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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여인의 간증 (요 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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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여 결혼해서 22년간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내와 저는 같은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학교를 졸업하고나서 처음 만났습니다. 아내가 종종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더 좋았을텐데.. 대학교에서 어디에 숨어 있었기에 한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냐고..'

그렇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한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은 아름답고 축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훨씬 축복되고 아름다운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만남입니다. 우리 교회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서 처음으로 참 행복을 찾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진짜 사랑을 받는 행복을 맛 본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참된 기쁨을 발견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참 사랑을 받아 누리며 행복을 알았기에 가정에서 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더 많은 사람을 품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성경속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자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한 여자에 대하여 말슴드리고자 합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기전에는 아무 기쁨이 없이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진실한 친구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싫어한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마음에는 상처뿐이고 본능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공격적이며 날카로운 발톱을 치켜세우는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이 사는 동네는 수가라고 불리웠습니다. 수가 마을에는 야곱의 우물이라는 오래되고 깊은 우물이 있었습니다. 여느날과 같이 이날도 한 낮에 이 여인이 물을 길으러 우물로 물동이를 이고 걸어갔습니다. 중동에서는 저녁에 선선할 때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긷습니다. 그들은 한낮에는 활동하지 않습니다. 낮잠을 잡니다. 이 여자는 대낮에 남들이 물을 긷지 않는 시각. 정오에 우물가로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자신을 향해 수근 수근하는 것이 거슬려서 아무도 없는 한 낮에 물길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우물가에 낯선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낯선 유대남자가 말을 걸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물 좀 주시겠습니까?" '이 남자 혹시 나에게 맘이 있어서 말을 붙이는 것 아냐?' 하고는 순순히 물을 주지 않고 "당신은 유태인으로써 어찌하여 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쏘아붙입니다.

유태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과 피가 섞인 혼혈이고 유대인은 순수한 혈통을 지켜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항상 사마리아인들을 천대하고 멀리했습니다. 지나갈 때도 사마리아로 가지않고 멀리 돌아서 다녔습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이 아쉬운 소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관계가 있다고 다정하게 말을 거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같은 생각을 하는 분은 없습니까? 예수 얘기를 꺼내면. 나는 한국인이고 예수는 유태인인데 그 예수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타인이니 그에 대하여 알 필요가 하나도 없다.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수가마을의 여자도 여러분과 같이 '도대체 예수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타인'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첫번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계속 대화를 나누면서 이 여인의 생각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5절에 보시면 "여자가 가로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여자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그랬어요. '나에게 그 물을 주십시오.' 여러분 조금전과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크게 달라졌습니까?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했는데, 이 여인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저에게 물을 좀 주십시오."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굉장한 변화가 아닌가요. 어떤 대화가 벌써 이런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을까요?

10절에 보시면 재미나는 대화가 나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물을 달라고 그랬지만 내가 누구인줄을 당신이 알았더라면, 오히려 당신이 나보고 물을 달라고 그랬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었을 것이오.' 아주 재미난 대화가 아닙니까?

14절에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그것은 밖에서부터 이렇게 채워지는 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솟아날 수 있는 물, 당신이 나에게 부탁하면 나는 당신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당신 안에 행복의 우물주겠소. 그래서 내 안에서 언제나 길어 먹을 수 있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환경이 아무리 변하고 변해도 내 속에서 계속 솟아 오를 수 있는 영생의 샘물.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 그 영생을 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왜, 영생을 물에 비교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물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물이 필요하지 않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물 없으면 죽습니다. 물은 사치품이 아닌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영생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영생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마음속에 서서히 이런 변화가 일어 날 수 있습니다. 혹시 예수 믿으면 그분이 나에게 건강을 주실까. 혹시 그분이 나에게 행복을 주실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영생을 선물로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이 얼마나 목이 마른 광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시면서 이 우물에서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재물의 물을 먹어도 모자라요. 쾌락의 물을 마셔도 모자라요. 명예의 물을 마셔도 모자라요. 잠시 만족하는것 같다가 금새 갈증에 시달리고 해소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얼마큼 돈을 벌으면 만족할까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는 아마 록펠러일 것입니다. 한번은 이 록 펠러에게 어떤 신문 기자가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당신은 얼마큼 돈을 벌어야 만족하십니까?' 이 때 록펠러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벌면 된다. 조금만 더.'

