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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울며 씨을 뿌린다 (시 1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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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수고 없이 호랑이는 잡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줄기차게 연구하는데 그것은 과학도 아니고 경영도 아니고 그것은 요행일 뿐입니다. 인생을 요행으로 알고 산다면 반드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새상에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목표가 가치 있고 귀할수록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들여야 할 수고와 고통과 희생은 그만큼 더 큽니다. 그런 것은 정말 수고할 만큼 수고하고 힘들만큼 힘들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지난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이었습니다. 그 한 주간을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제목을 찾으며 보냈습니다. 저도 올 한해 제 삶과 목회를 돌아보며 내가 거두어들일 열매는 있는가?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참 생각 끝에 제게 떠오른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는 올해 어디에다 얼마나 땀을 쏟았던가? 나는 간절히 바라는 일 때문에 얼마나 울었던가? 그리고 나 자신을 희생해 본 일이 몇 번이었던가? “

“내 인생에서 무엇을 거둘 것인가?” 라는 질문은 결국 “너는 무엇을 심었고 얼마나 수고와 희생을 하였느냐?:” 는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 더 정직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열매가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을 때라도 내가 무엇을 심고 얼마나 수고하며 가꾸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열매만 찾아 헤매던 저는 결국 “너는 무엇을 심고 어떻게 가꾸었느냐?” 는 그 질문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한 해 동안 제가 피하고 싶었던 것이 수고와 고통과 희생 그런 것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 자신의 능력과 재주와 경험만 믿고 이제는 수고하지 않아도 거둘 수 있는 노하우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래서 남들처럼 수고하고 희생하지 않아도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쉽고 편한 길만 찾아 다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추수 감사주일에 다시 한 번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불변의 법칙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126:5-6)

부끄럽지만 제 삶과 제 목회에 기대했던 열매가 없었던 것은 <수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희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그일 속에 나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게서도 그런 것을 찾는다면 왜 조금이라도 찾을 수 없었겠습니까 마는 저는 정직하게 그만한 것을 수고와 고통과 희생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 년에 한번 한해를 결산해 보라고 주신 추수감사주일 날, 저는 제 인생 전체의 추수감사주일은 언제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가 아니겠습니까? 그 때는 정말 빈손이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제부터라도 눈물과 땀과 피를 부어서 열매로 가득 찬 바구니를 그 날에 하나님께 드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매년 지키는 이 추수감사주일을 통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할 내 인생의 추수감사주일을 잘 준비하는 지혜로운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오늘 읽은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사 찬양 입니다. 포로에서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가는 일, 이보다 더 엄청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일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지막 5.6절에서 울며 씨를 뿌리는 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이지만 그것을 받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울며 기도의 씨를 뿌렸고, 해방을 위해서 자기 몸을 던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은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만 믿고 자기는 아무 수고나 희생 없이 그저 하늘만 쳐다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신 다고 생각하다 보니 요행을 바라는 신앙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을 때는 우리를 동역자로 삼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고통과 희생을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일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되고 의미가 되게 하십니다.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내 비바람 천둥소리가 요란하고 간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그런 다음에 한송이 국화꽃은 피는 것입니다. 국화꽃을 피우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국화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기 위해서는 묵묵히 수고와 고통과 희생의 자기 몫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수고와 고통과 희생을 싫어할까요? 그것이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꾼들을 속이고 유혹합니다. 수고하지 않아도 열매가 있고, 희생 없이도 능력이 나타나고, 십자가 없이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이 있고 그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오늘 사탄의 이런 생각은 무엇이든 쉽고 편안한 길만 찾아가려는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유혹은 유혹일 뿐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진정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사탄이 넣어주는 그 헛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육체의 안일, 편안, 쾌락을 추구하는 이 세대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고 사신 그 길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경륜이며 지혜의 총집합입니다. 그 십자가의 법칙은 수고 없는 열매, 희생 없는 능력, 죽음 없는 부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수고와 고통과 희생 이런 것들이 해롭고 불편하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피하고 감당하지 않으려 합니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수고, 희생, 고통, 십자가 소리에는 귀를 막고 싶습니다. 그러나 영광, 기쁨, 축복, 평안이라는 말에는 귀가 번쩍 뜨여 집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수고와 고통과 희생 없이 살 수는 없을까요?

세상은 악하고 우리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고통의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늘 고통은 우리 겉에 있습니다. 고통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죄와 질병으로 인한 고통,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오는 실존적 고통, 그리고 변화를 위한 창조적 고통이 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을 피할 수 없고 고통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죄로 인해 늘 고통당하시겠습니까? 한번 그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쇠하지 않고 썩지 않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통당하시겠습니까? 이래도 고통 저래도 고통이라면 무엇 때문에 죄로 고통당하고, 썩을 것, 가치 없는 것을 위해 고통을 지불하겠습니까?

여러분 누구처럼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누구처럼만 살면 후회 없이 그리고 가장 보람 있게 살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이 세상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면, 십자가가 그 해답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 뿌리가 한 마디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만히 앉아서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셨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통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고통이 들어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수고와 고통과 희생을 댓가로 지불하셨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일하셨다면 일꾼 된 우리도 그대로 따라 가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면 수고해야 하고 고통과 희생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 고통, 희생,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것 없이 일 하려고 했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추수의 날에 왜 빈손으로 서 있습니까? 하나님이 잘못입니까? 운이 없어서입니까?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심지 않았고 가꾸는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울며 씨를 뿌려야 웃으며 단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보람 있고 가치 있는 모든 일에는 그만한 수고와 고통과 희생이 들어가야 합니다.

