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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용서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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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 심취한 어느 집사님이 주일 1부 예배 기도순서를 맡았는데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세는 줄도 모른다'고 바둑에 푹빠져 토요일 하루 종일도 모자라 주일 새벽까지 바둑을 두고 주일 아침 1부 예배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강단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둑알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합니다. 까만 머리는 까만 알, 흰머리는 흰 알, 의자는 바둑판의 까만 줄로 보이는 것입니다.
집사님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지!"라며 허벅지를 꼬집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자 바둑 용어가 뛰쳐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겨우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만... "아다리"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관심이 무엇입니까? 아파트입니까? 김치냉장고입니까? 요즘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좋은 아파트도 있고 김치 냉장고도 필요 하지만 이 보다 중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왜, 문제가 없겠습니까? 항상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그리고 이 국가의 문제도...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용서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계속 시끄러울 뿐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대해서 혐의를 가지고 증오심과 독한 마음, 원한을 풀지 아니하고 내 마음 가운데 암탉이 달걀을 품듯이 품고 있으면 그 독한 마음이 내 육신과 정신생활에 많은 해독을 가져옵니다.

스탠리 존스 혹은 놀만 필의 책을 읽으면 이런 원한과 독한 마음이 우리 정신과 우리 육체에 얼마나 많은 해독을 가져오는지 많은 실례를 들어서 말해 주었습니다.
어떤 여자 분은 평소에 음식도 소화가 잘 되고 건강한 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음식을 먹으면 곧 토해버리고 맙니다. 음식을 먹기만 하면 십분도 못되어 토합니다. 의사에게 가서 아무리 의학적으로 진단해 보아야 무슨 원인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검사를 해 보아도 원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리적 조사를 했습니다. 분명 정신적으로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물어보면서 발견한 결과, 그 여자는 젊은 부인인데 어떤 남자와 결혼해서 그 남편과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꼭 싫어하는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시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어머니가 그 동안은 따로 살았는데 나이가 많고 혼자 생활할 능력을 상실한 시어머니가 며칠 전에 전보를 보내기를 『내가 혼자 살기 힘이 드니까 같이 살자. 내가 이날 너에게 간다』는 것입니다. 이 전보가 온 후부터는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부인은 갑자기 오른팔을 들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의학적으로 조사해 보아야 원인을 알 수 없는데 심리적으로 잘 조사해 보니까 어떤 원인 인고 하니 그는 자기 친정어머니와 같이 오래 살던 여자였는데 그 어머니와 늘 불화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손을 들어서 자기 어머니를 때리고 싶은 충동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심리 가운데서 그만 팔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고쳐 회개한 후에야 이 여자가 오른팔을 썼다고 합니다.

요즘 우유를 많이 먹는데 소가 성날 때에 짠 우유는 사람에게 해롭다 합니다. 우유뿐 아니고 어머니가 성났을 때에 먹인 모유는 아기에게 대단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모유수유를 하는 어머니들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싸움하면서 젖먹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성나고 독한 마음이 생기면 그 독소가 분비된다고 합니다. 성난 다음에는 왜 소화가 안 되는고 하니 위 가운데 위액이 잘 분비되지 않고 위액 가운데 독소가 분비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을 낼 때는 선의를 가지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육체에 고장이 안 나게 만드셨습니다. 악의를 가지고 독한 마음을 가지면 우리 육신에 고장이 생깁니다.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호프대학에서 71명에게 과거의 상처나 원한을 기억하도록 했더니,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화를 낼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미시간 대학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1,32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누군가를 용서한 사람이 한을 품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친구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보다 친구를 사귀고 친구와 교제하며 사는 사람들이 치명적 병을 이길 가능성이 높고, 더 강하고 탄력적인 면역체계를 갖게 되고 정신건강이 향상되고 사회적 유대가 약한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멜른 대학교에서 276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바에 의하면 친구와 사귀고 사이좋게 지나는 사람은 감기에 걸릴 확률도 4분의 1이라고 합니다. 276명 콧구멍 속에 감기 바이러스를 떨어트린 후 5일 동안 격리한 후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평소 친구나 친지들과 사이좋게 지낸 사람들은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 성공하는 것.... 사람과의 관계도 잘 되야 합니다.

언젠가 미국에서 100명의 재벌들에게 “재벌이 될 수 있는 성공요인을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인간관계에서 장점만을 보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단점을 보는 사람... 남의 잘못을 비판이나 해서 남을 힘들고 슬프게 만드는 사람이 성공을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장점을 보고 칭찬을 많이 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사업에서도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남의 허물보다 남의 장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용서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용서하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작정을 해야 합니다. 항상 "용서해야지..." 하지 않으면 미움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도 보세요.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한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입니다. 평소에 성경을 많이 아는 분들이 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을 강조하는데 그 성경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용서를 생각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여인의 잘못을 그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사랑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용서를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여인을 돌로 죽여 처단하자는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냐? 고 예수님에게 묻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잠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말도 되지 않은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도 더 이상 묻지 않고 하나 둘씩 다 돌아갔다고 합니다. 왜요? 왜, 그냥 돌아갔을까요?
성경은 해석하기를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에서 용서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용서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 가정이 살고 이 사회가 사는 길이요, 우리 교회가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부터 가정안에, 교회 안에도 용서가 사라져 갑니다. 그래서 분쟁이 생깁니다. 사랑해야 할 가정이, 사랑해야 할 교회가 말입니다. 이것은 불행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용서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아름다운 용서」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왜 아름다운가? 두 가지 이유입니다.

