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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초청 (마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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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강동교회는 처음찾아주신 새가족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기도하시면서 몸과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신 성도 여러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초청행사를 하면서 다시한번 저의 가슴 속에 새겨지는 시가 있습니다. 서정주님의 “국화옆에서”라는 시입니다.
그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 시에 보면 한송이 국화꽃이 그냥 피는 것이 아니고 이른 봄부터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가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면서 가슴조리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실제로 우리의 인생에서 꽃한송이조차도 저절로 피는 것같지만 그 배후에는 많은 돌봄의 수고의 손길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이렇게 한 사람 한사람이 주님 앞에 나오기까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와 사랑의 수고와 인내의 기다림이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보다도 하나님께서 오랜 시간 기다리면서 이 시간을 준비하였을 것입니다.이렇게 사람들의 초청으로 이시간 여기까지 왔지만 그 배후에 우리를 초청하시는 근본적인 손길은 바로 우리 주님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시간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1. 어린아이가 될때 주님의 초청을 받습니다.

25절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자기를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고 합니다. 여기 나타내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것은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아무나 만나주기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를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만날 수 잇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자기를 숨기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주님이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만나주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지혜와 슬기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몇해전인가 영국의 시사잡지(이코노미스트)는 세계의 7대 불가사의  목록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1971년 미국 인텔사의 테드호프가 발명한 마이크로 프로세서.
2) 전세계 9천만명의 여성이 사용하고 있는  피임약(1951년  멕시코시티에 있는 신텍사스의 젊은 연구원인 칼제라시가 발명).
3) 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벧이 발명한 전화로 이것은  거대한  세계를 지구촌으로 좁힌 일동공신이라는 것.
4) 한번에 570명을 태울 수 있는 점보 제트기.
5) 해상 석유채굴 시설.
6) 1950년대 미국이 처음으로 실험한 바 있는  수소폭탄,  이것은  지구의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공포의 에너지라는 것.
7) 1969년 7월 20일 오후 10시 18분 미국 우주선인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아폴로 11호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고, 그곳에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이곳에 왔다"는 명판을 남긴 이후 달기지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것 등을 7대  불가사의로 꼽았습니다.

여기 7대 불가사의는 인간이 만든 지식과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그토록 위대한 업적과 유산을 남긴 인간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풀지 못한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주선을 쏘아 올렸지만 여객기 추락을 막지 못하고 있는가하면  생명공학을 발전시킨 인간들이지만 죽음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 주님은 칭찬하지 않고 그것을 높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린아이가 되어야 만나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처럼 겸손하신 분들을 좋아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주님을 만나는데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높아진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높아짐 “교만”을 보고 책망하십니다.
우리나라말로 교만이라는 말을 정의하기보다는 성경의 원어로 보면 교만을 좀더 알 수 있습니다.교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2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가온(ga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부풀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실체나 가진 것은 손톱만한 것인데 그것을 부풀려서 마치 세상 것을 다 알고, 다 가졌고, 다 통달한 것처럼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것이 교만 즉 [가온]인 것입니다.
주드(zud)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그 뜻은 우쭐대다. 거만하다는 것입니다.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풍선처럼 부풀리고 항상 높이 떠오르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한 헬라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투포(tupho)라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 "천천히 타 버리다","꺼져가다"라는 것입니다. 교만은 언젠가는 명성도,성공도, 소유도,인기도 꺼져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잠언16:18“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4:6을 보면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우리는 철저하게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을 멀리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멀리해야 할 교만이 무엇입니까? 내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슬기있다고 생각하는 생각의 교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복잡하게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생각과 지혜를 앞세우면 성경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고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일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한가지예로 어떤 분은 어떻게 예수님이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할 수 잇는가? 어떻게 예수님이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할 수 있는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일 수 있는가? 우리의 생각과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과 생각이 되시기 원합니다.내가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마음을 낮추시고 우리 주님 앞에 나올때 우리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우리 주님이 역사하심을 경험하실줄 믿습니다.

둘째 수고와 무거운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초청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을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수고의 짐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수고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가 노동의 기쁨도 있지만 노동의 수고가 사실은 짐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이 기쁨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수고가 되고 고통이 됩니까?
중세기 어떤 성당건물을 짓는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던 세명의 인부가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세명의 인부에게 똑같이 질문하였습니다. “당신들 뭐하고 계십니까?” “거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첫째 인부가 “돈벌고 있수다”. 둘째인부가 “보면 모르오? 돌깍고 있수다”. 세 번째 인부는 “하나님이 시켜서 하나님의 집을 짓지요”라고 했습니다. 같은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일을 하지만 세사람의 태도는 얼마나 다릅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 수고할 때 마음의 쉼이 없습니다. 일을 위한 일을 하면 쉼이 없습니다.