지난 주 TV에서 일흔 나이에 글을 배워 구순에 시를 쓰는 할머니가 나오셨는데, 이분이 뿌리가 끊긴 난초를 화분에 심고 몇 달을 양분을 주고 아침저녁으로 공을 들였더니 거기에서 뿌리가 내리고 꽃이 피더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설마? 하는 의심도 갔지만, 그보다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이면. 뿌리가 없는 식물에도 사람의 정성과 공이 들어가니 뿌리가 내리고 꽃이 필까?” 그러면서 내가 맡은 하나님의 일에 그렇게 한번 공을 들여보면 어떤 열매가 거두어 질까?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올 한해 무슨 일을 맡으셨습니까? 그 일에 얼마나 수고와 공을 들이셨습니까? 뿌리가 잘린 식물도 사람의 정성과 공이 들어가니 꽃이 핀다는데 여러분의 사역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시들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어가던 사역도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식대로 살아야지 요행을 바라서는 안됩니다. 수고가 있어야 열매를 거두고, 헌신이 있어야 능력이 나타나고, 땀이 있어야 보람이 있는 것이지, 심지 않은데서 거두려 하고, 죽지 않고 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두 번째 나의 약한데서 하나님의 능력은 온전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생 피할 수 없는 고통을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고통은 피하고 없애야 할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수치가 아닙니다.

고후 12: 7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몸에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사역을 망치고 있고 사도로서 자신의 인격에 흠집처럼 생각되어 이것을 없애 달라고 3번이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 놀라운 비밀이 들어있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바울아, 네가 약할 때 내가 온전히 역사할 수 있었다. 네가 부끄러워서 제거하고 싶어 하는 그 고통, 그 약점이 너를 지금의 위대한 사도로 만들어 가고 있다. 너의 깨어짐에서 나의 향기가 나오고 너의 약함에서 내 역사가 온전히 이루어진다.

바울은 그 사실을 깨닫고 피하고 싶고 없애고 싶었던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말이 둔합니다. 여러분, 나는 다른 사도들처럼 풍채가 좋지 못합니다. 나는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병이 있습니다. 나는 성격적으로 사도를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하고 있고, 성취한 일들은 나 바울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신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서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무르게 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내 약함을 감추지 말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걸음 나아가 바울처럼 기뻐하며 자랑하는 경지에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약할 때 나를 의지하지 못합니다. 욕심을 내려놓게 됩니다. 약할 때 내가 한계를 지닌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더 이상 나를 주장하지 않게 됩니다. 약할 때 비로소 자기부인이 됩니다. 약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엎드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를 갈망합니다. 약할 때 우리는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내가 받는 고통, 나의 연약함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면 이보다 더한 육체의 가시도 사랑하리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인데 내게 질병이 있으면 어떻고, 가난하면 어떻고 남들이 없는 핸디캡을 가진들 무슨 상관이랴, 그보다 더 부끄럽고 더 치명적인 약점도 내가 사랑하리라. 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니까. 바울은 그 때부터 자기 약함에 만족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사람을 박약하게 만드는 종교입니까? 그렇게 보는 것은 세상일을 하는 식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내 힘과 의지로 해야 하기 때문에 강하고 완전하게 보이는 사람이 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식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내 지혜로 알수 없고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에게 그 비밀을 가르켜 주셨습니다. 내 능력이 네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약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항상 상한 심령, 깨어진 심령으로 일해야 합니다. 깨어진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며 상한 심령 속에 성령님이 거 하십니다. 언제나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지는 순간은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그 때입니다.

여러분, 세상 앞에서는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해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상한 마음으로 서시기 바랍니다. 세상 앞에서는 당당히 의인으로 서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숨을 수 없는 죄인으로 서시기 바랍니다.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자식들은 다 도시로 나가고 고향에 계신 부모는 못난 자식이 모시고 삽니다. 늙으신 부모 겉에는 늘 못난 자식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겉을 떠나지 않고 같이 사는 자식은 자신을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살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똑똑하고 잘난 자식들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를 떠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종이 상전의 얼굴을 바라보듯이, 여종이 주모의 손을 기다림같이 늘 하나님 겉을 맴도는 못난 자식들이 되어 영원히 아버지 집에 거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울은 그토록 위대한 사도였지만 평생을 수고와 고통과 희생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실존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스스로 만든 창조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고통을 지불해야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다는 천국의 비밀을 바울은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지 않는다고 십자가를 안진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그 수고와 고통과 희생 때문에 그리스도인격을 닮게 되고 인생의 추수 때에 아름다운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고통하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앉아 고통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바울처럼 적극적으로 고통을 만들어 오히려 세상 고통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맡기 신 일에는 나의 눈물과 땀과 피가 들어가야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존적 불안과 자신의 한계로 인해 연약함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스런 밤을 지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능력이 바닥이 났을 때,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붙잡게 될 때 그 때가 하나님이 일하시기 가장 좋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통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상하고 깨어진 심령이 되어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은 나쁜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우리에게는 오히려 약입니다. 성경은 육체의 고난이 성도가 입을 갑옷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 4:1)

고통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죄를 그치게 만듭니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겉으로 부르십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맛봅니다. 고통을 통해 일꾼의 진정성이 검증됩니다. 얼마나 참고 견디는지를 보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우리의 한없는 교만을 꺾어 줍니다. 고통은 진흙 같은 나를 하나님의 그릇으로 빚어 갑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성도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동반자입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거둘 열매는 이 세상에서 내가 흘린 눈물과 땀, 수고와 고통과 희생의 양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은 고통과 함께 일합니다. - 끝 -  (권영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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