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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리더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 - 모세를 생각하며 (신 32:4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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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을 우리는 리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훈련시켰을 때 그 훈련의 목적은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펼치고 이루는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가 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인간적으로는 형편없는 수준에서 시작이 되었고 예수님이 못 박히실 때까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고난 후에 이들은 결국 예수님이 양육하신 대로 하나님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살았고 곳곳마다 주의 사역을 이루다 모두 순교의 제물로 아름답게 세상의 여정을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출석하고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사는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그 깨달음이 기쁨이고 그 기쁨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나아가 깨달음을 전하고 영향을 끼치는 것이 성도의 삶일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세상의 영향을 끼치는 리더임이 분명합니다.

실제 삶에 있어도 우리는 각 가정의 리더요,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사회에서건 큰 사회에서건 각각의 위치에 따라서 책임을 맡은 리더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리더는 반드시 어떤 모임의 좌장은 아닙니다. 그 모임의 영향력을 끼쳐 변화를 이루는 사람을 리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른 리더가 책임자가 된다면 더 말할 것 없이 행복한 모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정이나 혹은 조직속의 작은 모임에서의 리더의 역할이 주어졌건 아니면 기회가 주어져 좀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놓였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리더로서의 삶을 훈련받는 성도로서 바른 삶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모세의 삶에 있어서 마지막 부분이 기술되어져 있지만 모세의 전 과정을 반추해 보며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리더로서 모세를 생각해 보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보고자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리더로서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것을 모세를 통해서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과 이전에 있었던 모세의 행적을 통해서 생각을 해볼 때 모세는 무엇보다도 첫 번째 소망과 열망 속에 자신을 열정의 불로 태워 하나님께 드렸던 열정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어느 날 태생의 비밀을 알고 민족에 대한 열혈의 의분으로 애굽사람을 쳐서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의 공주의 왕자로서 애굽의 왕국에서 자란 모세는 어느 날 자신이 공주의 아들이 아니라 히브리 백성 즉 천민이요 노예였던 히브리 민족태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이제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민족에 대한 열혈의 심정으로 끌어 오르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할 정도로 뜨거운 민족에 대한 열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는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사람을 쳐서 죽입니다. 그리고 그 살인사건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왕궁에서 도망쳐서 미디안 광야를 향해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조금 의문을 가집니다. 아니 일국의 왕자인데 어떻게 해서 사람하나 죽였다고 정말 그가 살인자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 이와 같이 광야로 들어갈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내용을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살인사건에 대한 조사가 된다면 모세가 왜 사람을 죽였는가? 그리고 모세의 마음속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에 대한 뜨거운 열혈의 마음이 자기 민족을 치는 애굽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드러나게 되면 자신도 또 그것을 밝힐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될 때 모세의 삶이라는 것은 이제 살인자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죽음밖에 그에게 주어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미디안 광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숨어들어가게 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무기력하게 목동의 신분으로 40년을 지내고 난 후에 모세는 출애굽기 3장 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께 불림을 받게 됩니다. 가서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에서 출애굽시키는 그 선봉에 서게 되는 이와 같은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제조된 겸손이 아니라 진실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처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지 못하는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온전한 자기 부인의 순간입니다. 출애굽기 3장 11절을 보게 되면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4장 13절을 보면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모세는 자기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를 택하여 지도자로 삼아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신다고 할 때 모세는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전의 40대의 혈기 방자한 모세였다면 그는 마음에 뜨거운 열혈의 의분을 가지고 이 일을 위하여 달려 나갔을 터이지만 모세의 마음이 이제는 위축이 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설득에 의하여 입술의 무딤 때문에 아론을 대변자로 세우고 그리고 그의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여 능력의 지팡이를 그의 손에 들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현장에 도착합니다. 그의 마음에 민족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다시 불일듯 타오르게 됩니다.

