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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즐겨 내는 자 (고후 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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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저의 한 친구 목사님께서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어느 집사님께서 그 새로 오시는 목사님에게 첫 당부하는 말씀이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 헌금 설교는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 설교 하지 않아도 우리 교인들은 다 할 만큼 알아서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은 그런 말의 진짜 속뜻을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 '할 만큼 알아서 한다.'는 말은, '해야 할 만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만큼만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아예 부임 첫 주일에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했습니다.
  '십일조 생활은 주일 성수와 더불어 기독신자 신앙생활의 기본 중에 기본이다.'라는 것이 그 요지였습니다.

  이처럼 그래도 교인들이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오해되기 쉽고 또 잘못 인식되고 있는 대표적인 것이 헌금생활입니다.
  아니 실제적으로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들에서 이 헌금이란 것은 마치 무슨 '금기사항(taboo)'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헌금이란 것은 목사가 설교하기를 제일 꺼리는 주제가 되어지고 교회 안에서 어찌하든지 서로 쉬쉬하는 것이 최상책으로 여겨지고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성경은 신자의 헌금생활에 대하여 언급을 회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곳곳에서 가르치며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는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혹은 '듣기 싫어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도 아니요 신자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의 2005회계연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그야말로 '갑절의 장자의 기업'을 주셔서 경상비의 원래 예산을 훨씬 초과하는 풍성한 한 해가 되게 하셨습니다.
  경향의 성도들에게 이런 힘과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함께 감사드리면서, 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헌금생활이 앞으로도 더욱 풍성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기독 신자의 헌금생활의 참 뜻, 본래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헌금은 교회 앞에서는 자랑스러운 봉사입니다.

  본문 1절부터 5절의 말씀에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이란 '성도를 위해 연보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당시 고린도교회를 위시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특별구제헌금을 했던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던 까닭에 물질적으로는 초대 교회들 중에서 가장 약한 형편이었습니다.

  "아가야"란 로마의 행정적 속주의 이름으로서 고린도시가 거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는 말은 일 년 전에 헌금이 완전히 모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때부터 이 헌금 준비를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 헌금의 성격이 매주일에 드린 정기헌금과는 달리 따로 작정하고 드린 일종의 특별헌금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고린도교회를 다른 마게도냐 교인들 앞에서 "자랑"했는데, 이것이 많은 사람을 "격동시켰다" 즉 '분발시켰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교회에서 그 특별구제헌금을 시작한 것이 헬라 지방의 다른 교회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다른 많은 성도들도 함께 참여하도록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이란 말은 바울이 디도와 몇 사람을 먼저 고린도교회에 보낸 것을 말합니다.
  그 목적은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정해 놓고 일 년 전부터 시작한 헌금이 원래 정한 시간 내에 마쳐지지 못하면 다른 마게도냐의 성도들 앞에서 자랑은커녕 오히려 "부끄러움"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성도들이 작정했던 헌금을 약속대로 바치도록 권면하는 것은 사도 바울로서는 그들의 헌금이 "참 연보"가 되도록 만드는 당연한 사도로서의 의무요 책임이었지 결코 "억지"로 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교인들의 헌금을 다른 교회와 성도들 앞에서 "우리의 자랑"이라고 말할 정도로 실로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여기서 '자랑'이란 결코 어떤 사람을 내세우거나 높이기 위한 자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성도들도 영적 자극을 받고 선한 일에 함께 참여하고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아주 선한 자랑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백만장자들이 무슨 자선사업을 위하여 거액의 기부금을 내면 언론을 통하여 금세 전 미국인들에게 알려집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된 사람 중 그 누구도 그런 보도가 무슨 한 개인을 높이기 위한 속 보이는 자랑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보도를 통하여 사람들은 '아, 저 부자가 그래도 저런 좋은 일을 하는구나.'하고 함께 흐뭇해하기도 하며, 또 다른 부자들이 자극을 받아 그들도 기부금을 내게 되기도 합니다.

  신자가 교회 앞에서 헌금생활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헌금 드린 제목들을 위하여 예배 중에 함께 기도하며 다른 교회나 성도들이 보내 준 헌금을 공포하곤 합니다.
  이것은 결코 한 사람을 높이기 위한 자랑이 아니라 여러 성도들이 함께 격려와 힘을 얻게 되는 선한 자랑인 것입니다.

  왜 헌금처럼 아름답고 선한 일을 쉬쉬하고 숨겨야 하겠습니까?
  헌금이 무슨 '검은 돈'입니까?
  헌금이 무슨 뇌물이나 부정한 비자금이나 된다는 말입니까?
  공개적 헌금이 잘못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헌금생활이 어딘가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한 것이 있든지, 아니면 헌금 그 자체가 무슨 이상하고 비정상적이고 나쁜 돈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참 연보'는 조금도 쑥스러울 것도, 거북할 것도, 숨길 필요도 없이, 항상 교회 앞에서 공개적인 '선한 자랑'이 됩니다.
  늘 선한 사업에 열심을 내고 준비한 연보를 약속대로 바침으로써 다른 많은 성도들까지 분발시키는 '자랑스러운 헌금생활'을 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헌금은 바치는 본인에게는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되는 봉사입니다.

