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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 6: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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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건을 살 때 꼼꼼히 따집니다. 무엇을 해도 따집니다. 아마 누가 어디 함께 가자고 하면 따질 겁니다. 왜 가야하는지? 가면 뭐가 있는지?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런데 정작 떠져야 할 내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언제 꼼꼼히 “나는 누구인가?”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언제 꼼꼼히 “나는 왜 사는 가?”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어느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출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구출 당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어느 역사가는 “세계 역사는 ‘도전과 응전’으로 추진되고 발전되어 간다.”고 말했습니다. 걸려오는 싸움과 그 싸움에 대한 대응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내게 다가오는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이 역사를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선거철 되면 소위 “헤쳐모여”가 시작된다. 어떤 줄에 서야 되는가 하는 계산이 활발합니다. 왜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는지, 국회의원이 뭔지에 대한 물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대통령이 뭔지에 대한 물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되는 대로 살다보니, 어느 날 권력을 갖게 되었고, 돈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기왕이면” “한번 해 보자”는 식으로 출마하는 것 같습니다. 도전과 응전도 없고,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응답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역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그 삶은 또한 어떻게 되겠습니까?
위대한 인물들. 그들에게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냐?” “무엇 때문에” “왜 사느냐”하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대답의 삶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묻는 질문, “넌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세상에 그런 물음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에게 있어서 아빠나 엄마는 똑 같습니다. 똑 같이 좋은 겁니다. 아빠니까, 엄마니까 좋은 겁니다.
그런데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하는 물음에는, 아빠, 엄마 중 누가 너에게 더 잘해 주느냐는 물음이 들었고, 그것은 결국 아이로 하여금 잘해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심성을 키우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도 순진한 아이는 엄마 아빠 비교해서 잘해주는 쪽을 생각해내곤 아빠나 엄마라고 대답합니다. 약삭빠른 아이는 엄마 앞에서는 엄마, 아빠 앞에서는 아빠, 또는 엄마 아빠 둘 다 좋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야 손해 보지 않으니까요.
인생에 대한 질문 중,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하는 게 있습니다. 먹는 것과 사는 것을 결부된 질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먹는 것과 사는 것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먹는 것이 그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진수성찬 잘 먹었다고 잘 살았고, 못 먹었다고 못 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권력을 쥔 그래서 잘 먹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가지려다가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반면에 평생 김밥 장사하며 힘들게 살아온 한 할머니가 그의 전 재산을 어느 대학의 장학기금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이 둘 중 누가 더 잘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느냐?”고 스스로 물었고, 한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보람 있고 제대로 된 삶을 살수 있을까?”를 물었던 겁니다.
마치 3더하기 3은 뭐냐 하는 질문과 3곱하기 3은 무어냐 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똑같이 3이라는 숫자가 두 개 들어갔지만 그 대답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요 약속입니다. 그 책에는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대답 이전에 먼저 물음을 제공합니다.
죄를 범한 아담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아, 너는 누구냐?” 하는 물음입니다.
사람.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순종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내가 누군가?”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죄인.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인 자기를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그때서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수 있다는 대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에 향한 하나님의 질문은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 질문에 대해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잡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형제요, 이웃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잡니까?” 하고 되묻는 가인은, 그 형제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의무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누구냐?” “네 이웃은 어디 있느냐?” 인간은 그 물음에 응답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어느 날,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건너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이 수없이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빌립더러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고,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안드레가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안드레는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하며 그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하신 뒤, 떡과 고기를 가져다가 축사 하시고 나누어 주었는데 모두들 배부르게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담을 만큼 남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표적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셨던 예수님은 다음 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곤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썩는 양식만으로 사는 것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 양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고 살았듯이…….
그런데 그 만나는 단순한 먹을거리라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나는 곧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얻을 수 있었던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다른 복음서 남자만 5천명)을 먹인 것은,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것입니다.
먹을거리, 그것이 사람을 살리게 합니다. 먹어야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을거리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삶을 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살도록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만나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떡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듯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먹어야 영원히 살수 있는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51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물음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반복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응답하는 존재이지 하나님 앞에서 되묻은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질문이기 보다, 죄인 된 자신에 대한 고백과 그럼에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 이후 사람들의 물음, “형제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이 물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음입니다. 죄를 지은 아담을 향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와 같은 질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물음 곧 “너희들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물음은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해야 할 궁극적인 물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물음에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되묻습니다. “살을 먹어? 그 사람이 자기 살을 떼어 우리에게 먹으라고 준단 말인가? 또, 준다한들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사람 고기를 먹는다 말인가?” 이게 사람들의 물음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를 찾은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의 물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결론은 “이 말씀은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운 것 아닙니다. 어려운 것은 자신들이 한 질문이 어려운 것입니다.
생명의 떡인 예수님은 그 살과 피를 우리 위해 아낌없이 흘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어려워요? 전혀 안 어렵습니다. 그것은 믿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지금도 어렵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십자가 달려죽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죽음이 나를 구원한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 그러니 어렵습니다.
대부분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물음 때문에 어렵게 하는 겁니다.