이제는 바로에게 당기필마로 달려들어 그 백성을 보내려고 했던 목숨을 건 열정의 때가 시작됩니다. 아론을 동반하고 홀로 바로 앞에 선 모세, 내 백성을 보내라고 담대하게 호령하는 모세의 모습은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살려고 하는 간단한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순간 자신을 잊고 하나님의 대언자로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존재하는 자일뿐이라는 것을 그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명 속에 달려가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고 하늘나라에 삶을 살아가는 이는 얼마나 행복한 삶이겠습니까? 우리가 달려가는데 너무나 우리가 뜨거운 열정에 휩싸여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모든 모습까지 잊어버리고 내가 달려가는 사명에 의하여 내 삶이 화신이 되어 버린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남에도 바로가 그 마음을 번복할 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사역을 이룬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마다 가장 극적인 대목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 모세가 출애굽하기 전에 바로와 하는 쟁투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내 백성을 보내라하고 기적한가지 베풀 때마다 바로는 나가떨어집니다. 하나님 앞에 별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나가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여덟 번, 아홉 번, 여러분 바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바로는 인간적으로는 영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많은 재앙을 당했어도 결코 굴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모세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바로가 그와 같이 재앙을 당함에도 굴하지 않고 끄떡없이 일어날 때 모세도 거기 질리지 않고 그 다음 또 다음 또 다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여 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 이 과정을 보면 바로도 인간적으로는 영웅이고 모세도 인간적으론 영웅입니다. 두 영웅이 마치 기와 세력의 싸움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승리는 어떤 영웅이 더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에게 함께 했는가에 의해서 결정됨을 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고 바로는 하나님을 항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함께하면 모세가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홉 번의 대 재앙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바로는 열 번째 애굽의 모든 장자와 첫 생축을 치는 재앙에는 손을 들고 맙니다. ‘이것만 버티면 나는 살아날 수 있다’ 생각했으면 바로의 성품상 또 다시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마음에 드는 생각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여태까지 버텨오니 내가 결국 장자를 잃어버리는 애굽의 모든 장자와 초태생을 잃어버리는 이와 같은 대 재앙을 당하게 되었는데 만약에 내가 여기서 물러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바로는 그 다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 같아요? 열 번의 재앙에서 만약에 모든 초태생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 다음에 남은 일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애굽의 모든 민족을 다 쓸어버리고 애굽의 모든 생축을 다 쓸어버릴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바로는 그 정도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백성을 데리고 빨리 나가라. 나를 위해서 축복하라’ 결국 하나님 앞에 바로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유월절 사건으로 인해서 모세는 하나님이 이루신 대 출애굽의 역사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430년의 역사가 뒤바뀌는데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감격과 마음의 감동과 인상을 주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일제 40년 동안 강점을 당하였다가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 민족은 얼마나 기뻐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까? 그리고 해방이 된 것을 기뻐하여 지금까지 광복절로 우리는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의 무려 11배정도 되는 430년의 기간을 종살이 하다가 그들은 해방되고 그들의 나라 가나안을 향하여 갈 때 그들은 얼마나 큰 감격이 있었겠습니까?

