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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각하고 감사하라 (시 1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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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말을  어느 분은 해석하기를, 가을은 남자까지도 움직이는 계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거룩하고 복된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 위에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아름다운 결실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가을이 되면 해가 진 깜깜한 시골 들녘에서 늦도록 일하시던 부모님 생각이 나고는 합니다. 뭔 일이 그토록 많으신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듯 바쁘게 보내셨습니다. 그 모진 세파 속에서 청춘을 불사르던 부모님들은 그 아름다운 가을을 느끼지도 못한 채 늙어지셨습니다. 또한 부모님들은 가을이면 추수와 더불어 곧 불어 닥칠 혹한 설한의 찬 바람을 견디기 위한 겨우살이 준비에 더욱 분주하셨음이 떠오릅니다.

어느덧 추수감사절이 한 주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감사라는 영어단어(thank)는 생각하다(think)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생각하고 감사해야합니다. 사실 감사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좋은 일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슬픈 일, 괴로운 일, 언짢은 일을 만나도 감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3절에서 4절에 보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환난 속에서도 감사하면 위대한 인내를 터득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간 중앙일보에는 루게릭 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는 박승일 군의 기사가 연재 되었습니다. 1971년 생으로 금년 35세입니다. 키 235cm의 기아자동차  농구선수였고 2002년도에 는 현대모비스 농구단 코치였습니다. 그러나 그해 6월 루게릭 병으로 진단되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그의 근육들은 무기력해져서 손도 발로 입도 움직일 수 없고 매일 드러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눈마저도 편히 감고 잠을 잘 수 없는 형편입니다. 특별한 치료법도 없는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낙은 안구마우스를 통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터넷 까페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말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잃고 난 지금에야 깨달았습니다.”
어떤 장애인에게 보낸 글에는 “왼손에 장애가 있더라도 장애로 할 수 없는 일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으니 당신은 지금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너무도 많은 감사의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시로서 성전에서 감사제를 드릴 때 사용되었던 감사시 입니다.

한편 이 시로 찬송가를 작곡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의 친구 윌리엄 캐리는 당시 카톨릭의 박해에 견디지 못하여 1556년 제네바로 피신했습니다. 거기서 캐리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생각하며 이 시를 찬송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기쁨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1-2절에서,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 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본문 1절에서 “즐거이”라는 말과 “기쁨으로” 라는 표현이 겹쳐 표현되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주체할 수 없는 큰 즐거움으로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의 환호성처럼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결코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난, 질병, 실패, 슬픔 등 여러 가지 어둡고 힘든 요소들이 함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4절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고 하였습니다.

어떤 유대인 어머니가 있었는데 별로 배운 바가 없는 무식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그 어머니는 늘 딱 세 가지만 가르쳤다고 합니다.
첫째, 모든 일에 감사하라.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둘째, 원망하는 사람과 놀지 말아라. 원망하는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고 만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감사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라.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 마디가 훌륭한 자녀들을 양육한 비결이라고 합니다.

일본에 우찌무라 간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에 저주가 있다면 세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 아무리 믿어보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둘째,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을 많이 암송하고 알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셋째,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생각마다 원망과 불평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불평이 더 많았던 내 입술을 용서하소서. 나는 하나님을 잊는 시간이 많았으나 주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몸이 병들었을 때도 더 악화되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한 밤중에 전화벨 소리가 나쁜 소식이 아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걱정과 고민거리가 있어도 믿음의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축복을 세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저보다 못한 상태의 사람을 기억하며 지금의 저를 고맙게 여기게 하소서. 언제나 어떤 때도 감사할 일은 있사오니 밝은 하늘 향하여 올라가는 삶을 살게 하소서. 못 가진 것을 섭섭해 하지 말고, 더 가지려 안달하지도 말고, 지금 가진 것을 감사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감사는 심장의 고동이요, 기쁨의 문입니다.
시편 100 편 4절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겸손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 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 부모님에 대한 감사, 나라에 대한 감사, 스승에 대한 감사, 친구에 대한 감사 등 감사할 조건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내 삶의 주변에 친구가 있다는 것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위로해 주는 친구, 힘들 때 도움을 주는 친구,
고독할 때 격려해 주는 친구, 아플 때 용기를 주는 친구,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더더욱 큰 감사의 조건입니다.

나라에 대한 감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서부 아프리카에 청년들을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함께 의료봉사도 하고,  학교에도 가보고,  마을을 다니며 함께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국에 올 때 쯤 되서 느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좋은 나라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입니다. 다만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치만 잘하면 정말 좋은 나라입니다. 미국에 가 보니까 친구든 친척이든 같이 밥을 먹고는 돈을 각자 알아서 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같이 밥먹으면 서로 돈 내겠다고 싸웁니다.

