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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행 19: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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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인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인가 한 가지는 이루어야지 하면서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달려가다가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하고헉헉거리다가 길가 벤치에 앉아조용히 응급실로 실려 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달려갈 푯대가 있는 삶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달려가는 삶을 살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중심은 에베소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성령세례를 베풀어 교인들의 눈을 뜨게 했고
두란노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말씀이 세력을 얻어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에베소의 고린도 풍조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영적 부흥이 일어나면 또 다른 비전이 생깁니다.
그 비전은 바로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 대한 비전인 것입니다.

21절에 보니 이 일이 다 된 후 즉 즉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마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고
거기서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겠다고 계획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마음에 계획하고 있는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말 속에는 어떤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1) 말씀이 세력을 얻게 되니 세상 풍조를
영적 분위기로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면서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는 환상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 환상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로마를 보고 싶다 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렇게 눈을 뜨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면 말씀이 세력을 얻어
우리 마음에 환상을 보게 합니다.
은혜 받은 성도의 특징은 바로 환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꿈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이렇게 로마를 보아야 겠다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 보게 된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이것은 로마가 당시 세계의 중심이기에
바울이 나도 이제 어느 정도 큰 종이 되었기 때문에
대도시인 로마에 나아가 위대한 목회를 해야 되겠다는
자신의 인생계획이 아닌 것입니다.
행1:8절 말씀같이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바울에게는 분명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가지고 땅 끝까지 전하겠다는 환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를 보아야 겠다는 생각은 바로 로마를 거쳐
당시 땅 끝이라고 생각했던 서바나 까지 가기를 원하는 비전인 것입니다.
롬15:22-24절에서
[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는 이제 사역을 다 했기 때문에
땅 끝까지 서바나로 가기를 원하는데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려 너희와 교제하기를 원하며
가능하다면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가 후원해 주기를 바란다 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로마가 목적이 아니라
로마를 거쳐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환상을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서울을 거쳐 세계 곳곳에 복음 들고 나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꼭 마음에 새겨야할 것이 있습니다.
3) 말씀이 세력을 얻어 우리에게 환상이 생길 때
이 환상이 나의 희망사항인가 하나님의 아이디어 인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 는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를 보아야 겠다는 환상을 가진 이후
계속 로마의 비전을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행23:11절에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이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말은
그날 밤에 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날 밤이 참 많았습니다.
아시아로 향하던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옮겨놓을 때도
행16:9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지시를 한 것입니다.
그날 밤 - 주님께서 나타나신 밤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밤입니다.
그날 밤에 바울 곁에 주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 걱정하지 마라, 담대하라,
지금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지마는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호를 타고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중
유라굴라 라는 태풍을 만나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을 때
행27:23절 이하에
[ 나의 속한 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는 밤이 있는 성도는
그 환상이 점점 더 분명해 질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는 환상을 보고 비전을 가진 자들이 참 많습니다.
개발과정 401반 과정 속에서
각 각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 해 보라고 하면
[ 앞으로 양로원을 설립하여 노인복지사업을 하겠다 ]
[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위하여 살겠다 ]
[ 우리 기업을 통해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세울 것이다 ]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희망사항인지 하나님이 주신 환상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바로 답은 [ 그날 밤 ]입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내 곁에 계서 말씀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
성도 여러분 - 내게도 그날 밤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의 그날 밤- 바로 금요 기도회가 되시기를 추천합니다.
그래서 나의 희망사항을 넘어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되고
더 분명한 환상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항상 환상과 현실은 다릅니다.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환상을 가졌지마는
현실은 그렇게 희망적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가진 바울에게 현실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습니까?

23절 이하에 보니
[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 합니다.
이건 분명히 장밋빛 환상이 아닙니다 - 도리어 더 어두운 현실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비전과 현실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빌립보에서도 그러했고 데살로니가에서도 그러했고
베뢰아에서도 아덴에서도 고린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좋다 말았네 하지 마시고
그래도 현실을 넘어 환상을 바라보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개척교회 시절 처음 교회당을 건축하고 부채를 졌는데
어디 하소연 할 때가 있습니까?
그래서 노회에 보조 요청을 하고는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할 때 까지 - 라는 목표를 정하고 금식기도를 하는데
열흘째 되는 말 - 바로 그날 밤입니다.
내 입에서 [ 흘러 들어오는 물보다 솟아나는 물이 안 난야? ]
그래서 응답 받았다고 봇 따리 싸서 교회로 내려왔는데
솟아날 곳이라곤 아무데도 없어요.
그래서 당장 10만원이 있어야 하는데(땅 한 평 3만원 할 때)
마을금고 기웃 그려보고, 은행도 찾아가봤는데
3일 동안 헤매어도 10만원이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교회 건축현장에 와 보니
당시 집사님 한 분이 [ 전도사님, 무슨 걱정 있습니까? ] 하고 물어요.
그때는 말도 하기 싫어요.
집사가 돼 가지고 전도사는 이렇게 돈 때문에 고생하는 것도 모른다 싶어....
그래서 푸념조로 [ 돈이 10만원이 있어야 지붕을 덮는데 ] 했더니
[ 전도사님, 제게 마을금고에 45만원이 있는데
쓰고 언제든지 넣으면 돼요 ] 해요
그때 제 속에서 성령님이 그래요
[ 야이, 병신아, 내가 솟아난다. 안 캤나, ]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이
3일 동안 돌아다닌다고 고생하지 말고 강단에 엎드려 기도했더라면
빌려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칠건데 ] 그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상과 현실이 다르더라도 그날 밤에 주께서 말씀하시거든
그대로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루스 광야에서 꿈 가운데 하나님 만나서
사닥다리가 하늘 까지 닿았고
그기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광경을 보고는
잠에서 깨어나 광야에 누워있는 자신을 보고
야~! 좋다 말았네 하지 않고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서원 기도했듯이
현실과 다르더라도 꿈을 붙들고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바울의 눈앞에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동이 무엇입니까?