언젠가 저희 성도님 중에 봉사를 열심히 하는 성도님이 초청을 해서 집에 한번 심방을 갔습니다. 새로 집을 마련하고 심방을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함께 식사하면서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결혼하고 처음으로 집을 마련해서 이사를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으로 본인의 개인소유로 구입을 하신 것입니다.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그 성도의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기분이 좋았겠지요? 굉장히 기분이 좋고 흡족했습니다. 너무 너무 좋아하시는데 저도 굉장히 마음이 좋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십수년 만에 집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은데 430년 만에 내 집 찾아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경험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이니 수천 년 동안 나라 없이 지내다가 그 땅을 회복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 이후에도 모세는 갖은 고난 속에서도 결코 그 백성 인도를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가나안의 목전에 이르게까지 했던 그의 삶을 이룹니다. 처음에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룹니다. 뒤에서 다시 마음이 바뀐 바로의 군사가 쫓아 올 때 앞에 넘실거리는 홍해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지팡이를 들고 가리킬 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육지가 된 홍해를 건넙니다. 그리고 마병이 따라올 때 이 바로의 마병은 홍해에 수장이 됩니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용기백배 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우리를 놓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우리는 다시 추격하는 너희는 죽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이와 같이 인도하는 백성이 아니겠느냐라고 그들은 희희낙락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쁨도 잠깐일 뿐 그들에게 목마르고 배고프고 그들에게 피곤하고 지친 일이 있을 때 그들은 또다시 불평과 항거를 하게 됩니다. 비록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항거와 불평으로 말미암아 범죄를 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불평과 항거로 인한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이라는 암담한 세월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모세는 지도자로서 가나안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길길이 제 길로 인도하지 않고 계속 빙빙 돈다는 것도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종살이 하는 무식한 백성이라도 여러분 거기서 들은 정보가 없었겠습니까? 가나안이 어디인지 모르겠습니까? 어느 정도 지나가면 된다는 것 모르겠습니까?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던 사람이에요. 광야의 지리에 대해서 능통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야한다는 것 모르겠어요? 여러분 성지순례가면 가보지만 그 광야가 40년을 걸어갈 거리입니까? 세상에 40년을 걸어가야 할 거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세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갔던 길 또 가고 갔던 길 또 가고 빙빙 도는구나’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빻아내기 위해서 40년 동안 빙빙 돌리면서 불평하고 불만했던 모든 백성들 땅에 다 묻고 새로운 세대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엄선된 훈련된 백성들을 가나안 정복의 전쟁에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가나안에 입성하신 것을 봅니다. 그러니 40년 동안 또 빙빙 돌면서 모세의 지루함과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이 고통의 세월들을 순간순간마다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해가며 분주한 삶의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 내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날마다 닥치는 수많은 일들을 처리해야하는 애씀의 시간 속에 그는 뜨거운 열정으로 주어진 일들을 사모하고 이루느라고 그는 고통과 마음의 지루함을 느낄 여유가 없던 것입니다. 지난 고통과 곧 연속의 아픔의 세월 속에서도 우리는 삶의 열정이 있어 달려갈 길이 있고 달려갈 목표가 있다면 우리는 분주하게 우리의 삶의 열정을 가지고 그 길을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뜨거운 열정이 있어서 아플 틈도 없고 우리는 슬플 틈도 없고 우리는 마음의 지루할 틈도 없이 우리의 삶의 길을 달려가다가 주님께서 문득 우리를 부르실 때 기쁨으로 주님나라에 입성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이 광야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준비를 시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40년을 방황할 때 모세가 알아차리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결국 이 일을 이루어 갔던 열정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때 이 뜨거운 열정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어요. 아무리 좋은 일이어도 반복되면 그것은 권태를 줍니다. 뜨거운 열정이 우리의 삶을 이루어 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의 리더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일어나는 모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사실 실수와 실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이 있었기에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모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목전에 이른 모세는 하나님께서 느보산에 이르게 하시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보게 하십니다. 하지만 그 가나안의 전경을 보았을 때 모세의 마음의 설레는 그 아름다움 꿈과 같은 땅에 대하여 모세는 청천병력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모세야 너는 가나안땅을 보긴 하지만 너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에 대해서 명쾌한 이유를 설명 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40년 동안 고초를 겪으며 살아왔는데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모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명쾌하게 설명하는 하나님의 이유는 이것일 것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므리바 반석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모세의 실수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의 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0장 7절-13절을 보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백성 앞에 분노하는 모세에 대한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가나안에 못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목이 마르다고 모세에게 항거하고 하나님께 항거하고 욕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됩니다. 