제가 처음에 신혼시절에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산적이 있습니다. 자그만 다락이 있었는데 전기 장판을 깔고는 어머니를 거기 주무시게 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불효를 하는 것 같은지 집에 들어오지를 못하고 밖을 배회했습니다. 그러다가 반송아파트 10평을 임대로 들어가 살게 되니 어찌나 좋은지 몰랐습니다.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17평으로 이사하고 31평 아파트로 이사하여 그러니까 화장실 2개 있는 아파트로 이사가니까 정말 만족하며 살 것 같더라구요? 그러나 얼마 지나니까 교인들이 40 평 50평 늘려서 이사를 하고 이사 예배를 드려 달라고 해서 가 보니까 나는 언제나 이런데 와서 살아보나? 하는 생각이 또 드는 것입니다. 5년전에 예배당을 건축하다보니 돈이 부족하여 31평 사택을 팔아 건축비에 보태고 2층 한쪽을 설계 변경해서 임시 사택을 만들어 이사했습니다. 아이들이 "아빠, 친구들에게 우리는 몇 평에 산다고 말해?" "우리는 500평에 산다고 해라. 그리고 그만큼 넓은 집에 사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래서 한동안 아이들이 정말 그렇게 떠들고 다닌 것 같아요. 친구들이 진짜 그런 집이 있는가하고 확인하러 집에 놀러왔습니다. 전도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인간의 마음속에서 계속되는 욕망은 결코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쾌락도 조금만 더 재밌는 것, 어디 재밌는 일 있을까? 허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찾아요. 그 무엇이 뭔지 모르고 계속 찾아요. 그리고 계속 목 말라 합니다.

어쨌든 이 여인의 태도는 굉장히 변했습니다. 아까는 나하고 절대로 상관없는 예수라 여겼는데 이제는 그 무엇인가를 주실수 있는 예수. 끝없이 일어나는 나의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간청하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여러분중에 예수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분, 아주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던 분도 오늘 내 인생의 갈증을 풀어주실 분임을 발견하고 간절히 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이 여인처럼 여러분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 그러나 이 여자가 또 한번 변신합니다. 조금 더 변했어요. 어떻게 변하는가 또 이 여자의 고백을 한번 들어 보세요. 자, 요한복음 4장 19절을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수님을 향해 '주여, 당신은 선지자 이시군요.' 굉장히 변했습니다. 자, 조금 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유태인, 나는 사마리아인. 당신은 남자, 나는 여자.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수라고 생각하여 틱틱거리며 거부하다가 조금 변해 '나에게 주세요. 뭔지 모르지만 그것 주세요. 나를 목마르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 물을 내게 주십시오.' 나에게 뭘 제공할 수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러더니 이 여인의 입술에서 터져나온 '당신은 선지자로군요.' 이는 굉장한 변화예요.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순간 예수님이 대화를 바꾸십니다. 충격요법을 쓰십니다. 전혀 엉뚱한 얘기를 예수님이 끄집어 내셨어요.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갑자기 예수님이 남편 얘기를 해요. 오랫동안 교분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고, 우물가에서 처음 만난 낯선 남자가, 남편 불러오라고. 그러니깐, "전 남편 없어요. 남편 없어요."하고 잡아 뗍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맞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지." 충격을 받습니다. '아니 오늘 처음 만난 이 사람이 내 과거를 다 알고 있다니.. 그렇다면 이 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어이구 당신은 선지자 이시군요. 요걸 쉽게 바꿔 지금식으로 말하면 '참 용하시네요. 쪽집게네요.'

