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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빌 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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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1-13절)

1. 세상을 살다보면 한계점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결할 수 없는 벽 앞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말에 이런 경우를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나가거나 물러설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힐 때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철학에서 이러한 상황을 ‘한계상황’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한계상황’에서 두 가지 현상으로 반응합니다.
이럴 때 대부분 절망하여 드러눕게 됩니다.
심하면 목숨까지 버리는 자살행위로 생을 마감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 절망의 벽을 뛰어 넘는 ‘비약’이 있습니다.
신앙은 바로 절망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한계상황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이러한 경험을 한 분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역대 유다 왕들 가운데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굳건히 세운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 그토록 정직하게 행하면서 한창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시점에 그에게 뜻 밖의 병이 생겼습니다.
열왕기하 20:1-3 절에 있는 말씀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왕도 죽음의 벽 앞에 설 때 하늘이 노랗게 보였을 것입니다.
요즘도 <암>이라고 선고 될 때 누구나 이런 기분일 것입니다.
자, 이럴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겠습니까?
왕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왕들 중에 히스기야 왕처럼 선한 왕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여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고, 정치개혁을 통하여 많은 산적한 일을
처리해 나가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병이란 죽음의 벽 앞에 설 때 인간적인 한계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2절에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절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고...
히스기야 왕의 이 애절한 호소를 한번쯤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내가 정직하게 노력한 것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선조들의 범한 우상 숭배를 척결하고 개혁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려고 지금까지 힘써온 것을 아시지 아니합니까?’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합니다’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여기 얼굴을 벽을 향하였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5-6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네 날에 15년을 더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눈물 없는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여호와 앞에 정직하게 행한 사람들의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눈물의 기도는 필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호수아도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도 진퇴양난의 벽 앞에서 울부짖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젊은 후계자로서 요단을 건너 첫 성인 여리고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락시키고 승승장구의 기분으로 다음 성인 아이성을 치러 올라갔었습니다. 여리고 성에 비하면 아이성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적은 수의 군대를 이끌고 쉽게 점령할 줄 알고 올라갔다가 그야말로 참패를 당했습니다.

여호수아 7장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7:6-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 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 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라고 절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참패를 당했습니까?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거역하고 바친 물건 중에 도적질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간>이란 자가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의 금덩이를 탐내어 숨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한계상황의 벽은 두 가지 경로로 올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는 히스기야왕 처럼 정직히 행하는 중에도 올 수 있고, 여호수아의 경우에서처럼 가정과 식구들 중에 하나님의 언약을 져버리고,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도적질 해 갈 때 그럴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2. 그러면 우리가 이런 벽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의 해답은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찾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기억하고 그대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그도 여러번 한계상황에 처했었습니다.
여러번 죽을 고비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14일 동안 바다 한 가운데서 먹지도 못한 채 방치된 상태에서 살 소망은 전혀 없이 포기 상태에서 있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때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당하는 어떤 환경에서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가난 중에서도, 부한 자리에서도, 배고픔과 배부름의 일체의 비결을 바울은 이제 배웠다고 하면서, 나는 이제 어떤 환경에서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그 말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풀이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무능하지만, 내 안에 능력으로 역사하는 그 분,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넉넉히 이길 수 있다
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확고부동한 신앙이 어디에서부터 기인된 것인가? ‘내게 능력 주시는 그 분 안에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질 그릇 같이 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3.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의 모든 분야를 보면 벽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스바냐 선지자 시대와 같은 것이 오늘의 우리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합니다.
히스기야왕이 15년을 더 살면서 그야말로 나라의 기초를 더욱 튼튼하게 다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어서는 그 아버지와는 정 반대이었습니다. 곳곳마다 우상을 세우고, 의로운 사람을 박해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려 50년간 왕위에 있었으니, 나라꼴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언했던 선지자들이 하박국, 호세아, 미가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이 외쳤던 메시지는 미가서에서 잘 요약되었습니다.

미가서 6: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고 하였습니다.
여기 정의란 사회정의를 말합니다.
공직자들이 사회정의를 행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며,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6:6-7절을 보면, 하나님 앞에 행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하면서, 번제도 아니고, 천천의 수양도, 만만의 기름도, 내 몸의 열매인 아들을 바칠까? 그런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구하는 것은 위에 지적한 대로 <사회정의>와 <사람 사랑> <경건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시대의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을 보면, <여호와의 날>에 <남은 자>가 있겠고, <전능자가 저회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남겨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스바냐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워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때 이런 예언을 하게 하였습니다.

시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동일합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교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와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비록 강대국들 틈새에 끼어 있지만, 열국 앞에 높이 세움을 받을 수 있는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단 공의를 행하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크리스천들이 될 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여호와의 날이 기쁨과 환희와 축복의 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김이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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