고 살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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