모세는 마음이 슬펐습니다. 너무너무 분노가 일어나고 마음이 슬펐습니다. 그저 가다가 조금 나아지면 또 그러고 가다가 조금 괴로우면 하나님을 욕하고 모세에게 항거하는 백성들을 볼 때 모세로서는 너무너무 화가 났던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정말 이 백성에게 물을 주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세야 므리바 반석 앞에서 네가 물을 내라 명하면 물을 내겠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므리바 반석에 가서 ‘물아 나오너라’ 하고 명령을 했어야 했는데 모세는 너무 화가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팡이를 가지고 보기 좋게 두 번 후려쳤습니다. 그러자 콸콸하고 물이 쏟아진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으로 영웅이 된 것입니다. 누가 모세 앞에 고개를 들겠습니까? 누가 모세 앞에 고개를 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은 질책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인기를 얻고 사람 앞에 영웅이 된들 하나님 앞에 반드시 박수받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야 너는 결국 네 분노로 말미암아 내 말을 어기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너보고 지팡이를 가지고 치라고 하였느냐 나는 너에게 명하여 물이 나라고 하였는데 너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네 분노로 백성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겠다는 마음으로 너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너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니냐’ 결국 모세의 혈기는 이와 같은 결정적인 실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의 운행을 이루시는 섭리의 전형을 이루게 됩니다. 모세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그 자리에서 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계속 일을 맡겼습니다. 왜지요?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가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수십 년 동안 잘 지내다가도 마음 틀어지는 일이 있으면 ‘내가 이제까지 당신을 잘못봤어’ 하면서 등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이렇게 잘못해도 끝까지 모세의 잘못한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갑니다. 왜지요? 하나님은 보다 긴 호흡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다 긴 호흡을 가집니다. 우리 인간들은 참을성이 없어서 그렇게 좋아 하다가도 한 순간 틀어지면 그 좋아하던 모든 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냥 탁 마음 돌리면 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정말 모세의 범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면 모세가 가나안을 보고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순간을 넘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과는 다르십니다. 호흡이 길고 참음과 인내가 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 순간의 분노 때문에 그의 모든 계획을 망가뜨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와는 전혀 생각의 수준이 다르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잘못한 일도 많고 실수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시간 살아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직까지도 우리가 모세처럼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용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용도가 있으면 폐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룰 용도와 계획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것이 없으면 여러분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성가대도 노래를 잘 부르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3년 정도 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다 참다 3년 지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슬쩍 ‘이제는 다른 일 하는 게 어떻겠어요?’ 하고 권면하겠지요? 용도가 끝나면 폐기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호흡하고 있다는 게 왜 중요한지 압니까? 우리가 호흡하고 아직까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사명의 복음과 역할의 복음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호흡하고 몸을 움직이는가 이게 굉장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이와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은 움직이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내가 실수해도 실패해도 하나님께서 덮어주시며 끝까지 데려가시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서 그의 뜻을 이루시기에 인간의 잘못들 하나 집어서 그것 가지고 계획을 변치 아니하십니다. 그는 좀 잘못하고 실수하고 실패했다고 무슨 악담할 필요없습니다. 또 내가 잘못했는데 일이 잘된다면 ‘내가 잘못했는데 일이 잘되네. 내가 잘하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최종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최종결산’ 최종결산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또 최종결산까지 갈 테니까 또 기회가 있으니까 그 시간에 만회해보자. 또 내가 잘못하는 것이 있는데 잘되면 ‘야 최종결산 때 하나님이 혼내실 테니까 내가 여기서 교만하지 말고 또 다시 열심히 해보자라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최종결산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울 왕은 최종까지 못 갔습니다. 도저히 안 되면 교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왕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교체하고 왕조를 다윗왕조로 바꾸었습니다. 사울왕조가 아니라 다윗왕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운행하시는 섭리를 보고 참고 실패를 딛고 일어서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세상에서 어떤 모임이건 우리가 지도력을 발휘하는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실수나 실패 때문에 낙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일을 끝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실수와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세는 리더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분노에 빠져서 하나님의 생각까지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결정적인 아픔이 되었습니다.