다음 인간은 무거운 짐을 진자들입니다.
더구나 인생은 무거운 죄와 죄책의 짐에 짓눌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유전되는 모든 죄의 짐은 우리의 모든 생애에 얼마나 삶을 무겁게 하는지 모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많은 분들이 물질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우리 예수님은 돈이 없어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사55: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물질의 문제로 마음에 고통받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 주님께 나올때 우리 주님께 문제를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육체의 고통받는 자들을 초청하십니다.(막3:10)
주님은 질병으로 시달리며 고통받아 한없이  지쳐있는  심령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친히 찾아가 그 모든 고통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질병에 걸릴때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힘이 듭니까? 갈 곳이 없습니다.저는 병원에 갈때마다 느끼는 건데 언제나 병원이 만원입니다. 그 크고 넓은 병원마다 사람들이 가득찹니다. 넓은 주차장마다 차들이 빽빽합니다.아프면 갈곳이 병원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병든 자들도 주님께로 나오시기 원하십니다.주님께서 육체의 고통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두 팔을 벌리고 어린 아들을 향해 어서 오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어머니의 품,그곳엔 안정이 있고 보호가 있고 사랑이 있고 숨결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올때마다 항상 만나고 가야할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어떤 문제 어떤 짐 어떤 형편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을 만나면 쉼을 얻고 평안을 얻게 되는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수록 주님 앞에 나오시기 원합니다. 어려움이 있고 힘이 들수록 주님앞으로 나오시기 원합니다. 주님앞에 수고와 무거운 짐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세째  주님의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초청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초청하시는 이유는 쉼 안식이 없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삶에 쉼이 있습니까?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까? 현대인들의 문제는 마음에 삶에 쉼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가 우리의 쉼을 가로막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평안을 도둑질해갔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어디에도 진정한 쉼과 평안은 없습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쉼과 평안을 찾아서 이곳 강원도로 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고 가는 길에서 더 스트레스 받고 갑니다.

여러분 진정한 인간의 쉼은 바로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오시면 우리 주님이 하늘의 안식 하늘의 평안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요한복음14: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고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오시고 변화되는 분들을 보면서 가장 변화가 바로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마음에 모시고 새롭게 삶을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그래서 얼굴에 평안이 있고 삶에 평안이 있습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에 쉼이 잇고 우리 삶에 안식이 있는 것처럼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쉼 새평안을 어떻게 우리가 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29절을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습니다.그리고 30절에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마음의 쉼을 얻는 길은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무거운 짐에 수고하는 자들을 오라고 하시고는 그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멍에를 짊어지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가 메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멍에가 무엇입니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멍에를 메라는 것은 내 마음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모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당하시고 모든 피를 흘리신 것은 자기의 죄때문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죄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우리의 삶에 마음의 쉼을 얻기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배워할 것이 2가지 있습니다.
먼저 온유입니다. 주님은 한마디로 온유한 사람이셨습니다. 그 마음에 쉼이 있고 평안이 있기에 온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시고 닮은 사람은 그 마음에 쉼이 있습니다. 참평안이 있습니다.
온유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온유를 무력함 내지 무저항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온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유란? 우리 성도가 하나님께 길들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배우며,순복하고,의지하며,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안을 얻습니다. 결국은 삶에 승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저는 땅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지구상에 많은 동물들을 살펴보십시오.온유한 동물이 땅을 차지합니다.
온유한 동물은 오래 삽니다. 성질이 급한 동물들 호랑이 사자 표범같은 동물들은 자꾸 멸절되어 갑니다. 그러나 온유한 양 같은 동물들은 오래 살지 않습니까? 사람들도 보면 온유한 사람은 결국 승리를 합니다. 급하고 혈기가 많으면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제가 종종 놀라는 것은 이것은 배운 사람도 예외가 아니고 여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차를 운전하다보면 경험하는 것이 사람들이 얼마나 거칠고 혈기가 많은지 모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을 기적을 울리고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법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멍에를 메는 것은 바로 온유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에수님의 십자가를 맬때 우리 속에 억울한 일들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손해보아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 온유해야 합니다. 그때 내가 바로 주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쉼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와 함께 주시는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마음의 놀라운 쉼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기 위해서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멍에를 메기 위하여 겸손해지셨습니다.친히 하늘 영광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으로 찾아 오셨습니다.그리고 자신을 가장 처참한 십자가의 죽기까지 내어주셨습니다.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멍에를 메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겸손하시고 또 겸손한 주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히 오래 믿을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많이 배울술고 겸손해야 합니다.직분을 맡을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결국은 마음에 쉼을 얻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결국은 진정한 평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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