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큰 빛 (마 4:12-17)

  • 잡초 잡초
  • 143
  • 0

첨부 1


지난주까지 3주에 걸쳐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왔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갈릴리 지역은 분봉왕 헤롯이 다스렸습니다. 그는 매우 음란해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이는 매우 부도덕한 일이었지만, 왕의 권세가 무서워 모두들 쉬쉬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요한은 헤롯의 죄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그를 괘씸하게 여겨 체포해서 옥에 가두었습니다(12a; 14:3-4).

세례 요한의 입장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하나님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헌신했는데,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많이 낙심 되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시대의 양심이며 희망의 등불이었던 지도자를 잃어버려 착잡했을 것입니다. 따를만한 지도자가 없어졌다는 것은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섭리 편에서 보면, 메시야의 선구자인 요한은 이제 퇴장 하고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등장해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아무리 요한이 충성된 인물이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그가 부각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투옥과 함께, 수많은 무리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요한이 증거 했던 예수님께로 쏠렸습니다. 만약 이때 예수님께서 헤롯의 죄를 다시 지적했다면, 단번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단시간 내에 무리들의 지도자로 급부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12b).

예수님은 왜 물러가셨을까요? 왜 사람들의 기대를 외면하고 절호의 기회를 흘려버렸을까요? 당시는 요한의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 때문에, 헤롯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들도 대단히 민감해져 있던 때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무리들이 밀집한 그곳에서 사역을 지속하신다면 너무 이른 시기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시겠지만, 아직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너무 일찍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을 자극하면 자칫 하나님의 뜻을 망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물러나셨습니다.

순수한 열정만 있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입니다. 4차 십자군 전쟁 후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무력 대신 사랑으로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순수한 열정으로 결성된 것이 ‘소년 십자군’입니다(1212). 12살의 프랑스 양치기 소년 스테판(Stephen)과 10살의 독일 소년 니콜라스(Nicolas)가 각각 3만 명과 2만 명의 어린이들을 모아 출전했으나 대부분 도중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열정은 누구보다 순수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못했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순수한 열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할 때인가?’를 잘 분별하는 일입니다. “지금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단지 좋은 일 혹은 옳은 일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덤벼들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서를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 3:1)라고 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더 일하고 싶은데, 세례 요한처럼 무대에서 사라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셔서, 때로는 조용히 물러나셨고, 때로는 강하게 도전하셨습니다.

때를 분별한다는 것, 지금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고 고민합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성경은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고 했습니다. 또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뜻을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고 있노라면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분별력을 얻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갈릴리로 물러나신 후에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신 후에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13; 눅 4:14-31).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 때문인 것 같이 보입니다. 적어도 1차적인 원인은 고향 사람들이 배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14)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루려고 일부러 배척받을 행동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고향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배척을 당하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생각하시면서 가버나움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예언하셨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하신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저마다 100% 자신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말씀을 이루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을 사용하셔서 100% 당신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진행됩니다. 개인의 삶도 역시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진행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배척을 당하고, 때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신뢰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자신에게 발생한 모든 일들 속에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 잘 설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계속 일이 꼬이면 답답해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분명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말씀의 내용이 15-16절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구절에 언급된 지역들은 이스라엘의 어떤 지역보다 더 많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태풍이나 지진이 지나간 도시가 황폐한 것처럼, 침략자들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모습은 황폐하기 짝이 없습니다. 기근과 질병과 가난 등의 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심각한 정신적 손상과 후유증을 앓게 됩니다. 그래서 그 땅의 백성은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백성이라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는 흑암에 앉은 그들이 큰 빛을 볼 것을 미리 보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예수님께서 그 지역에 속한 가버나움에 오심으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장 어둡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본격적으로 복음 역사를 시작 하셔서 흑암 중에 앉은 자들을 빛으로, 사망의 그늘에 있는 자들을 생명으로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편 18:27-29). 우리 개인의 신앙 체험을 보아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희희낙락하며 즐거울 때보다는, 곤고함 중에 있을 때에 찾아오셨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마음이 낙심되고, 두려움과 상함과 애통함 속에 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의지하던 다른 모든 것 대신 오직 그분만을 의뢰하게 하심으로 다시금 담대하게 적진에 뛰어들며 높은 장애물을 뛰어 넘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흑암과 같은 삶이 장밋빛 인생으로, 사망의 그늘진 삶이 생명이 약동하는 삶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흑암에 빛이 임하게 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이라 불렸던 지경을 돌아다니면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흑암에 큰 빛이 비친다는 것을, 세상의 성공과 성취로 연관해서 생각할 수 없게끔 합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그늘진 그 땅에 있는 백성들이 좀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도록 힘 쏟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빵문제 해결이나, 환경조건 개선보다 훨씬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는 일, 곧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 분의 통치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시편 107:10-11절에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생기면 마음이 미련하여지고 생각이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놓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며 살게 합니다. ‘정도’를 걷기보다 약삭빠르게 살려고 꾀를 내고, 하찮은 일에 얽매여 중요한 일을 망칩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이 심해지면 돈 몇 푼 때문에 형제간에 싸우며, 부모와 자식을 죽이는 어리석은 짓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데서 생겨난 부산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언제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그 분의 온전한 통치를 받으며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하셨으나, 그 땅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섬김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개치 않았고, 준엄한 심판의 경고를 받습니다(마 11:21). 큰 빛이 임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잘 감당하지 못한다면 더 큰 어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동안 참으로 하나님 백성다운 인식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