반대로 계산 할 때 신발을 먼저 신고 화장실 가는 사람, 구두끈 매면서 시간 끄는 사람, 주머니에서 지갑 꺼내는데 5분 걸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입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의 김장환 목사님께서 얼마 전 미국 워싱턴에 가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시는데 백악관 근처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악관 앞에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커다란 글귀를 써 놓았는데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켜라”, “미국은 한국을 지원하지 마라” 라는 글이 씌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 분들이 진심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미국까지 와서 고국에 불리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에 대해 욕하기 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조국이 잘되기 위해서 항상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말씀처럼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며 그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예배하러 나아 올 때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기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괴로운 심정으로 나아가기에, 평안을 구하고, 복을 구하고, 안정을 구하고, 부르심을 채워주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예배하러 하나님 전에 나가는 사람은 함성을 지르며, 기쁨으로 노래하며 나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괴로움으로 지쳤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기대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드리는 감사의 예배가 기쁨으로 드리는 산제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찬양의 제사입니다.
본문 4절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의 이름을 송축할 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요나서 2:9 에는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찬양의 제사입니다. 찬양은 곡조가 붙은 설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찬양을 부르면 내 마음에 실망과 좌절, 원망과 불평을 가져다주고, 내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마귀가 도망가고, 찬양을 부르면 은혜가 쏟아져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막혀진 길이 열려져서 만사가 형통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않되시는 분들은 찬양이라도 정성을 다해 열심히 부르시기 바랍니다.

1898년 어느 추운 겨울날 에드먼드 히윗이라는 여인은 한 불량소년에게 큼직한 지붕 스레트로 얻어맞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장장 7개월 동안이나 척추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병상에 누워 꼼짝 못하고 사소한 일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투병생활로 인해 그녀의 신앙은 점점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그 소년에 대한 증오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봄날 병실 청소부인 흑인 여자가 찬송을 흥얼거리며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히윗여사는 벌컥 화를 내면서 “이봐요, 청소하면서 뭐가 그리 좋다고 찬송을 부릅니까?” 하고 윽박질렀습니다. 그 때 청소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닥친 형편과 처지를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주셨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고 이제까지 불평과 증오로 가득 찬 나날에 대해 애통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써내려간 찬송시가 훗날 찬송가 455장이 되었습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처럼 찬양의 제사는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께 맡기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71편 8절 말씀에 보면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중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 하리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말할 수 없이 궁핍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지방 여행을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 투숙하여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그의 신발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어떤 죽일 놈이 내 신발을 훔쳐갔느냐?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도적질 해가도록 그냥 두시다니 .....” 라고 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구두를 꺼내주며 그에게 “오늘은 주일인데 나와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여관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옆자리에는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않아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다리를 잃었구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신을 수가 없구나.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가?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 것을........” 마르티 바덴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삶의 상황에 따라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훌륭한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크게 봉사했으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 올바른 삶이며 축복받는 인생입니다.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하지 말고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겸손의 제사입니다.
5절 말씀에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는 하나님을 높여 드릴 수 없습니다.

영국의 어느 학교에서 무신론자 교장 선생님이 무신론을 주장하고자 칠판에 “No where is God."(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나가 칠판에다가 "Now here is God"(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시다)라고 고쳐 쓰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임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주저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만큼 높아지게 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나를 감추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려면 나를 숨기고, 나를 포기하고, 낮추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난 11월 6일 오후 이스라엘에 있는 슈나이더 아동 병원에선 큰 수술이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십여 명의 의사들이 세 건의 장기이식 수술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비지땀을 흘렸습니다. 곧 이어 한 소년의 시신에서 심장, 간, 폐를 이식받고 세 명의 이스라엘 소녀들은 회복실로 옮겨졌습니다. 수술팀 으로부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세 소녀의 부모들은 병원이 떠나가도록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환성은 금세 감사의 눈물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담당의사로부터 “딸들이 이식받은 장기는 팔레스타인 소년의 것이었다.” 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장기를 기증한 팔레스타인 소년 12 세의 아흐마드는 3일 요르단 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라마단 금식기간이 끝나고 축제 첫 날을 맞이하여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중 이스라엘군이 무장 대원으로 착각하고 사격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급히 이스라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료진으로부터 “회생 가능성이 없다” 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두 시간 여의 고민 끝에 아들의 장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을 남기고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소녀들에게 아들의 장기가 이식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적대관계이고, 아들을 죽인 이스라엘이 미웠지만 자기를 포기하고 아들의 장기를 내어준 팔레스타인 아버지 카티브의 아름다운 정신이 훌륭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낮추고 나를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야고보서 4장10절 말씀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높이시는 결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한 주간 앞둔 주일입니다. 생각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의 제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소유가 넉넉지 못해도 하나님 앞에 기쁨의 제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찬양의 제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나를 포기하고, 낮추고, 감추므로 하나님을 높여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를 결단하므로 더욱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김명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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