아주 재미나는 얘기가 생각이 나는데요. 어떤 남자가 말이죠, 어떤 여자하고 데이트를 하고, 무척 좋아했는데 여인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남자에게 자기는 이제 시집 가게 되었다고 통보를 했어요. 그래도 사랑했던 여자인데. 이제는 과거를 잊어 버리고 잘 살아 가도록 내가 축복하고 싶어서 이 여인에게 축복하는 전보를 띄어습니다. 네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그리고 성경구절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어 과거를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모든 마음속의 불안이나 두려움을 다 떨치고 새로운 미래를 찾아가길 원하는 마음으로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요한일서 4장 18절.'하고 전보를 쳤습니다. 그런데 우체국에서 실수로 요한은 일서를 빠트렸어요. 그래서 결혼식장에 도착한 축전을 사회자가 친절하게 찾아 읽어 주었습니다. 결혼을 축복한다. 요한복음 4장 18절. '네가 전에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결혼식장이 다 뒤집어졌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너 남편 다섯 있었지. 그러니까 지금 남편도 남편이 아니지.' 그러니 찔린거예요. 찔리니까 화제를 바꾸어 예수님을 오히려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그림시스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저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꼭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것이 옳다는데 어느것이 옳습니까?" 우리가 보통 믿지 않는 이웃들과 얘기하다 보면, 예수 믿지 않는 분들은 찔림을 받으면 다른 얘기하길 합니다. "아니 왜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 교파가 많습니까?" 또는 "하나님은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을 줄 알면서 왜 만들었습니까?" 꼭 이 여자도 똑같았어요.

근데 예수님이 아주 친절하게 대답하십니다. '아 예배는 사마리아에서 예배하느냐,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느냐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면서 '에이, 그런 얘기 관둡시다. 골치 아프네요. 뭐 지금 우리가 이런 어디가서 예배 드리냐? 그런 것 다 메시야가 오시면 대답해 주겠죠.' 유태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려 왔거든요. 이 말은 본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자다. 이런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속에는 가짜가 많았습니다. 가짜 선지자가 많았습니다. 그랬을 때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계속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진짜 선지자가 온다고, 하나님이 기름 부어주셔서 우리들을 정말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그 선지자가 온다고. 또한 제사장. 제사장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한다든지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중간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중간, 중매 해결자의 역할을 하던 것이 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불행,등 언제든지 그 문제를 짊어지고 나가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해서 해결하는 해결사가 제사장이거든요. 그 다음에 왕은 통치하는 것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새로운 희망을 갖습니다. 그러나 2년만 지나가면 실망을 안겨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대통령으로 세움받아 처음에는 곧 통일, 세계 일등 국가를 이룰것 같은데 조금만 지나보면 인기가 쫙 떨어져요. 정치를 잘 못하고 부정부패와 연결되고.. 그것이 인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런 약속을 하는 거예요. 그래.너희들 왕한테 늘 실망했지.선지자한테도 실망하고, 제사장한테도 실망하지. 내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을 한꺼번에 완성할 사람, 내가 기름 부어 세울 사람을 내가 보내주지. 그 분이 오면 너희들에게 진짜 진리를 가리치고, 너희들의 죄 문제 해결해 주고 용서해 주고, 그리고 너희들의 인생을 다스리시고 통치해 주실거야. 그 메시야를 내가 보낼 거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간절히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그리스도를 기다려왔어요. 내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그분을 기다렸어요
근데 이 여인이 "그리스도가 오시면 다 대답을 주실텐데요." 하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야. 내가 메시아야. 내가 그리스도야." 이 여인이 까무러칠뻔 했을 거예요. 자신이 메시야를 지금 만난 것입니다. 메시야와의 대화속에서 여인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평안을 얻었습니다, 확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영생수 샘물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갈증이 다 사라졌어요. 기쁨이 솟아났습니다. 이제 더이상 죄책감으로 사람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자, 이 놀라운 발견, 이 놀라운 은총 앞에서, 이 깨달음 앞에서 이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그 다음절, 29절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더냐" 물동이도 버려두고 동네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물 길을 생각을 잃어 버렸어요. 왜 그러느냐고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달은 순간 갈증이 사라졌거든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역시 나처럼 갈증으로 시달리고 있을텐데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기피했던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찾아다니며 여러분 들으세요. 예수님이 메시야예요. 빨리 와서 예수님을 만나보세요. 여러분도 나처럼 에수님 만나고 영생수 샘을 선물로 받으세요. 그러면 배에서 생수의 샘물이 솟아나 행복해져요. 여러분 모두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나 온갖 갈등이 해결되고 기쁨과 평안이 행복이 여러분 안에서 솟아나는 복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문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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