그 소동은 24절 이하에 보니
아데미 신전의 모형을 은으로 만들어 파는 <데메드리오> 라고 하는 은장색이
적지 않은 벌이로 직공들 까지 먹여 살리는데
바울이란 작자 때문에 이제 수입이 끊겨지게 생겼으니
직공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데메드리오>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유족한 생활을 했는데
바울이라는 사람 때문에 에베소 뿐 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하니
그대들이 보고 들은데로, 이제 우리 영업만 천하여 질뿐만이 아니라
아데미의 적각도 경홀히 여기고 위엄도 다 떨어지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데메드리오>의 주동으로 일어난 소동,
저자 누가가 이 사실을 기록한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의 전도에 가로막는 장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말씀을 자세히 묵상해 보면 나타난 사건 속에
이면적 의미가 더 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말씀 사역으로 얻은
말씀의 세력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빛이 들어오니 어두움의 세력들이 자리 잡을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복음을 믿는 우리가 들어가는 곳에 어떤 소동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말씀의 세력 앞에 에베소의 고린도 풍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 분위기로 바뀌니깐
우상의 세력이 맥을 못 추고 반항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2007년을 앞두고
Again 1907년을 슬로건을 내걸고 외치고 있습니다.
Again 1907년이 뭡니까?
바로 1907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 선주 장로를 중심해 일어난
평양 대부흥운동을 말합니다.
그때 평양시가지에 술집이 문을 닫고
주일날 가게 문을 닫아 거리가 조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영적 영향력을 미친 것입니다.
우리 내일교회가 다시 말씀의 세력을 얻어
대구 성시화에 앞장 서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우리 가정에 우리 직장에 먼저
영적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님의 Condoctor 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주변의 사람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는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데메드리오가 선동을 하니 에베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 하면

28절에 [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도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 하며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함께 하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연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바울이 이런 장면을 보고 백성들 가운데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제자들의 권유로 바울은 군중 속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 성이 요란했지마는 32절에 보니
[ 사람들은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

이것이 대중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흥분하여 영웅심을 가지고 세상을 뒤집어 놓을 것 같지만
그 가운데 딱 무슨 핵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 누가가 참 센스 있게 대중들의 허점을 잡은 것입니다.
온 성을 요란스럽게 떠들지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모였는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에베소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지했음을 말해 줍니다.
어찌 에베소 사람뿐이겠습니까?
교회 안에도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지만
왜 모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형교회의 약점이요 허점인 것입니다.

가정마다 매일 부부싸움이 끊일 날이 없는 어느 마을에
아주 모범적인 가정이 이사를 왔습니다.
그러자 마을 전체에는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싸울 때마다 남편들은 하나같이 누구네 집 부인을 보라고 했고,
부인들은 악을 쓸 때마다 그 집 남편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회개를 하고 좋아진 것이 아니라 회의를 열어서 그 부부를 쫓아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 모이는지 모르고 모이는 사람들 수만이 모이고 수백만이 모여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큰 교회는
수 천 명 수 만 명이 모인다고 큰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헌신된 사람들,
열 사람이 모이고 백 사람이 모여도 그 교회가 큰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큰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모인 군중을 선동하여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세운 사람,
두란노 서원의 성령 받은 12사람같이
헌신된 성령의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에베소의 소요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소요가 일어나니깐
유대인들이 혹 자신들이 책임을 뒤집어 쓸까봐
<알렉산더> 라는 사람을 내세워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군중들이 알렉산더가 유대인인 줄 알고는
[ 너도 유대인이면서도 집어 치워라 ] 하고는
크도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 하며 두 시간 동안이나 소란을 피웁니다.
그때 당시 에베소의 행정책임자 격이 서기장이
상당히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 하면서
일단은 에베소 사람들의 자존심을 내 세우며 안돈 시킵니다.
그러니 에베소 시민들은
큰 아데미 신전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치겨 세워준 것입니다.
이렇게 한 마디로 안돈시켜 놓고는
36절 이하에
너희가 경솔히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 한 것도 아니고, 여신을 훼방하지도 않았는데
너희가 잡아 왔으니 이것은 불법이다.
그러니 <데메드리오>와 그 직공들이 송사할 것이 있으면
총독에게 고소할 것이고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민회에서 결단할지니라. 하고는
성난 군중들을 잠재우고 흩어지게 합니다.
그냥 해프닝으로 끝난 것입니다.
해프닝이 뭡니까? 원뜻은 우연한 사건이란 말이지만
해프닝으로 끝났다는 말은
뭔가 충격적이고 큰 사건인 것 같았는데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보고 나아가려고 할 때
가로 막는 일들이 때로는 큰 장애물 같지마는
사실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 자녀들 앞길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때로는 큰 장애물인 것 같고 방해물인 것 같지만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 같으면
고난 속에서도 유익을 안겨다 줄 것이고
사탄의 장난이라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입김을 작용해서 해프닝으로 끝나게 하고야 맙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이 말씀의 세력을 얻게 되니 환상을 갖게 됩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비전입니다.
그러나 비전과 현실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좋다만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디어인 환상은
그날 밤을 통하여 계속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 잊지마시기를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입김으로 삶의 해프닝으로 끝난다는 사실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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