  6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헌금을 가리켜 "심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농사지을 때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되는 것이 철칙인 것처럼 헌금생활 역시 꼭 같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여기서 "많이 심는" 것이 어떤 상대적 액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뒤이어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밝히고 있는 대로입니다.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라는 것은 헌금 바치는 자의 정성의 여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많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헌금 액수와 비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 헌금에 들어간 본인의 정성의 정도와 그 헌금 드릴 때 마음의 즐거움의 정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재정부원은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피고 계시는 항목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으니, 누가 얼마만큼 즐거이 내는지는 틀림없이 살피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을 칭찬하신 것이 그와 꼭 같은 맥락입니다.
  얼마나 '많은' 정성으로 헌금을 드리며 얼마나 '많은' 즐거움과 함께 헌금을 드리고 있는지는 우리의 헌금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이며, 이것은 헌금 드리는 본인이 양심적으로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분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처럼 많이 심는 자에게 돌아오는 '많이 거둘 것'은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그 은혜란 구체적으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한" 자가 되며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본인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 주실 뿐 아니라, 더 큰 선한 일 할 수 있는 힘을 내려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 다음 절에서 다시 반복 강조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을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심고자 하는 자에게 심을 씨를 주신다는 말은 헌금하고자 하는 성도에게 헌금할 수 있는 힘까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뜻입니다.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라는 말은, 바로 그 바친 헌금이 크게 쓰이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헌금 드린 본인에게는 "먹을 양식" 즉 헌금 드리고 나서도 자기 자신 위해 쓸 것이 결코 부족하지 않도록 채워 주실 뿐 아니라,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는" 더 큰 축복을 내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헌금생활에 따른 이런 영육간의 큰 은혜와 축복은, 결코 목사들이 지어내어 하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틀림없는 약속을 두고 마치 목사들이 교인들의 돈을 짜내기 위한 얄팍한 수법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목사에게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 얼마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소리이겠습니까?

  정말이지 헌금은 즐겁게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색하게 헌금하는 자나 억지로 하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도 믿지도 못할 사실이겠지만, 체험하는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벌어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세상일들 중에도 모를 때는 그저 어려운 줄만 알고 피했었지만 일단 한번 해 보면 '아하, 이게 이런 재미에, 이런 보람에 하는 것이구나.'하고 그 맛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가 처음에는 물에 들어가는 것이 무섭고 싫겠지만, 일단 수영하는 재미를 알게 되면 전혀 달라집니다.
  고아원이나 빈민병원을 찾아가서 위문품 전달하고 전도하는 것도 처음에는 귀찮고 거리끼는 일이라도, 한번 직접 해 보면 그야말로 가슴 뭉클한 보람을 알게 됩니다.

  헌금생활 역시 그러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힘들고 하기 싫게만 여겨지더라도 일단 체험해 보면 그것은 신자에게는 정말 쉽고도 즐거운 일입니다.
  바친다는 그 자체가 즐거워지는 것 - 헌금에 인색한 교인들은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고 의심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원래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즐겁게 드리는 자에게는 두 가지, 즉 더 풍성하게 헌금드릴 은혜를 넘치게 해 주시며 또한 자신의 생활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도록 채워 주시는 축복을 반드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헌금생활에도 역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있습니다.
  인색함과 억지로 하는 자는 그것이 늘 시험거리가 되고 더더욱 헌금생활이 어려워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닫고, 오직 정성과 즐거움으로 바치는 가운데 반드시 따라오게 되는 더 큰 은혜와 축복을 꼭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헌금은 하나님께는 감사와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봉사입니다.

  11절 이하 15절의 말씀에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라는 말은 바로 앞 절에서 언급되었던 사실, 즉 헌금 생활을 통하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는" 은혜 생활의 부요함을 뜻합니다.
  그런 성도는 계속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하는" 즉 점점 더 후하게 헌금할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영육 간의 부요와 풍성함이 넘치는 헌금생활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많은 감사가 돌아가는 유종지미를 거두게 됩니다.

  여기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한다"라는 말은, "저희" 즉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우리" 즉 지금 헌금을 모아서 보내고 전달하는 이쪽 헬라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뒤이어지는 절에서 또다시 설명되었습니다.
  "이 봉사의 직무" 즉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하는 것이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즉 그 교회 성도들을 돕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의 구절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넘치게 드리게 할 것이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즉 지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드리는 헌금은 궁극적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게 만든다는 뜻인 것입니다.