1. 침묵의 용서입니다.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즉시 판단을 내리지 말라, 남의 일에 전후 사정도 모르면서 반응을 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만한 이유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네 자신을 먼저 알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나도 죄인이다'라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남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죄인입니다.

3-5절은 같이 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7절에 예수님의 대답을 보세요.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무슨 뜻입니까? 남을 보기 전에 너 자신은 어떤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도 죄인이 아니냐?’ 는 뜻에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마7:4에서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다른 사람의 죄를 말하기 전에 자신의 죄를 먼저 살피라는 말입니다.

저도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가만히 살펴보면 "저 사람은 나보다 낫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딸과 아들을 보면 "나보다 낫다. 난 저 나 이때 저렇게 못했는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아내를 보면 몸이 부서져라 부모한테도 잘 하는 것 보면..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화가 났다가도 그런 모습을 보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의를 하다보면 속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참고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내가 만약 권사라면, 내가 만약 장로라면, 내가 만약에 집사라면 내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나보단 낫다' 내가 부족한 것 알면 용서하게 됩니다. 말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를 비롯해 거의 모두가 남의 허물과 잘못에는 대단히 분개하면서 자신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그럼에도 남의 잘못을 보는 만큼 나의 잘못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된 사람입니다.
성도는 남을 쉽게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주제도 제대로 파악 못하면서 남을 잘 아는 것처럼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러분, 사탄에게 이용당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 서로 사랑해야 함을 알면서도 비판을 하고 정죄를 하게 되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사탄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고후2장11절에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탄은 용서하지 않게 만들어 교회와 잘못한 사람을 모두 파괴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지 마세요. 비판이나 정죄, 불평이나 원망... 이런 생각이 들면 ‘이것은 사탄의 역사구나!’ 하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외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까지도 넘어뜨립니다. 무섭지요. 사탄의 이간질을 경계하세요. 바울은 그것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 주어야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이렇게 한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하셨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주어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성품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성품입니다. 모든 성품 가운데 가장 고귀한 성품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 왕의 역사를 잘 알거니와 다윗 왕도 허물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고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윗의 성품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과 같은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의 용서는 원수의 축복을 받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보세요. 사울 왕이 3000군사를 이끌고 ‘하길라 산’에 숨어있는 다윗을 잡으려고 길가에 진을 쳤습니다. 숨어 있던 다윗은 밤중에 사울 왕이 깊은 잠에 취해 있을 때에 정탐꾼 몇 명과 함께 숨어들어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져갔습니다. 아비새라는 부하 하나가 사울을 죽이자고 제안했으나 다윗은 거부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삼상 26:11)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종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장로님도, 권사님도, 집사님도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종들입니다. 목사님만이 아닙니다. 다 기름 받았습니다. 성령의 기름을 받아 선택된 종들입니다. 누가 누구를 친단 말입니까?

사울 왕의 진영을 탈출한 다윗은 언덕에 올라서서 사울을 지키고 있던 아브넬 장군과 그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너희 진영에 숨어들어가 사울왕의 머리 곁에 있던 창과 물병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다윗은 창과 물병을 병사들을 편에 사울 왕에게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 하지 아니 하였음이니이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삼상 26:23-24)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 하지 아니 하였음이니이다" 왜요?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다윗을 축복합니다. 진심어린 축복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 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 가니라”(삼상 26:25)
내가 비판 할 수 있고 정죄 할 수도 있지만 안합니다. 그러니까 복을 받습니다. 그 복대로 되는 것입니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 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 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어디서 이런 얘기를 듣습니까? 용서하니 이런 말을 듣는 것입니다. 용서는 돈이 없어도. 지식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쫒겨 갈 때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저주를 합니다. 죽이려고 했으나 용서하기를 ‘아들도.. 나를 버리는데...’ 돌아올 때 시므이가 엎드리니... 아비새가 죽이려 합니다. ‘놔 둬라 이렇게 좋은 날 피 흘리기 싫다.’ 하며 용서를 합니다.

다윗은 용서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욕을 당해도 축복한다”고 했습니다(고전 4:12). 우리가 그런 신앙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면 곧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주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의 허물을 봤을 때, 들었을 때는 일단 침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침묵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축복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용서의 첫째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는 여러분에게 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2. 아름다운 용서는 믿음입니다.