수고하고도 열매를 맺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수고하는데 말로 다 깨뜨려 버려요. 수고하고 내 공로를 찾고 싶어하다가 결국 그 수고가 빛을 바래요. 수고하고 자기 몫을 찾다가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빠지면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연약한 면모를 봅니다.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엄살 부리며 하나님께 죽고 싶다고 하는 모습을 우리는 또 보게 됩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다베라 지역에 이르게 됩니다. 백성들이 생떼를 쓰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었을 때는 고기를 가마니로 두고 코에 삐뚤어지도록 고기를 먹었는데 여기오니 그저 만나같은 것이나 먹고 또 부추와 외도 못 먹고 우리 힘이 약하여져서 도저히 못 살겠다. 우리 애굽으로 돌아가자.’ 배고파서 그렇게 얘기를 했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만나를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종살이 했던 그들이 애굽에서 고기를 마음대로 먹겠습니까? 생떼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지루하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싫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자기 한계를 봅니다. 내가 이들을 도저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민수기 11장 15절을 보면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죽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불경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자식이 부모한테 어머니 나 당장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여러분 마음이 편하겠어요? 그래 때가 됐구나. 여러분 그렇게 얘기하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습니까? 마음이 얼마나 상하시겠습니까? 내가 이런 사람을 가나안에 들어가는 지도자로 세우겠다니 하고 마음이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이러한 엄살에도 불구하고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민수기 11장 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하고 위로하셔서 결국 그들이게 만나와 더불어 메추라기를 주시고 결국 그 백성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어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모세를 보면 좀 답답하기도 합니다. 모세같은 기적을 행했으면 모세같이 죽고 싶다고 얘기했겠어요? 모세는 지팡이 한번 휘두르면 기적이 일어나고 지팡이 한번 휘두르면 홍해가 갈라지고 정말 별 기적이 다 나타나고 능력이 다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 하나님께 이렇게 하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안 그러죠? 여러분 그럴 것 같으십니까? 우리는 안 그럴 거 같아요.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 저 백성이 또 물을 달라고 저러는데 이번에 저 백성이 고기를 달라고 그러는데 하나님 이제까지 큰 기적과 능력을 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이번에는 저들에게 고기를 주어 저들에게 먹이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닌가봐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모세는 참 이상해요. 아니 그런 큰 기적을 봤는데도 불구하고 구름기둥 불 구름이 인도하죠, 홍해를 갈랐죠, 수장이 되죠, 거기다가 물을 나게 했죠. 모세는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낙심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귀찮고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 그러면 자기가 죽는 게 낫다고 하면 하나님이 모세를 택해서 세우신 이유는 뭐겠습니까? 결국 모세는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위로해가면서 모세를 데려갔던 것입니다. 모세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끌고 갔던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이렇게 불평을 하기는 했지만 투정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기 생명보다 더 한 사람이에요.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산에 갔을 때 십계명을 받고 내려왔더니 그 사이를 못 참고 사람들이 뭘 했습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돌판을 던져 버리고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들이 다 전멸하게 됐어요. 그랬더니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화는 났지만 그는 마음을 숙여서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2절을 보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자기의 생명과 구원보다 그 백성을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 연민에 빠져 자기 신분을 망각하고 고통스러운 것만을 생각할 때 이런 아픔의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것입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절대 복종, 자기 부인,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자, 헌신하고 잊어버리자.” 제가 늘 말씀드리죠. 절대 복종의 심정이 없으면 므리바 반석같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하면 이것은 정말 자기 자랑이나 나대다가 결국 추락합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면 모세가 ‘나 죽고 싶습니다.’라는 것 같이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불쌍해 나는 이렇게 어려워 나는 새벽기도도 나오고 또 출근도 해야 돼. 나는 주일날 어디 놀러가지도 못하고 매일 교회 나와야 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불쌍해요? 자기 연민에 빠지면 우리는 한없이 불쌍합니다. 하나님 나 죽고 싶어요. 