  13절의 말씀도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하자면 '너희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너희의 이 봉사가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고 있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헌금생활 충성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곧 그 신자 자신의 신앙생활이 진실함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어 참된 신자가 되면 그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헌금생활을 통하여서도 반드시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4절의 말씀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라는 말은,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런 사랑의 헌금을 전달받으면 당연히 일어나게 될 일들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 역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즉 그 헌금의 결과 하나님께 많은 감사와 영광이 돌려지고 참된 신앙생활하고 있는 신자가 드러나며 성도들과 교회들 간의 유대와 영적 교통이 더욱 깊어지게 될 것들을 생각하니, 사도 바울로서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 즉 하나님께서 신자의 헌금생활을 통하여서 이처럼 오묘하고 풍성하게 내려 주시는 은사에 그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참된 신앙을 마땅히 헌금생활을 통하여서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진짜 속마음은 아무도 알 길 없고 물론 판단할 길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일 성수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기본 신앙은 갖춘 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헌금생활은 더 나아가서 그 신앙이 얼마나 진실하고 열심 있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식이 똑똑하고 행실이 바르면 그 자체가 부모에게 영광이 되는 것처럼, 어떤 성도가 진리에 바로 서고 충성스러운 봉사를 발휘하면 바로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헌금생활은 바로 그 사실,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만큼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대표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성도의 헌금생활은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하도록 만드는 증폭의 힘까지 있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정성을 다해 헌금하는 성도들을 볼 때, 목사의 심령에서 얼마나 뜨거운 감사가 하나님께 돌려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을 통하여,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어디선가 구제를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문서전도헌금을 통하여 주보를 받게 된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선교비를 받은 선교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원을 받게 된 신학생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을 양(量)이 얼마나 많을지를 생각해 보십니까?

  이처럼 바치는 본인은 자신이 헌금하게 됨을 오히려 감사드리고 그 헌금이 선하게 쓰이고 있는 곳에서 또 많은 감사들이 드려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헌금은 하나님께 올라가는 감사와 영광을 곳곳에서 배가(倍加) 증폭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는 사람의 제일 되는 본분이란 입으로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늘 이와 같이 이미 받은 부요한 은혜 가운데 많은 감사로써 이 헌금 봉사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을 진실로 기쁘시게 하는 큰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제 기억에는 미국의 조지아(Georgia)주 아니면 그 부근의 어느 남부 주에 있고 그 이름은 프리미터교회(Premeter Church)라고 기억됩니다.
  어떤 신학교 세미나에서 그 교회의 새신자 교육을 어떻게 시행하고 있는지를 들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저는 한 가지 정말 뜻밖의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처음 나오는 교인은 소정의 교육과정을 먼저 거친 후에 어떤 서약서에 서명(signature)을 한 후에 정식으로 등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서약서의 내용은 개인 신앙고백이라든지 기본적인 교회생활 등에 관한 것이었는데,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보면 "나는 십일조 생활을 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서약이 있고 매주일 평균 십일조 액수가 얼마나 될 것인지까지 써 넣는 난이 있었습니다.

  저는 상당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등록하는 교인에게 십일조생활을 서약까지 시킨다는 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헌금생활 열심히 한다는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보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무슨 강요를 하거나 부담 주는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미국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서는 새신자들을 다 떨어뜨리기 십상일 것처럼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는 미국 교계에서는 꽤 잘 알려진 신흥 대형 교회이며 계속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바로 그런 까닭에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을 '교회 성장학'이란 과목의 강사로 그 신학교에서 초청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여튼 저는 그것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교인이든지 한국 교인이든지, 그 문화와 관습이 어떻게 다르든지 간에 상관없이, 참된 교회와 제대로 된 신자들은 어디 가나 꼭 같이 충성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신자의 기본 의무를 당연히 여기고 즐거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진짜로 구원의 확신이 있고 은혜 받은 신자라면 그 누구나 꼭 같이 통하는 사실임을 재삼 확인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헌금생활은 거북해 하고 감출 일이 아니라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행함으로써 성도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힘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헌금은 인색함이나 억지로 할 때에는 평생 시험거리가 되지만 정성과 즐거움으로 할 줄 알게 되면 은혜가 갑절 넘치는 것이 됩니다.
  또한 바로 그런 헌금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참된 신자로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영광과 감사를 더욱 크게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이 마땅히 바쳐야 했을 헌금에 빠진 것이 있다면 나라는 개인에게 바로 그만큼 영적 손해가 있었을 것이고 이 교회를 통하여 이룰 수 있었던 선한 일에도 바로 그만큼 모자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런 부족함에서 벗어나서, 늘 교회에 힘을 주고 다른 성도를 격려하는 자랑스러운 헌금, 즐겁게 드리는 가운데 또 다른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는 헌금, 자신의 삶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헌금, 이런 아름답고 멋있고 귀중한 헌금생활의 은총을 새 한 해 동안에는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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