목회도 어려운 목회는 “어떻게 하면 내가 교회를 부흥 시킬까?” 하는 것이고, 쉬운 목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는 도구로 순종할 뿐” 이라는 생각으로 하면 되는 겁니다.
십일조 역시, “내 생활도 어려운데 어떻게 해?” 그러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린다. 또 당연히 드려야하는데 보상으로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는 믿음으로 드리면 쉬운 겁니다.
“어렵다!” 그것이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게 한 것입니다.
5병2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의 “나는 하늘로부터 온 생명이 떡이다.”라는 말씀을 믿으면 됩니다. 어떻든 이제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과 고기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이제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우리 모두를 먹이시고도 열두 바구니 남기셨어.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줄 수 있어.” 그렇게 믿으면 계속 떡을 그리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질문하고, 그 질문이 어려워 그들은 모두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의 먹을거리만 해결되면 됩니다. 육신의 안일만이 과장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 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강조하셨습니다. “육신만을 죽이는 것 뿐 아니라, 영혼까지 죽이시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영혼의 문제가 사람에게는 어렵습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네가 율법을 지켰느냐?” 물으셨고, “네, 제가 다 지켰습니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면 한 가지 부족한 것 있는데,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부자 청년으로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습니다. 그 부자 청년이 찾는 영생은 육신의 영생입니다. 먹고, 입고, 권력을 가지고, 평안하게 영원히 사는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육신으로 사는 영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영으로 사는 영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이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스스로 물었을 것입니다. “이것 다 내 놓고, 이 가난한 사람 따라 다니며 영원히 산다면 그게 뭔가?” 그것이 예수님을 따라가기에 어렵게 했고,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한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요구하는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신 물음에 합당한 메시야가 아니라 내가 묻는 물음에 합당한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이 옛날 그 좋은 때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묻는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오히려 걸림돌이고 죽어야할 존재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과 헌신은 정말 큰일 날 소리입니다. 따라서 그런 예수님은 없어져야만 할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질문, “너희가 누구냐? 너희가 죄인 아니냐?” 그래서 보내 주신 메시아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죄인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표적 찾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이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고전 1:22-25)고 하셨습니다.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의 지혜로 묻거나 인간이 지혜로 답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셨고 하나님께서 그 물음에 이미 답하셨습니다. 그것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그럴까요?” 하고 묻고선, 그래서 예수 안 믿거나, 예수 믿었다가도 떠나버리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다 떠났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만 남았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예수님의 물음은 낙심해서, 당신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다 떠나서 그래서 실망하여 힘  없이 묻는 물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발 너희라도 날 따라와 주면 좋겠다.” 그런 의미로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물음 속에는 당신을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와 생명의 길은 외롭고, 고독하고, 험한 길입니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고 존경받기보다 때로는 다 떠나가고 혼자 걸어야 하는 그런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듯이 그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그런 길입니다.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좁고 협착한 길이요, 문입니다. 때로 신앙생활 하는 우리조차도 싫어지고, 귀찮아지는 그런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머뭇거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 힘들 때 있지요? 주춤거릴 때도 있고요? 그럴 때 이 예수님의 물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은 바로 당신이 구원자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시는 물음인 것입니다. “여기 생명이 있다. 그런데 너희도 가겠느냐?” 그런 물음입니다. 넓은 길은 죽음의 길이요, 좁은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이 생명의 길에 서 있는 예수님의 물으심이 “이 좁은 길을 떠나 넓은 길로 가겠느냐? 이 생명 길을 떠나 죽음의 길로 가겠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예수님을 말씀이라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를 믿으면 구원, 믿지 않으면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그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럼 말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 빛, 양의 문, 길이요 진리요 생명, 부활, 생명의 물 등등으로 표현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이 곧 구원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 길을 열어 놓으신 단순한 문지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닦아 놓으신 단순한 부르도자가 아닙니다. 그 분 자신이 곧 구원이요 생명입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사는 게 힘들지요? 신앙생활 하는 것, 더욱 힘들지요? 내가 예수 믿는다고 그래서 나를 떠나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그들과 친해지려고 예수 버리지 마십시오. 남편 구원한다고 교회 안 나오고 놀러 다니는 남편과 놀러 다니는 것은 둘 다 죽음으로 가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구원이요 생명이다“는 확신으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앉은뱅이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 합니다. 그러면 나병이 깨끗해지는 기적을 체험 합니다. 그러면 눈먼 자는 눈 뜨고, 귀머거리는 귀 열리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음이 생명 됩니다. 가난이 부요로 바뀝니다. 슬픔이 기쁜 됩니다. 낙심의 절망이 소망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보세요. 이 이야기는 오병이어, 떡으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역시 생명의 떡, 생명이 음료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 곧 오병이어의 떡을 먹고, 예수님을 따르려 했습니다. 그러다 생명의 떡이요, 음료인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랬습니다. ‘먹을거리’가 아닌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저 먹을거리만 쫓다가 배부르거나, 더 이상 생기는 거 없다고 느껴지면 돌아서는 무리이겠습니까? 아니면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리고선 그 말씀 영생의 말씀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우리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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