그렇게 말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은 신앙의 가장 큰 적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 나 정말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 말고 어려움이 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 이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가 성령충만할 때가 아닙니까? 그리고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헌신하고 잊어버리자.’ 헌신하고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우리의 믿음이 진보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10년전 헌신하고 그것을 여태까지 기억하고 있어요. 신기하잖아요. 10년 전의 헌신을 기억하고 있는다는 것은 10년 동안 헌신 안 했다는 뜻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무슨 뜻이라고 말씀드렸죠? 날마다 날마다 선을 행하다 보니까 내가 선을 행했는지 기억조차 안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른손이 한 것을 어떻게 왼손이 모르겠습니까? 그러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선을 한번 행하면 3개월동안 가슴이 떨려요. 주일 예배 나오면 가슴이 설레어요. 왜냐하면 1년이 2번 나오니까. 우리가 한번 헌신하면 그 헌신하고 잊어버려야 되요. 왜 잊어버리죠? 날마다 헌신하고 있으니까 과거는 생각도 안 나요. 과거에는 10의 헌신했으니 이제는 20, 30, 50, 100, 그 다음에 200, 1000. 헌신이 점점 커져요. 그러면 과거가 생각나겠습니까? 지금 하는 헌신과 앞으로 해야 할 헌신에 대해서 점점 더 기대가 되는데 과거가 생각이 나겠어요? ‘나 이런 헌신 했는데’ 하면서 잊어버리지 않고 섭섭해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섭섭한 마음이 든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그 만큼 퇴보했다는 것입니다. 섭섭한 마음이 든다는 것은 자기가 그 만큼 바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충만하면 섭섭한 마음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한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큰 실수를 한 모세를 왜 그냥 두셨을까? 이런 결정적인 실수에도 사실 모세는 많은 실수와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작은 실수와 실패를 들어 그를 치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에게도 아직 용도가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주시고 우리들에게 은혜를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실수가 분명해도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할 용도를 보고 모세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실수와 실패가 있을 때마다 징계하신다면 우리가 어찌 우리의 일을 마지막까지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이 실수하고 실패하면 그냥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넘어가십니다. 왜냐하면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지와 핑계로 자신이 없어하며 하나님의 일을 거부해도 하나님은 설득해서 쓰셨습니다. 실패하고 포기하죠. 그래도 하나님은 설득해서 데려가십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 어느 누구하나 다 완벽한 사람 없었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서 방주에 올라가서 거룩한 씨앗으로 보존됐어요. 방주에서 내려왔을 때 노아는 얼마나 감사해요. 그런데도 그는 술먹고 실수를 했습니다. 술에 취해서 실수해서 하체를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 중에 그 하나가 그것을 가지고 비방할 때 화가 나서 저주해 버렸습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자기의 잘못을 지적한 그 자식을 저주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어려움입니까? 당대에 의인이라는 노아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수많은 고통과 수많은 실수와 심지어는 먹고 살기위해서 이방으로 내려갔고 거기 내려가서 살기위해서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남의 손에 넘긴 이런 실수와 실패 투성이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녀가 있게 하겠다고 할 때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실수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습니다.
요셉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요셉처럼 우리가 좋아하는 인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요셉도 자기의 빛을 가리우는 겸손대신에 분별력없이 그도 나댔던 사람입니다. 채색옷을 입혀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그가 받았다면 정말 감사하고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는 자기의 빛을 가리우기 위해서 갈아입고 자기 형제들에게 나타났어야 합니다. 그는 그냥 채색옷을 입고 폼 재고 다녔습니다. 형들이 시기 안하겠습니까? 가뜩이나 꿈꾸고 형제들에게 경솔하게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도 안하고 말을 합니다. 형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결국 그는 형들의 분노를 샀고 그 분노를 말미암아 결국 그는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사도로 교회를 세우는 큰 역사를 이루었지만 실수투성이고 예수님 면전에서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를 깨닫지 못했을 때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예수를 핍박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실패와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결국 그들은 용서받고 인도받고 자비하심을 받아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요 이 세상 속에서 믿음의 백성으로서 리더의 역사를 감당할 때 우리들에게는 어떤 실수와 실패가 있어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삶을 온전히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호흡을 주시는 한 나에게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다시 일어나 우리들에게 삶의 어떤 장면에서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성공과 실패의 담을 넘어선 위대한 거인의 삶을 봅니다.