믿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믿지 못하고 안달하고 한숨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먹고살기가 힘들어 가짜 승려로 변장을 하고 집집마다 가게를 돌며 시주를 하고 있습니다. 승복도 사 입고 목탁도 구입을 했는데 문제는 시주할 때 외우는 주문이었습니다. 궁리 끝에 외울 주문도 만들었습니다.

어느 집 문간에서 목탁을 치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
주인 여자가 시주를 주기 위해 나와 보니 행색이며 외우는 주문이 가짜였습니다. 그래서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맞장구를 치며 말했습니다.
“주나바라 주나바라” 내가 줄줄 아냐? 주나바라! 안 준다는 것입니다.
주인 여자의 태도를 눈치 챈 가짜 승려가 대꾸합니다. “가나바라 가나바라”
가나바라... 줄 때까지 가나바라..입니다.

믿음이란?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안주어도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어 주는 것입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압니다. 그래도 기다리며....믿어주는 것입니다.

10,11절을 같이 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으신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에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죄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어 주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성서학자들은 이 여자의 간음죄는 상습적이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죄를 잊으시고 여인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믿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 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우리 외모뿐 아니라 우리 마음까지도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일일이 기억하시고 비판하신다면 이 세상에 살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죄를 도말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밤에 잠을 청했을 때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잠을 자는 상태는 정신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생명주시고 기회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만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도 새로운 날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람을 믿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8:15에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일대일 권고, 두세 사람의 권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 공동체의 권고... 7번 용서인가 물으니....예수님께서 “몇 번이나 용서해야 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을 받으시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화가 나도 참으시고 그 다음에는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화가 나더라도 '하나님께서 복주시면 다 될꺼야' '하나님께서 분명한 계획이 있으실꺼야. 내가 믿자. 기도하자'라는 생각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니 성자 어거스틴이 되잖아요.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공동체의 우리도 중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신 것처럼 여러분도 남을 살리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어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용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형제간에 원한이 많기로는 요셉을 능가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구덩이 속에 생매장 될 뻔 했습니다. 다행히 유다의 아량(?)으로 죽는 것만은 면한 채 아랍상인에게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의 노예로 있던 그는 엉뚱한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순전히 다른 형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하지만 형제들에 대한 생각은 잊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었습니까?
요셉은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을 합니다. 결혼할 때 요셉의 나이 서른 살 입니다. 요셉은 아스낫과 사이에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첫째가 므낫세요, 둘째가 에브라임입니다.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자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창세기 41:45-

그런데 그 아들들의 이름을 보세요. 첫째 “므낫세”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입니다. 그리고 둘째 “에브라임”의 의미는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 므낫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하고 둘째 에브라임을 부르면서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하면서 형제들을 용서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우리처럼... 매일 같이 순간순간... 큐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시는 일을 큐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을 만나니... 반갑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성격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그렇게 용서하고 있습니다. 용서는 결심이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용서하는 자가 용서의 복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6:12에서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그 중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는 자의 편에 늘 계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로마 군인들을 바라보며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지 못 함이니이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편에 서 계셔서 죽음의 무덤에서 예수님을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시각장애우 페니 크로스비(Fanny Jane Croshy)여사는 1820년에 태어나서 1915년, 향년 95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애를 가지고도 장수한 것이지요. 이 여인은 살아생전에 수천편의 찬송시를 썼는데 그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문장들 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시를 ... 그것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기쁨과 감사의 시를 썼을까요? 시각장애우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원망도 슬픔도 없이... 어떻게...?

크로스비는 원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크로스비는 여덟 살 때 안과의사의 실수로 두 눈의 시력을 잃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내가?... 의사를,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크로스비는 서른일곱 살 때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안과의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가 그녀의 인생에서 그 많은 찬송시를 지을 수 있는 이유를 알게 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시에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안보이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만일 나도 남들처럼 볼 수 있었다면 이토록 좋은 시상이 샘솟듯 솟아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용서의 글입니다. 자기 눈을 멀게 한 안과 의사를 용서하는 크로스비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빛을 열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보다 더 왕성하게 시를 쓸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통해서 세상의 문이 닿혀 질수 있지만 그러나 용서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세상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을 미등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 갈수 있습니다 .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서보다는 소송을 제기해서 보상도 받으려 할 것이고 평생 원한을 씻지 못하고 저주를 거듭했을 것입니다. 크로스비는 평생 8000편 이상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22곡이나 실려 있어 가장 많은 곡을 싣고 있습니다.

337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말 들으사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자비하신 보좌앞에 꿇어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하니 믿음주소서.
321장 "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멀리가나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고달파 지친 자 쉬라 시네 쉬라시네
무거운 짐진 자 다 나오라 쉬게 해 주시리라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침묵은 아름다운 용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믿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이긴들 뭐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을 다 져도 하나님만이 내편이 되어 주시면, 하나님만이 도와주시면 승리 할 줄로 믿습니다. 용서하십시다!!

용서해야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용서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요새 사람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무섭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비판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비판하면 대개 어둠이 계속되지만 용서하면 곧 새로운 축복의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오창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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