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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감사로 복음 전파 (마 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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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1620년 9월 16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섰던 청교도들 102명은 11월 21일 미 대륙의 한 낮선 항구에 플리머스에 도착하여 첫 겨울을 보내며, 50여명의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지독한 가뭄 속에서 인디언들이 가져다 준 옥수수를 심어 곡식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뜨거운 감사의 축제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감사절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절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성경은 출23:16, 34:22절에 말씀하시기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출34:22절에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추수감사절을 지킬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봄에는 맥추 감사절, 가을에는 수장절, 즉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1. 감사하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오늘날은 너나 할 것 없이 감사가 메마른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50년 전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농가의 식생활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되는 4-5월경의 춘궁기(春窮期)를 말합니다. 이때가 되면 주변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거나 줄을 서서 문전걸식(門前乞食)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시절 바로 춘삼월에 태어났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보리밥을 먹고 자란 기억이 있습니다. 미끈미끈한 보리밥에 달랑 고추장 하나가 그렇게 먹기 힘들어서 보리밥 도시락을 가져만 가도 행복한 줄 알았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아주옛날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 중에 한 토막입니다. 지금은 보리밥이 별미가 되어 맛있다고 먹지만 그 옛날에는 가난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슬픈 단어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어렵다고 하지만 밥을 굶어 얼굴이 누렇게 된 사람들은 없지 않습니까? 이전 가난한 가정에서는 이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누렇게 떠서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남의 이야기처럼, 전설의 고향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런 시절이 우리 얼마 전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인들은 에디슨이 태어난 날 약 1분 동안 소등을 한다고 합니다. 전기를 다 꺼버립니다. 미국 천지는 암흑 속으로 들어가고 고요가 깃듭니다. 잠깐 1분이지만 그들은 그런 작은 행동을 통해 전기를 인류에게 선사한 과학자의 수고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에디슨은 학교교육이라고는 3개월 밖에는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차간에서 화학실험을 하다 폭발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이 일로 인하여 화가 난 차장이 따귀를 때릴 때에 잘 못 맞아 고막이 터져 귀머거리로 살았습니다. 귀 수술을 받는 날도 깜박 잊어버리고 연구실에 박혀있었는가 하면, 그는 1천개 이상의 발명품을 내놓아 우리 사회에 편리함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그가 태어난 날, 1분 동안 소등을 하면서 그의 수고와 노력에 감사한다고 합니다. 감사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감사와 만족이란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참 기쁨과 만족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세상 부귀, 영화, 향락을 다 누린 왕이지만 저에게도 역시 근심과 번민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탄하기를 “대개 지혜가 많으면 번뇌함도 많고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범사는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되고 헛되어 다 헛되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근심과 고통과 번민이 어찌 솔로몬 왕에게만 있겠습니까? 저 과학자 뉴턴에게도 있었고, 세계 문호 톨스토이에게도 있었고, 괴테에게도 있었고,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에게도, 시인 이태백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뉴턴은 말하기를 “내가 지금 연구하고 발견한 진리는 마치 유아가 해변에 앉아서 조개들을 줍고 있는 샘이라 진리의 대양은 그대로 내 앞에 양양히 벌려 있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신분이 백작입니다. 세계적 문호였습니다. 천재적인 인간으로 영화와 부귀를 누렸지만 50세의 고개를 넘어서면서 “아, 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다음에 올 순서는 무엇인가?”라고 하면서 탄식했습니다. 

"괴테"는 철학, 의학, 신학까지 하여 학문이란 학문을 통달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연애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60세가 넘어 70세 노인이 되도록 열 번이나 아름다운 처녀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또 사랑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탄식하기를 “사람들이 항상 나를 칭하여 문명의 최대 총아라고 하나 실상은 나의 한 평생은 괴로움과 불평밖에 아무 것도 없고, 나의 70년 한평생에 기쁜 날이라고는 불과 4주일이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비스마르크는 “내 평생에 기쁜 시간은 불과 24시간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술과 시로 일평생을 지낸 시인 이태백이 말하기를 “칼로 물을 베면 다시 붙어 버리고 잔을 들어 술을 마시면 근심이 더욱 깊어진다.”고 깊이 탄식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다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쉴 사이 없이 구하고 찾는 참 기쁨과 만족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는 없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참 구주이며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참 기쁨과 만족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오, 주여! 나는 당신의 품안에 안기기 전까지는 참 만족과 안심을 얻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역경이나 순경에서나 임종에도 참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도 찬송하였고, 욥도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찬송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참 기쁨과 감사 생활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살전5:16-18)

2. 가면서 전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가르치심과 치유와 복음전파 등으로 정리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들도 처음 한 일이 병원을  세우는가 하면 학교를 세워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도 하고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전도를 위하여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몇 가지 지침을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시는 것은 자기 동족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시면서 예루살렘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대상! 초청해야 할 대상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이 있는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족부터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제일 전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령 우리 가족 중에서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치료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두 번, 세 번,  진단을 다시 해 보고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우리의 가족들을 초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주부는 주걱으로 밥을 퍼서 담을 때마다 십자가를 그으며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남편 구두를 새벽마다 싸가지고 나와 신발임자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6개월 아침 금식을 하면서 남편 구원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건성 피부병 때문에 가려워하는 남편의 등을 긁어 주면서 십자가를 긋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구원해야 합니다.

둘째는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영적 전투라고 하십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이 여러 가지입니다만 그중에 하나는 기독교는 가면서 전파하라는 종교인데 반해 불교는 한 곳에 머물면서 전파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 이웃으로, 직장으로, 사업장으로 가서 기회를 만들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한두 번으로 끝내지 말고 계속 가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되 능력을 행하라고도 하십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어보니 하나님은 우리 전도자들에게 첫째는 능력을 주신다는 뜻이요, 전도는 영적 전투라고 하는 뜻입니다. 귀신을 내어 쫓으려면 귀신보다 더 강한 능력을 받으면 되는데 그 능력은 예수님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고칠 것을 고치고, 막을 것을 막아내고, 내 쫓을 것은 내 쫓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셋째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9-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 말씀의 뜻은 전도 이외의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전도가 과연 될까? 그 사람이 내 말을 들어 줄까? 그 날 나와 줄까? 등등 전도 자체보다 걱정거리가 더 많게 됩니다.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힘주시고 동행하실 것입니다. 마28:20절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지혜롭고 순결하라고 하십니다.

12절을 보면 먼저 그 집에 들어가면서 그 집이 평안하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집이 여러분이 그 집을 위하여 빈 평안을 받을 만하면 복을 받지만 받을만 하지 못하면 그 평안이 여러분들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랍니다. 왜 평안을 빌어야 합니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평안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참 평안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또한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혹시라도 다툰다든지, 얼굴을 붉히거나 입씨름을 한다면 이는 지혜로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면서 한숨을 내리쉰다든지 팔자타령을 한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신고 가는 것이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지혜와 순결은 기독교인이 지녀야 할 두 가지 큰 덕목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손해만 보게 되고, 순결이 없으면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전도는 온 몸으로 하는 전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가면서 복음을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다음 주일에 새 가족 초청주일이기 때문에 이번 한 주간은 매우 중요한 주간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고, 자신의 감정 관리에 신경을 쓰셔서 부딪치지 않게 하시고, 다음 주일에 시간 약속을 미리미리 잘 하셔서 태신자들을 꼭 모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선물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단 한 사람만 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감사함으로 가면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부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윤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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