자신의 원함과 소원을 이루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고 자신의 원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실패로 여기는 수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대로 내 삶이 인도되고 있다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고 있는 모세의 모습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정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못갑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성공,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패하면 성공과 실패의 장벽을 두고 한쪽은 성공 한쪽은 실패라고 그러면 모세는 분명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느정도 컸는가 봅시다. 모세가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다 마음에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 끝이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백성들을 위해서 손을 들어 다 축복해 줍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가나안이지만 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도 모세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이에 그는 이미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는 전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모세의 마음에는 이미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는 큰 사람이 됐던 것입니다. 모세는 한쪽에는 성공 한쪽에는 실패, 그 두 가지에 양발을 딱 딛고 그 위에 올라선 큰 거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장벽이라는 것은 모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실패와 성공의 장벽이 없고 실패와 성공이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모세의 삶 자체가 성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과 실패의 담을 넘어서는 큰 거인이 된다면 우리는 성공했다 실패했다 이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통보를 받았을 때 감사합니다. 모세는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못 들어가지만 그들은 들어가니 감사합니다. 모세의 마음에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담을 훌쩍 넘어버리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과정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만드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의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거부하건 순종하건 결과는 똑같아.’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그는 그의 삶의 과정을 통해 그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는 이삭을 모리아 산의 제물로 드리려고 모리아 산에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제가 늘 사람은 참 안 변한다고 말씀드리죠. 정말 사람 지독하게 안 바뀌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10년 전의 성품이 지독하게 안 바뀌고 있는데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바꿔주실 줄로 믿습니다. 왜죠? 우리 인간들은 안되지만 하나님이 과정을 통해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세대 중에 사사기를 보면 여호수아와 생존하는 장로들의 세대에는 하나님을 알았다고 애기했습니다. 그 후 세대들은 하나님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전에 있는 세대가 후세대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 세대들은 어떻게 알았죠?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 속에서 광야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삶의 과정을 통해서 완성됐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왜 즉각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그 기도의 응답으로 어떤 응답이 즉각 오기 전에 우리들에게 그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그 사이에 마음쓰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과정가운데 기도의 열매 뿐 아니라 이미 우리 자신이 그 응답의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시험을 보기 위해서 준비 했어요. 시험에 합격했어요. 합격하는 합격증서 한 장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합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사이에 그의 실력이 그 만큼 늘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떤 다른 시험도 유사한 것 보면 합격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따라서 우리에게 과정을 매우 중요히 여기십니다. 과정없이 어떤 결과를 주시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더 큰 축복은 정말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축복에 몫을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그 백성이 축복받는 것을 자신의 유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모세는 이와 같은 영적인 거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해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들은 들어가’ 이것을 확인한 모세는 어찌하면 그들이 더 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서 그들을 축복합니다. 적어도 자기의 적은 유익하나 넘어서면 그는 거인입니다. 영적인 거인의 기준은 자기의 유익, 내 마음의 편함, 내 마음의 정서적인 만족, 원하는 대로 이루어짐이라는 이 수준을 훌쩍 뛰어넘으면 그는 거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과 몫은 이미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아니면 항거하지 않고 그의 해야 할 일과 백성을 위한 축복한 것을 볼 때 이미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소유나 명성과 명예의 성취의 개념을 벗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수준을 벗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정말 성공했다는 것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가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형들이 곡식 구하러 와서 요셉 앞에 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습니다. 요셉은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한번 휘두르면 끝나요. 형들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밝힙니다. 형들이 깜짝 놀라서 ‘우리는 죽었구나’ 그런데 요셉이 뭐라고 합니까? ‘염려하지 마소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하나님이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나를 이리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들 두려워 마소서’

두 번째 야곱이 죽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더 깜짝 놀랍니다. ‘이제까지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 마음을 위해서 우리를 살려 두었는데 아버지도 죽었는데 우리들 그저 한 숨에 해치면 그만 아닌가?’ 그래서 그들이 요셉에게 와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셉이 그 형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무 마음이 답답해하면서 ‘내 마음을 왜 이렇게 몰라줍니까? 정말 나를 이리로 오게 한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나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들의 후손까지도 다 돌봐주리다.’ 요셉의 마음은 이만큼 커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승리는 정말 내가 원하던 어떤 것을 이룬다 이루지 못한다 그와 같은 것이 승리가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이 작아 보일 만큼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잘 안되도 감사합니다. 어떤 일이 잘되도 감사합니다. 그와 같은 것을 둘다 작은 것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우리는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분당중앙교회 모든 성도들은 이와 같은 영적인 거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나쁜 날이 있으면 그냥 기분 나쁘고,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기분 좋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으나 나쁘나 그 가운데 뜻과 섭리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진정한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로 인해 그는 마음에 진정한 자유로 얻고 그의 모든 삶은 그 자체가 성공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어’ ‘내게 유익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어’ 이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은 결국 삶의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심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완벽한 승리를 선언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는 풍부에도 나는 비천에도 나는 높은 곳에도 낮은 곳에도 다 처할 수 있으니 나는 어떤 경우에도 상관없다’ 그는 완벽한 승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개념이 인간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미 성공과 실패의 개념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어떻게 우리의 인간이 성공과 실패를 개념화한다면 구분하여 가린다면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성공과 실패가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자체가 성공이고 내 삶의 과정이 성공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 자체가 성공인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뭐 이러니 저래도 우리 인간이 볼 때 성공이다 실패다 그래도 우리 인간이 감사한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지요. 가시적인 승리와 실패를 넘어서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음이 승리가 되는 영적인 거인이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께 여쭐께요. 여러분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니까 하나님 앞에 승리한 백성이지요? 마음에 기쁨이 있어서만 예배를 드리고 마음에 슬픔이 있어서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기쁨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마음에 슬픔이 있어도 하나님께 마음에 위로를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내가 슬픔이 있어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기쁨이 있어도 마음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히 나올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결국 슬픔도 기쁨도 합해서 감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도록 합니다. 우리는 리더로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리더는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래 이 설교를 구상하게 된 것은 모세를 통해서 모세의 리더십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 대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세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이 보여지지 않고 자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열정적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와 같은 열정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열정있게 만드셨던 것이더라고요.

우리 성도님들이 이와 같은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열정이 사라진 성도는 더 이상 세상과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우리는 또 다른 삶의 열정이 우리를 불살라야 합니다. 우리는 안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플 틈과 여유가 없어야 합니다.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힘든 것을 느낄 여유가 없어야 합니다. 뜨거운 열정 때문에 용광로는 모든 잡속을 다 녹여 필요한 쇠만을 뽑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용광로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합당한 것만을 우리는 누릴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슬픔과 고통과 눈물이 내 가슴에 다 들어올지라도 그 가운데 기쁨을 뽑아 누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한 뜻을 이루게 하실 용도가 있을 때 어떤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용서와 위로와 힘을 주시니 그 거룩한 것을 이루어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삶의 현장에도 인간의 성취나 성공이나 실패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이 우리의 기쁨과 감격이 되어지도록 진정한 영적인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구도자의 심정을 잊어버리면 믿음은 우리에게 짐이 될 뿐입니다. 만약에 예수 믿는 것이 내 마음에 소원을 이룰 정도로 끝난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믿음은 곧 짐이 되고 맙니다. 내 마음에 소원을 이루었을 땐 기쁘지요. 그렇지만 조금 지나면 내 마음에 소원을 이루었던 그 사실 자체도 부담스러워집니다. 결국 우리의 영적인 삶은 끊임없는 구도자의 심정으로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성숙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꿈이 있어 그것이 추구되고 기쁨이 될 때 진정한 힘이 되고 삶의 날개가 됩니다. 삶의 어려움을 해결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진정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리더로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일어남과 가시적인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는 믿음의 거인으로서의 삶을 살아 마침내 하나님의 가나안을 향하여 달려가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모세같이 우리의 삶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다 능가하는 영적인 거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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